월간복지동향 2005 2005-06-10   3473

1950년대의 사회복지

지난 호까지 미군정기의 사회복지를 전재민 대상의 공공구호, 주택대책, 실업대책, 민간구호단체에 대한 대책 등의 구호대책과 노동자보호입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1950년대의 사회복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1950년대의 복지를 살펴봄에 있어서 역사기행 꼭지에서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주로 살펴볼 것인데 이번 호에서는 1950년대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배경과 복지욕구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 호에 복지제도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950년대 복지에 관한 인식의 전환

대개 1950년대는 가난과 혼란의 시기였고 따라서 복지제도라는 것이 발달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 것을 요구할 형편도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반드시 맞는 것만은 아니다. 1950년대의 복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1950년대 당시의 정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욕구들에 대한 대응을 외원단체 등에 맡긴 채 적절히 대응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전혀 없었다거나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는 주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대책과 논의가 있었다. 다만, 당시의 정부대책이나 정부대책에 대한 요구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1950년대 당시에는 복지가 필요했다면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생긴 필요였고 자본주의의 작동으로 인해 생긴 필요는 아니었다. 또한, 1950년대에 복지가 필요했다면 그것은 국가형성 과정의 하나로서 필요한 것이었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한 필요는 아니었다.

그리고 1950년대 당시 국가형성 과정은 한마디로 반공국가의 형성과정이었다. 따라서 1950년대의 복지는 오늘날 우리가 복지제도에 전형적으로 속한다고 생각하는 제도범주로만 국한시키지 않는 시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앞의 두 번의 역사기행에서 살펴 본 미군정기의 복지가 제2차 대전과 식민지 경험에서 발생한 모순에 의해 필요한 것이었다면 1950년대의 복지는 한국전쟁과 반공국가의 형성 필요성에 의해 요구된 것이었다.

1950년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전반적 실태

1950년대의 복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1950년대의 사회경제에 대해서도 대개 사람들은 한국전쟁과 그로 인한 파괴, 그리고 가난을 연상하며 또 그 시기를 매우 정체되고 혼란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니다.

1950년대의 경제 역시 나름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1950년대의 경제는 크게 보아 1954년부터 1957년까지의 전쟁복구기와 1958년부터의 전반적 불황기 혹은 구조조정기로 나눌 수 있다. 흔히 경제계획은 군사쿠데타 후인 1962년에 수립한 것이 최초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 비록 외국인의 손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에 주로 전쟁복구에 초점을 맞춘 경제계획의 수립이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 수립된 경제계획은 유엔이 수립한 것과 미국이 수립한 것이 있는데, 유엔이 수립한 것으로는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미국 네이산 협회(Nathan Association)에 연구용역을 의뢰하여 작성한 한국경제재건계획(네이산 보고서, 1954 2월 최종보고서 제출)이 있으며 그 외에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주관한 한국농업 5개년계획과 세계보건기구(WHO)가 주관한 한국보건 5개년계획이 있었다. 미국이 수립한 계획으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로 파견된 헨리 타스카(Henry J. Taska)가 주도하여 작성한 타스카 보고서(Taska Report)가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경제계획에 의해 전쟁복구는 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복구는 1957년이 되면 대체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기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경제성장률도 그리 낮지 않았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9%였는데, 비슷한 기간 동안의 다른 나라의 연평균 성장률을 보면 멕시코가 4.1%, 인도 5.6%, 필리핀 6.2%로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고, 선진국 중에서는 미국이 2.7%, 영국이 1.6%였으며, 서독과 일본이 각기 11.6%와 9.1%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서독과 일본에 비하면 낮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1950년대 한국 경제의 성장속도가 결코 뒤졌다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에 따라 산업별 구성비도 변화를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2차 산업의 구성비 증가가 가장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2차 산업의 구성비는 1953년에는 12.9%에 불과했지만 1959년에는 20.0%에 이르는 정도로 커지게 된다. 1차 산업의 비중은 1953년 42%에서 1959년 38.5%로 약간 감소하였다. 하지만 1950년대 한국경제를 산업별 취업자구성으로 보면 여전히 농업부문의 취업자가 매우 많은데 1차 산업 취업자는 1958년에도 65.2%에 이르렀고 농업 취업자는 62.9%에 달하였다.

그러나 국민총생산에서의 구성비나 산업별 취업자 구성비에서 1950년대 당시 한국경제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농업경제였다는 사실이라기보다는 3차 산업의 비중과 취업자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았다는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 당시 한국의 농업인구 비중은 대만이나 필리핀 등과 비교해서 특별히 더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 1950년대 내내 한국의 3차 산업 비중은 40% 이상이었으며 3차 산업의 취업자 비중도 30%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다.

1956년 당시 일본의 3차 산업 취업자가 전체 취업자의 35%였는데 이와 비교하면 농업부문의 취업자가 많았다는 것이 1950년대 한국의 특징이라기보다는 3차 산업 취업자가 많았다는 것이 한국의 특징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차 산업 취업자의 비중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았던 것은 주로 원조 때문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키로 한다.

[표 1]1950년대의 산업별 구성비 추이

-표없음

여하튼 1950년대 한국경제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전쟁복구에 의해 나름대로 꾸준한 성장을 하게 되는데 이 성장은 1957년까지 이어지다가 그 이후로 멈추게 되는데 이는 전쟁 후의 복구와 재건을 주축으로 한 경제상승의 부양력이 1957년까지의 전쟁복구의 대체적인 완료로 그 세력을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1950년대 한국경제는 1954년부터 195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쟁복구를 어느 정도 일단락짓게 되어 1958년부터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에 맞게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구조조정을 요구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 구조조정 요구에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이승만 정권을 이은 민주당 정권도 크게 예외가 아니었다.

1958년경부터 제기된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또 다른 원인에 의해 더욱 가속화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의 전환과 관련된 것이다. 미국은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원조정책의 전환을 검토하고 있었고 이것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자립경제의 모색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은 결국 원조정책의 기본기조를 수정하여 무상원조를 감소하고 일부 원조를 유상차관형태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국내에는 1959년 1월 동양시멘트의 시설확장용 DLF 차관 214만 달러가 최초의 유상차관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이러한 원조정책 자체의 전환과 아울러 원조액 자체도 크게 감소하였다. 당시 미국원조는 1957년 3억 8,300만 달러에서 1958년 3억 2,100만 달러, 1959년 2억 2,100만 달러로 2년 사이 무려 1억 1,600만 달러나 감소하였다. 이처럼 원조가 급격히 감소하고 원조의 성격이 전환함에 따라 구조조정을 요구받고 있으면서도 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던 한국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전반적 불황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전반적 불황은 원조경제로 인한 국내농업기반의 파괴로 더욱 가중되었다.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양곡은 1955년 5월 미공법(美公法) 480호(PL480)에 의한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협정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도입되고 있어서 1953년만 해도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원조양곡은 당시 국내 양곡생산량의 32%나 차지하던 상황이었다. 도입양곡의 비중은 1954년에 5.6%로 감소했지만 다시 늘어나서 1957년에는 24.2%, 1958년에는 22.4%에 달하였다. 흔히 한국전쟁 후 미국의 잉여농산물 도입으로 굶주린 한국인들이 먹고 살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사태를 매우 일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그것도 도시민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원조양곡이 국내 양곡생산량의 많게는 1/3에서 1/5이나 되는 양을 차지함으로 인해 당시 국내의 농업생산기반이 근저에서부터 붕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농가부채가 격증하여 농업은 전반적으로 황폐화하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전쟁 직후만 하더라도 한국의 농사작물은 비교적 다양했으나 원조양곡의 도입으로 이러한 농사는 그 기반이 사실상 거의 붕괴하고 말았다. 농업기반의 붕괴는 농촌 거주자들의 도시로의 유입을 결과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은 해방 직후에는 전재민의 유입으로 이상적 비대화를 겪었지만 한국전쟁 후에는 농업기반 붕괴로 인한 이촌향도현상으로 이상적인 비대화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앞에서 1950년대 당시 한국경제구조의 특징은 농업경제라 아니라 3차 산업의 비정상적인 비대화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농업기반 붕괴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며, 농업기반 붕괴의 기저에는 미국으로부터의 잉여농산물 도입이 원인으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농업의 붕괴로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은 도시빈민층을 형성했으며 주로 3차 산업에 취업했는데, 이 당시 3차 산업 또한 건전한 의미의 산업이 아니었다. 1950년대의 3차 산업 중 주택이나 공공서비스 부문은 거의 정체상태였거나 감소추세에 있었고 그 반면 교통‧통신 등 사회간접자본과 개인 및 사회서비스부문은 빠른 성장세를 보였는데, 이들의 전체 3차 산업 대비 비중은 1953년 42.7%에서 1959년에는 49.1%로까지 증가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3차 산업이 1차 산업이나 2차 산업부문에서의 국내생산과는 연관이 없는 원조물자의 도입과 그것의 배분과정에서 생겨난 유통 및 상업, 기타 각종 서비스 부문의 대량창출의 결과로 성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1950년대의 3차 산업은 국내생산과는 무관하게 원조물자에 기생하여 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57년부터 단행된 원조의 급격한 삭감은 한국경제의 침체를 초래함과 동시에 3차 산업에 주로 종사하던, 농촌에서 이주한 도시빈민들의 생활고를 더욱 가중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의 악화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경제적 구조조정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미국원조가 급감함에 따라 195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전반적 불황에 빠져 들었으며 이로 인해 실업이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 정부의 공식통계치에 취업자 수 등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실업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당시 한국노동문제연구소가 1956년에 마련한 대담 기록자료를 보면 그 대담에 참석한 인사 중 당시 고려대학교 김진웅 교수가 1956년에 사회부가 노동자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5인 이상 사업체의 상시취업자 수가 약 23만명인데 비해 실업자 수는 약 97만명으로 나왔다고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한국노동문제연구소, ꡔ노동문제ꡕ, 제1집, 1956). 또한 대한노총 경전조합이 1959년 1월에 발간한 ꡔ월간노동ꡕ 제7권 제1호에서 노동소식을 전한 글에는 당시 부흥부가 실업자를 214만 7천명으로 추산했으며 보건사회부는 실업자를 207만 9천명으로 추산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또, 의회평론사 편집실이 1959년에 발간한 ꡔ의회평론ꡕ에 실은 논단에는, 최근 실업사태는 실업홍수사태이며 경영자나 변호사, 의사 등 일부계층을 제외하면 공무원을 비롯한 모든 봉급생활자들은 대부분 반(半)실업상태에 있다고 하고 있다. 또한, 합동통신사가 펴낸 ꡔ합동연감ꡕ 1959년판에는 내무부가 1957년에 조사한 결과를 인용하면서 1957년 12월말 현재 취업자는 782만 7천명, 실업자는 35만 8천명, 무업자는 211만 9천명이라고 하면서 이 때 무업자는 당시 한국은행이 내린 정의에 따라 14세 이상 60세 미만의 자로서 노동능력이 있으나 직업을 구하지 않는 자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로 볼 때, 당시 실업은 완전실업만이 아닌 실망실업 등 광범위한 의미로 실업으로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전쟁복구로 인한 성장동력이 있을 때에도 실업자는 정부가 파악한 취업자 수보다 훨씬 많았고 더욱이 경기침체가 나타난 1950년대 후반에 실업자는 더욱 증가하여 200만명을 상회했다고 볼 수 있다.

실업자의 증가와 함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매우 열악해져서 1959년 4월 정부가 실시한 제8회 노동실태조사 결과가 수록된 ꡔ보건사회행정연보ꡕ 1959년판에 의하면 1958년도 30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의 월 평균임금은 33,858환이었는데, 이는 같은 해 세대당 월평균생활비 46,347환의 73.1% 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동일규모 사업장 노동자의 1959년도 월 평균임금은 37,135환으로 같은 해 세대당 월평균생활비 46,661환의 79.6% 수준에 불과하였다. 한편 당시 노동계에서 최저생계비를 조사한 자료도 있는데 이 자료에 나온 수치는 그리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당시 생활수준에 대한 노동계의 인식의 일단을 볼 수 있다.

대한노총 경전조합이 1959년에 발간한 ꡔ월간노동ꡕ 제7권 제7호에는 1958년도 5인 노동자 가구의 월 최저생계비는 85,800환이라고 되어 있으며, 이 때 5인 가구는 성인 2명, 소인 2명, 유아 1명으로 가정되었다. 이 월 최저생계비의 비목별 수치를 보면 주식비 10,650환, 부식비 11,450환, 주택비 7,000환, 광열비 12,200환, 교육비 6,500환, 피복대 10,500환, 부과세 11,500환, 잡비 16,000환으로 되어 있다(그런데, 주식비와 부식비를 합한 식료품비(22,100환)의 전체 최저생계비 대비 비중은 25.8%여서 이 최저생계비는 실상 그리 신빙성 있는 수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앞서 본 월 평균임금을 이 월 최저생계비와 비교하면 1958년은 39.5%, 1959년은 54.4%가 되는데 이것이 최저임금이 아니고 평균적인 임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임금수준이 매우 낮았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 노동계가 임금수준에 대해 매우 낮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생활범죄의 증가

경기불황과 농촌의 피폐화, 도시빈민의 증가, 실업의 증가 등은 필연적으로 민중들의 생활난을 가중시켰을 것이며 이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낳았을 것이다. 이런 사회문제는 여러 가지 지표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이른 바 생활범죄라고 분류할 수 있는 사건들의 추이를 통해서도 사회문제의 일단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당시 법무부가 펴낸 자료로서 ꡔ법무연감ꡕ에는 기소사건의 인원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자료를 구할 수 있는 1955년판과 1958년판에 따르면, 전체 범죄에 관련된 기소인원 총수는 1954년에 108,136명이었고, 1957년에는 108,167명으로 큰 변화가 없으나 재산범죄(절도, 사기 등)와 강력범죄(강도, 상해, 폭행 등)의 기소인원은 1954년에 13,424명에서 1957년에 26,961명으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표 2> 참조).

이를 백분율로 보면 재산범죄와 강력범죄에 관련된 기소인원은 1954년에 12.4%에서 1957년에 24.9%로 두 배의 수치로 증가한 것이다. 그 중 재산범죄는 1954년 6,873명(6.4%)에서 1957년 15,773명(14.6%)로 증가하였고, 강력범죄는 1954년 6,551명(6.0%)에서 1957년 11,188명(10.3%)로 증가하였다. 강력범죄 관련 기소인원은 1.7배 증가한 반면 재산범죄 관련 기소인원은 2.3배 증가하여 재산범죄의 증가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표 2] 재산범죄와 강력범죄의 기소인원 추이

-표없음

재산범죄나 강력범죄가 모두 생활범죄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생활범죄의 범주와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전체 기소인원의 증가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 가운데 재산범죄와 강력범죄, 그 중에서도 특히 재산범죄에 관련된 기소인원이 크게 증가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생활고의 가중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재산범죄나 강력범죄의 증가가 생활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자료에 나타난 군경원호대상자로서 이 범죄에 연루되어 기소된 인원의 추이를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1950년대 법무부가 펴낸 ꡔ법무연감ꡕ에는 일반 범죄자 외에 소년범과 함께 군경원호대상자 및 그 가족들로서 각종 범죄에 관련된 기소인원 통계를 별도로 수록하고 있다(군경원호대상자를 별도 집단으로 분류하는 분류법은 군사쿠데타 이후 나온 자료에는 사라진다).

이 수치를 보면 군경원호대상자 및 그 가족으로서 전체 범죄에 관련되어 기소된 인원의 총수는 1954년 507명에서 1957년 1,541명으로 3배 가까운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재산범죄 관련 기소인원은 1954년 157명에서 1957년 701명으로 무려 4.5배 가까이 증가하였고 강력범죄 관련 기소인원은 1954년 208명에서 1957년 486명으로 2.3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군경원호대상자의 경우 재산범죄와 강력범죄 관련 기소인원이 전체 기소인원의 71.7%(1954년) 내지 77.0%(1957년)을 차지하여 기소인원 전체를 대상으로 보았을 때 재산범죄 및 강력범죄 관련 기소인원이 차지하는 비중 12.4%(1954년)와 24.9%(1957년)에 비해 크게 높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군경원호대상자의 총 기소인원이 1954년에서 195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3배가 넘는 증가율을 보인 것은 주로 재산범죄 및 강력범죄 기소인원의 증가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1950년대 한국사회에서 군경원호대상자와 그 가족들은 국가로부터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군경연금법이 있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급여수준도 매우 열악하여 장애를 입은 제대군인이나 퇴역경찰의 생활을 보장하기에 적절한 수준이 아니었으며, 유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하기에도 적절한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장애를 입은 군경원호대상자들이 취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의 경우 생계유지를 위해 또는 사회의 냉대에 대한 분풀이로 재산범죄나 강력범죄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1950년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상이군경은 일반인들에게 이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는데 한편으로는 불쌍한 존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존재였다. 불쌍하다는 것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장애를 입거나 유가족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어서 불쌍하다는 것이며, 위험하다는 것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사회에 대해 분풀이를 할 때에는 매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표 2>에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된 군경원호대상자의 수도 1954년에 비해 1957년에 크게 증가하는데 이 역시 당시 군경원호대상자들이 처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재산범죄와 강력범죄로 기소된 인원의 증가는 생활범죄의 증가를 의미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으며, 특히 군경원호대상자로서 재산범죄 및 강력범죄 관련 기소인원의 급증은 생활범죄와의 관련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군경원호대상자 기소인원의 급증 추세는 당시 정부의 반공국가 형성시도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였다는 점도 함께 보여주며 이는 한국전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를 비롯하여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한국전쟁이 곧 반공전쟁이라고 끊임없이 교육받아 왔다. 그리고 반공은 대한민국의 국시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여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형에 처하는 등 평화통일 주장 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공전쟁인 한국전쟁에 나가 다치거나 사망한 군경원호대상자와 그 가족은 당연히 국가의 유지에 큰 공헌을 한 공로자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국가는 응당 그에 상응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경원호대상자들 중 강도나 사기, 절도 등과 같은 재산범죄로 인해 기소된 인원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는 국가가 그들에 대해 응분의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가 그들에게 제대로 보상을 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 시절은 모두가 가난했으므로 그런 보상조차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군경원호대상자 범죄, 그것도 그들의 생활범죄의 급증은 한국전쟁의 성격과 그 이후 진행된 반공국가 형성과정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을 사상적으로 통제하고 나아가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며 자신들의 통치기반을 굳히는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만들 목적으로 반공이라는 이념을 이용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공이데올로기는 국민들을 통제하는 체제를 만드는 데에는 대단히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기능했지만 국민의 삶을 돌보는 데 있어서는 하등의 기능도 수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도 국민들 사이에 국가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남아 있는 원인의 일단을 설명해준다.

노동운동의 성장

1950년대에는 노동운동도 일정한 성장추세를 보이며 특히 이 추세는 1950년대 말에 좀 더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1950년대의 정부 공식통계치가 불비하여 노동조합의 조직율을 계산하기는 어렵다. 1958년에 보건사회부는 그간 흩어진 자료를 모아 1955년부터 1957년까지의 각종 통계치를 수록한 ꡔ보건사회통계연보: 1955~57년 합병호ꡕ를 발간하였는데, 이 연보의 예언(例言)을 보면 “본 연보의 통계표 중 각종 수자의 질, 양 공히 의문되는 것도 있으나 현재 이에 대치할 자료도 없어 집계결과를 그대로 발표하게 되었다”고 하여 정부 스스로 공식통계치의 신빙성에 자신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 후부터 1957년까지의 사회부문의 각종 통계치는 정부 스스로가 자신없어 하는 이 ꡔ보건사회통계연보: 1955~57년 합병호ꡕ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1958년부터는 매 연도 발간한 ꡔ보건사회통계연보ꡕ를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이 경우도 의문되는 점이 없지 않다. 예컨대, 1962년에 군사정권이 발간한 ꡔ보건사회통계연보ꡕ에는 1957년까지의 통계수치가 ꡔ보건사회통계연보: 1955~57년 합병호ꡕ의 수치보다 전반적으로 하향조정되어 있으며, 1961년에 역시 군사정권이 발간한 ꡔ보건사회통계연보ꡕ에는 1960년의 수치가 아예 실려 있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같은 연보에서도 표에 따라 수자에 차이가 있기도 하다. 따라서 1950년대의 사회부문 통계는 정확한 수치보다는 경향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표 3]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원의 수 및 노동쟁의 발생 추이

-표없음

<표 3>에는 노동조합의 수와 노동조합원의 수, 그리고 노동쟁의 발생건수 및 참여인원이 제시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이들 수치들이 1950년대 말로 가면서 모두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노동조합의 수는 표에 수록된 연도 중 계속 등락을 거듭하여 일관된 추이를 보이고 있지 않지만 1958년까지를 보면 노동조합의 수가 증가한 것은 분명하다. 1959년에 노동조합의 수가 갑자기 큰 폭으로 감소하는데 현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표에 제시하지 않은 1960년 3월까지의 노동조합의 수는 589개였으므로 이를 감안하면 노동조합의 수 역시 1950년대 말까지 증가추세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원의 수는 1955년에 20만 5천명에서 1959년에 28만명으로 증가하여 연평균 8.1%의 증가율을 보여 1959년의 노동조합원의 수는 1955년의 1.4배 가량 되는 수치이다. 노동쟁의 발생건수도 크게 늘어 1953년에 비하면 1959년의 노동쟁의는 10배 이상 되는 수치로 늘었으며 전쟁 후인 1954년에 비하더라도 3.6배로 증가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1959년에는 쟁의참여인원도 5만명에 가까울 만큼 늘어났다.

1950년대 말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원의 수, 그리고 노동쟁의의 발생건수와 참여인원이 전체적으로 공히 증가추세를 보인 것은 1960년의 4월 혁명과 1961년의 군사쿠데타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며 또한 그것은 1950년대의 기간 동안 정부가 의도했던 반공국가 형성시도가 1950년대 말로 가면서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1950년대의 노동조직율과 노동쟁의는 보잘것 없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사실이기도 하나 그것이 대개 서구의 노동운동과 비교하여 판단하는 것인 점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서구의 경우는 노동운동 자체가 합법화한 상태에서 조직율이나 쟁의행위, 그리고 노동운동의 역량을 평가하는 것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형식적으로는 노동운동의 합법화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상은 반공국가를 지향하면서 국가보안법 등을 통해 노동운동을 극도로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역설적으로 서구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라도 그로부터 조그마한 성장만 있어도 이는 반공국가를 지향하던 정권에게는 엄청난 위협으로 느껴졌을 수 있는 것이다. 합법화한 상태에서의 높은 조직율과 극도로 억압된 상태에서의 약간의 성장은 유사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1950년대 말부터 어영화한 대한노총을 대체하기 위한 민주노조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이 역시 수치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치적 효과를 가졌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1950년대의 경제상황의 전반적 전개과정과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의 추이, 그리고 노동운동의 추이, 생활범죄의 추이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다음 호에서 1950년대 정부가 시도했던 복지정책과 그에 대한 민간에서의 요구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남찬섭 / 성공회대학교 강사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