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5 2005-12-10   1442

필리핀을 위한 변명

필리핀에 머물면서 심란할 때가 많다. 한국사람들이 안가는 곳이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필리핀에는 요즘 하루에 약 2,000명이 들어온다. 16세기 중반부터 350년에 걸친 스페인의 지배에 이어, 40여 년간의 미국 지배, 그리고 4년간의 일본 지배를 겪은 스페인 사람들은 이제 한국인들의 필리핀 침공이 시작되었다고 농담을 한다.

필리핀에서 한국사람들의 눈에 가장 띄는 현상은 빈곤일 것이다. 필리핀은 못사는 나라인가? 그렇다. 대도시 도처에 널린 빈민촌, 위험한 차길에서 승용차나 택시를 표적으로 구걸하거나 물건을 파는 수많은 아이들, 40%에 달하는 빈곤률, 파악하기도 어려운 실업률, 왠만한 서민들은 6-7 식구에 단칸방을 면하기 어렵다. 해외 노동자가 8,800만 인구의 10%에 달하고, 이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간신히 꾸려지는 국민경제 등.

조금 아는 사람들은 60년대 초까지 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던 필리핀이 왜 이렇게 되었냐며 동정 반, 조롱 반의 눈길을 던진다. 60년대 우리나라의 일인당 GNP가 100불도 안될 때, 필리핀은 1,000불을 넘었단다. 그런데 지금도 1,000불 남짓이다. 그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풍요로운 자연 자원을 가진 나라가 40여 년 동안 정체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대개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주장하기 좋아한다. 얼마 전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 학생은 필리핀 사람들의 애국심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논문을 써서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교민 한 분은 필리핀의 어설픈 민주주의와 역시 어설픈 노동자 보호정책을 원인으로 들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신문의 특파원은 필리핀의 무모한 경제적 민족주의를 원인으로 꼽았다. 경제적 민족주의(국수주의!)가 외자유치를 방해해서 그렇다는 논리이다. 혹자는 미군을 몰아내서 그렇다고 하기도 한다.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은 원인에 대한 논쟁을 길게 할 여유는 없지만, 몇 가지 변명은 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애국심과 관련해서는, 19말 독립군들이 막강한 스페인을 물리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그 직후 미국의 기습공격에 대항해서 수년간 결사적인 항전을 했던 사실도 상기해야 하겠지만, 국민경제를 지탱한다는 해외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송금은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할지.. 그리고 어설픈 민주주의가 문제라면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 해법일 것이다. 어설픈 대중민주주의의 단적인 예로 노동정책의 예를 많이 든다. 즉 6개월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전에 해고가 반복되어, 노동자들이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기술 숙련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호막을 해제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그 결과 저임금과 고용불안에서 헤어날 길이 없게 될 노동자들이 어떻게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보호규정을 좀 더 강화해서, 고용주들이 부담해야 할 해고비용을 높여서 해고를 방지하는 것이 옳은 방향 아닐까? 외국인의 투자문제는 논리적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제3세계에서 이러한 측면에서 성공한 나라가 어디 있는지, 반면 특이하게 잘 나가고 있는 대한민국은 맨날 외국 투자가 부진하다고 지청구를 먹고 있는 상황임을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섣부른 주장들 뒷면에 오랜 식민지배로 인한 왜곡된 경제사회적 구조, 이로 인한 족벌정치, 관료들의 부정부패 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린다. 물론 이를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양 슬쩍 넘어가는 경향이다. 앞서 언급한 특파원의 글에도 나와 있지만, 단적으로 필리핀은 국부의 90%를 10% 인구집단이 독점하고 있다. 사유지내의 철도가 몇 백 킬로미터에 달한다든지, 450개의 기업집단을 한 가문이 소유하고, 강남지역 만한 노른자위 땅을 역시 한 가문이 소유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필리핀은 결코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어느 선진국 못지않게 즐기고 누릴 것이 많은 나라이다.

제3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비슷하지만 이러한 극단적 양극화는 식민지배의 유산이다. 종주국의 하수인 역할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식민지 지배계급은, 종주국이 바뀐다거나 하는 역사적 격변기에 토지조사 사업 등을 악용해서 대토지를 축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운 종주국은 거의 항상 이들을 파트너로 선택하였다. 필리핀의 특성은 이러한 대토지, 대자본 소유자들이 풍부한 재력을 이용해서 정치권마저도 직접 지배한다는 것이다. 의원, 도지사, 시장 등을 대부분 이들이 차지하거나 관할하고 있다. 이들의 영지에서 일하는 사회운동가들은 종종 암살당하기도 한다.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이들이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모험을 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이 마르코스이다. 한국의 박정희처럼 마르코스 시대에 대해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한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22년간의 독재기간을 거치면서 필리핀 경제가 얼마나 완전히 거덜났는지 애써 눈감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1986년 마르코스가 쫒겨날 때, 빼돌렸다고 알려진 돈만 해도 당시 한국의 4대 재벌의 총자산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마르코스는 기존의 족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군부 등 신흥세력을 자기 패거리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들의 부정부패는 실로 엄청났다. 거기에 더해 기존의 족벌들도 그대로 존재했고, 이들은 마르코스가 물러나면서 정치적 지배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집권세력들은 태생 자체가 전통족벌들로 비개혁적이었을 뿐 아니라, 격변하는 지구화 경제에 대응하는 데 무능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화교들의 경제적 지배력 등 언급할 것이 많지만, 어쨋든 민중의 입장에서 상황은 암울하다. 가난한데다가 희망도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행복지수가 세계적으로 방글라데시와 1, 2위를 다툰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체념인지 삶의 지혜인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필리핀에서는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수많은 사회운동가들을 볼 수 있는데, 빈민운동가 한 분이 한국을 방문하고 와서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에 회의를 느낀다는 소감을 들었다. 쉽게 말해, 한국 사람들은 일에 바빠서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우는 단칸방에 많은 식구가 생활할 정도로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 않지만, 가족을 돌보는 일 등에서 정서적으로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이 동네는 축제도 많고, 11월부터는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다. GNP 방식으로는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대안적인 시각으로 보면 뭔가 다른 것이 보일 것도 같다. 아시아를 판단하기 이전에 아시아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도대체 필리핀 같은 곳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필리핀 사람들은 도대체 한국같은 곳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

이영환 / 성공회대 교수, 필리핀 아테네오대학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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