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6 2006-05-11   1236

1970년대의 사회복지 – 3

지난 호에서는 1970년대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회보험제도의 도입과정 중 국민복지연금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그 나머지인 의료보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의료보험법은 원래 1963년 12월 16일에 제정된 바 있으며, 1970년대에는 그 개정이 중요한 사안이었고 개정내용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강제가입 조항의 규정이었다. 이 강제가입 조항이 규정되어 의료보험법이 개정된 것은 1976년이었다.

개정 전까지의 의료보험

1963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의료보험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적용대상과 관련하여 ‘근로자는 이 법에 의한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제정 의료보험법 제8조)라고 규정하여 임의가입을 원칙으로 하였다.

둘째, 제정 의료보험법 제12조에서 ‘이 법에 의한 의료보험의 보험자는 의료보험조합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여 의료보험의 운영방식을 이른 바 ‘조합방식’으로 정하였다. 이 조합방식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통합방식 대 조합방식’이라는 구도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2000년에 와서야 통합방식으로 정리되었다 .

셋째, 제정 의료보험법 제28조에서 보험급여의 종류를 요양급여, 장제급여, 분만급여의 세 가지로 정하고 현물급여를 원칙으로 하였다.

넷째, 제정 의료보험법 제44조에서 ‘보험료율은 임금액의 100분의 3 이상, 100의 8 이내의 범위 안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건사회부장관이 정한다’라고 규정하여 오늘날처럼 의료보험료를 임금의 3~8% 범위에서 정해지도록 규정하였다. 아울러 제정 의료보험법 제45조에서 보험료의 분담비율을 시행령으로 정하도록 하였고, 이 분담비율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각기 1/2씩 부담하는 것으로 정해졌다(제정 의료보험법 시행령 제38조).

당초 1963년 11월 29일 정부가 제출한 의료보험법안은 적용대상을 ‘500인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소(국가기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산하기관은 제외한다)에 적용한다’라고 규정하여 강제적용 조항을 두고 있었으나 이것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심의과정에서 위와 같이 임의적용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렇게 제정된 의료보험법은 1964년에 시행령이 마련되어 본격 시행에 들어갔으나 강제적용이 아니었으므로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당시 정부는 1965년부터 임의적용 방식 아래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하였는데 시범사업에 참여한 의료보험조합은 1969년까지 호남비료주식회사(1965넌 9월 조합 설립), 봉명흑연광업소(1966년 3월 조합 설립), 부산청십자 의료보험조합(1969년 7월 조합 설립) 등 몇 개소에 불과하였고, 의료보험법에 강제적용 규정이 도입된 1976년까지도 의료보험조합은 11개소 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제도 실시는 고사하고 시범사업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강제적용 조항이 삭제된 제도 자체의 결함이 그 원인이라는 문제의식이 고조되고 법 개정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총선거시 공화당은 선거공약으로 의료보험의 실시를 채택하는 등 1960년대 말이 되면서 의료보험법 개정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당초 의료보험법이 제정된 직후 1966년에 정부안으로 의료보험법 개정법안이 제출되었으나 국회 회기 종료로 폐기된 바 있었는데, 의료보험법 개정 필요성이 높아가자 1968년 2월에 오원선 의원 외 40인이 서명하여 의원입법으로 개정 의료보험법안이 발의되었고 이것이 1969년 4월 국회 보건사회위원회를 통과하였으며 1970년 6월에는 법사위원회를 통과하고 1970년 7월 국회 본회의 심의를 거쳐 동년 8월에 공포되었다. 1970년 개정 의료보험법은 제7조 제1항에서 ‘근로자‧공무원 및 군인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의료보험에 가입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여 강제적용 조항을 도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정 의료보험법에서도 적용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공무원과 군인까지 적용대상에 포함하고 있다(자영자는 임의가입, 따라서 1970년 개정 의료보험법은 정확히 말하면 강제적용과 임의적용의 혼합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970년 개정 의료보험법은 시행령이 만들어지지 않아 시행되지 못하였고 시범사업만 일부 확대되었을 뿐이었다.

1970년대의 의료보험 시범사업의 확대로 인해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은 자영자 의료보험조합의 신청이 크게 증가하였다는 점이었다. 임의가입대상이 자영자들의 조합설립신청이 크게 증가하였다는 것은 의료수요 증대의 객관적 증거의 하나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임의가입조합의 설립을 위해 지역주민들의 참여도도 대단히 높아서 조합설립을 위한 회의와 정관작성과정에서 수 백 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어서 일부 설립신청 지역의 경우는 의료보험조합 설립을 빙자하여 조합원들로부터 회비를 받아내고 정부의 보조금을 가로채려고 하다가 고발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부작용은 높아가는 보건의료수요를 건전하게 충족하는 제도적 틀을 적절히 만들지 않은 데에 그 근본원인이 있는 것이다.

1976년 의료보험법 개정과정

1976년에 개정 의료보험법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경제성장으로 인한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손준규 교수에 의하면, 사회보장심의위원회가 1974년에 실시한 「국민생활실태조사」² 보고서에 의하면 1962년부터 3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생활수준이 낮은 계층의 비중은 결코 줄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고 한다. 이러한 조사보고서의 내용 외에 지니계수도 1970년대에 들어 크게 악화하는 등 경제성장의 과실이 계층 간에 골고루 분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객관적인 지표로 증명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정권으로서도 심각한 것이어서 1977년에 실시될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사회개발정책의 병행발전을 추진하는 것으로 궤도를 수정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배경으로는 의료사고의 빈발을 들 수 있다. 입원보증금이나 치료비가 없어 환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건이 많이 일어났는데 특히 1976년에는 이러한 의료부조리 문제로 병원장이 16명이나 구속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로 인해 당시 대통령은 1976년 6월 16일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혜택」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객관적 조건의 전개과정 속에서 실제 정부 내부적인 방침이 결정된 계기는 손준규 교수에 의하면 대통령의 결심이 결정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의료계는 의료보험의 실시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³ 이러한 의견을 보사부 장관들에게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보사부는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위원들이 사실상 새로운 의료보험법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에서도 의료보험 실시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의료보험 실시에 관련된 건의는 주무부처인 보사부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청와대로 직접 전달되었고 이것이 대통령 비서실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 1976년 초에 대통령이 의료보험 실시를 직접 지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⁴.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의료보험법의 개정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76년 개정 의료보험법 작성과정에서 두드러진 점은 경영계가 의료보험의 실시를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전경련은 근로자 복지문제를 자주 거론하면서 의료보험의 실시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대한상공회의소에서도 대체로 찬성하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이보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의료계의 대단히 활발한 로비활동이었다. 당초 의료보험 실시에 부정적이었던 의료계 1976년초 대통령의 발표가 있은 후부터는 의료보험의 실시에 대비하여 의료계의 이익이 개정 의료보험법에 반영되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의사협회는 의료보험 실시와 관련하여 ① 항생제의 자유판매 허용, ② 의료보험심의위원회 구성시 의사회대표의 참여 명문 규정, ③ 요양취급기관 지정에 있어서 지역의사회 참여 보장, ④ 단일 의사법의 제정, ⑤ 삼중면허세 해결 등 5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국회 등에 활발한 로비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와 별도로 의협은 자체적인 의료보험법안을 작성하여 정부에 제시하기도 했는데, ① 적용대상은 16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및 전 주민, ② 재정부담에 있어서 정부의 20~30% 부담, ③ 보험료는 사업장 조합의 경우는 정률제, 지역조합의 경우는 정액제, ④ 조합 사무비는 전액 국고부담, ⑤ 심사위원회에 지역의사단체대표의 참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의료계의 로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료보험심의위원회에 의료계 대표의 참여를 보장하는 문제였는데, 추후 개정된 의료보험법에는 의료계 대표의 참여가 명문화됨으로써 이와 관련하여 당시 의료계가 발간하던 의협신문(1976년 10월)에는 ‘의협건의 100% 반영’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릴 정도로 의료계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외에도 특진제 실시를 얻어내는 등 의료계는 의료보험 실시와 관련하여 당시로서 자신들이 주장하던 내용의 상당부분을 개정 법률에 반영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의료계를 제외한 나머지 압력단체들의 로비활동은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초기에 의료보험의 실시를 주장했던 경영계도 실제 의료보험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의견표명도 하지 않았으며, 노동계의 의사표시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는 1963년 당시 처음 의료보험법이 제정될 때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1963년에 의료보험법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던 사람들은 의사 출신의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연구위원들이었으며 당시에는 의료계나 경영계나 노동계 공히 별다른 로비활동이나 의견표명활동이 없었다. 1976년에는 상황이 많이 변하여 그간의 자본주의화에도 불구하고 노동계는 크게 성장하지 못하여 별다른 압력활동을 펼치지 못하였고 체제 내의 전문집단으로 성장한 의료계의 로비활동만 크게 두드러졌다. 한 마디로 시민사회의 참여가 극히 저조한 가운데 그 참여마저도 매우 왜곡된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63년에 제정된 의료보험법은 임의적용과 조합방식이라는 두 가지 유산 쟁점을 안고 있었는데, 1976년 개정 의료보험법은 그 중 전자를 해결하는 단초를 마련한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조합방식이라는 나머지 한 가지 쟁점은 1980년대부터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하게 된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주석>

1. 하지만, 통합된 이후의 의료보험(국민건강보험)에도 조합방식의 잔재가 약간 남아 있다. 국민연금은 보험자가 국가이지만 국민건강보험은 보험자가 국가가 아니라 통합 이후 탄생한 국민건강보험공단이다. 이는 여러 개로 분산된 조합을 하나의 조합(공단)으로 통합한 것이며 국가를 보험자로 설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보험자가 국가이고 제도의 전반적인 관리책임도 국가가 지며 그 실제 운영업무만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위탁하고 있는 국민연금과 달리 국민건강보험은 제도의 정책적 책임은 국가가 지지만 보험자는 공단인 관계로 국가와 보험자인 공단 사이에 수가계약 등을 둘러싸고 의사결정권한 등과 관련하여 갈등의 소지가 있다.

2. 이 보고서는 최저생계비 계측을 위한 시도로 행해진 것이었다.

3. 당시 의료계는 의료보험이 실시되면 일본처럼 재정적자에 빠질 우려가 있으며 또한 영국과 같이 많은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실시가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의료수요의 급증을 비롯, 사회부분의 발전 필요성이 크게 대두하는 데도 불구하고, 사회분야의 발전을 저해하는 성장우선론이나 안보우선론 등 각종 논리를 제공하고 이 논리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 바로 대통령이었으며 따라서 본인이 스스로 제시한 논리의 틀을 깨고 사회분야의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본인의 논리수정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의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시대상황은 모든 중요한 결정이 대통령 본인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남찬섭 / 고려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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