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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위원회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의 복지를 만들어갑니다

월간 복지동향 200호 발행
  • 2020
  • 2020.04.01
  • 1166

사회복지실천은 평등을 실현하는 활동인가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

 

도움을 준다는 것

첫 직장으로 아동청소년시설에서 사회복지사로 일을 시작했다. 나름 청소년기를 거치며 고민을 쌓아온 터라, 청소년들을 만나 뭔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된다는 것, 멋진 일이었다. 교양으로 수강했던 사회복지개론은 어쩐지 나의 고민에 답을 주는 것 같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후 전공을 바꾸어 드디어 사회복지사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감격이 있었다. 그때 첫 출근을 앞두고 성당에서 샀던 작은 천사상이, 이후 많은 직장을 돌고 돌아 지금도 내 책상에 함께 있다. 

 

누구나 어떤 직장이나 그렇겠지만, 현장은 달랐다. 내 기대와 달랐다기 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들이 펼쳐져 있었다. 사회복지학 전공으로 배운 것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었다. 아동청소년을 만나 상담하고 기록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여기저기 연락하는 일들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어떻게 상담해야 하는지, 아동청소년의 삶이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지는지, 무엇이 돕는 일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만난 이들의 삶은 내가 지나온 삶과 아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관에서 만난 아동청소년들의 삶은 ‘일반적’이라고 부르는 생애주기와는 많이 달랐다. 유년기와 학령기를 거쳐 신체적, 정신적, 인지적으로 발달하고 진로를 탐색하며 가족과 분리하며 독립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발달단계는 교과서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6살에 집에서 나와 배회하다 주변 사람이 시켜 물건을 훔치고, 어느 날은 몰래 기차를 타고 상경해 거리를 떠돌며 쌓아온 삶은, 흔히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설명될 수 없었다. 대학에서 그토록 흥미롭게 배웠던 전공과목 ‘인간행동과 사회환경’이 무용해지는 순간이었다. 

 

근데 무용하다고 해서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정상’적인 발달단계인지 제시한 고전학자들의 이론에 비추어, 그런 정상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이상’하다고 판단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또래들과 있고, 학교 다녀야 할 나이에 거리에 있으니 ‘비행’ 청소년이라 부르기에 마땅했다. 사회복지사로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청소년이 학교에 가거나 검정고시를 치르게 하고 진로교육을 받아 취업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서 나의 벽이 시작되었다. ‘문제’를 바로잡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나 나올법하게 누군가 검정고시로 명문대를 갔다는 기사가 한 번쯤 나올 수는 있겠지만,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다르고, 이미 ‘비행청소년’이라고 낙인찍힌 사회에서, 그런 ‘극복’의 서사는 몽상에 가까웠다. 오히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이들에게 왜 학교에 안 가냐고 대학이나 ‘번듯한’ 직장에 가야 하지 않냐고 질문하는 나에게 말이다. 

 

내 관점에서 그들의 삶은 잘못된 것이고 이미 많이 실패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청소년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여주고 싶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도록 ‘도와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이 모든 생각에 깔려있던 나의 가치판단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처럼’ 대학이나 직장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그 외의 다른 삶은 알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 그 바깥은 그저 나락처럼 보였다.

 

사회복지실천과 ‘좋은 삶’의 딜레마

사회복지의 출발은 간단히 말해 ‘좋은 삶’을 만들려는 것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하고, 제34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한다. 사회보장기본법 제2조는 사회보장의 이념을 천명하며, 사람들이 “다양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향유”하고 “사회참여·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제도와 여건을 조성”하여 “행복한 복지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구나 좋은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 혹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은 대단히 가슴 뛰는 일이다. 사회복지학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실천학문’이라고 했다. 사회복지학이 매력적이었던 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현실에서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을 찾는 학문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희망을 품으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사회복지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상이 막상 실천 현장을 만나니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규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20여 년 전의 나는 나에게 익숙한 삶을 ‘좋은 삶’이라고 규정했기에 막다른 벽에 부딪혔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지금과 같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그 동안 많은 사회복지사들이 나처럼 자신이 알던 ‘좋은 삶’과 그들이 만나는 다른 삶 사이의 간극을 겪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간극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때로는 꽤 낯선 삶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저마다 다르지 않을까 싶다. 

 

가령 사회복지사로서 동성애자를 만난다면,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말할까? 차별이 많은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숨기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동성애자가 아닌 삶을 살 수는 없는지, 혹시 바뀔 수는 없는지 조심스레 묻지는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삶’이란 이성애자로서 결혼하여 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라면, 그 ‘정상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도우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 더구나 종교적으로 ‘동성애가 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사회복지사가 어떤 시각을 갖느냐는 단순히 개인적인 관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회복지사는 직업적으로 남의 삶에 관여할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 권한은 꽤 크다. 사회복지사는 개인의 신상정보, 가족관계, 소득수준, 교육수준, 직업, 병력, 범죄력까지 온갖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이 정보를 토대로 그 삶에 ‘개입’한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서비스’를 받는 과정은 자발적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거나 때로는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1)

그러니 ‘좋은 삶’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때로 반갑지 않은 침입이 될 수 있다. 사회복지사의 기준이나 발달과업과 같은 사회가 정한 ‘정상성’을 이유로 ‘좋은 삶’을 규정한다면 말이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부족함’을 보고 ‘도움’을 주려 하는 선한 마음이 발동할 때, 동시에 우리는 차별과 억압의 덫으로 빨려 들어간다. 상대를 ‘문제’로 규정하는 바로 그 순간, 나 자신을 신체적, 사회적 혹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월한 지위와 사회가 부여한 실질적 권한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한다. 도우려는 행위가 상대방을 열등하게 위치지우는 이 기묘한 딜레마를 어찌해야 할까.

  

환경 속의 인간, 그 모호함의 함정

만일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어떤 행위가 차별이 된다면, 그것은 ‘돕는다는 것’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선의가 실제 도움이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 사회복지실천이 가지는 ‘전문성’의 실체일 것이다. 그럼 상대를 열등하게 위치지우지 않고도 돕는 방법이 있을까? 도움을 주는 관계, 과정, 결과가 모두 평등에 부합하게 만드는 사회복지실천이 가능할까? 

 

사회복지실천에서 평등은 중요한 원칙임에 분명하다.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은 “사회복지사는 인본주의·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천부의 자유권과 생존권의 보장활동에 헌신한다.”고 시작한다. 차별금지, 개인의 주체성, 자기결정권의 원칙이 강조된다. 이런 원칙에서 ‘좋은 삶’이란, 사회복지사의 기준이나 사회의 ‘정상성’ 기준을 충족한 삶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받으며 동등하게 권리를 누리는 삶이다. 이런 의미의 ‘좋은 삶’을 실현하는 활동이라면 상대를 열등하게 위치지우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이런 평등원칙이 정말로 사회복지실천의 일관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교과서에서 소개되는 사회복지실천의 기본 관점은 ‘환경 속의 인간’으로, ‘개인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한다’는 접근이다. 이 모호하고도 포괄적인 설명은 무슨 이론이든 담을 수 있는 틀이 된다. 개인과 환경이 상호작용한다는 원리는 거의 모든 사회과학을 설명하는 기초적인 이해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학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부터 다문화주의까지 수많은 이론을 흡수하면서도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인해 논쟁하고 갈등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틀을 채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호성과 포괄성이 상충되는 관점의 실천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컨대 장애인의 동등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회적 모델’이 하나의 이론이라면 개인의 결함을 강조하는 ‘의료적 모델’도 하나의 이론이다. 강점을 강조하며 참여자와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관점이 하나의 이론이라면, 보다 위계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관점도 하나의 이론이다. ‘환경 속의 인간’이란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은 동등하게 경합하고 보완하는 이론들로 이해된다. 

 

결국 ‘환경 속의 인간’이라는 모호한 이론을 접한 사회복지사가 정말로 현장에서 실천하게 되는 관점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사회복지사로서 훈련된 실천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가치, 정부나 기관의 지침에 따른 실천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나 역시 수업을 할 때 서로 상충될 수 있는 이론들을 나열할 뿐, 이 이론들이 어떤 경합과 논쟁을 거쳐 현재의 실천방향을 구성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배워야 할 이론의 가짓수가 점점 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환경 속의 인간’ 관점이 많은 실천의 가능성을 유연하게 열어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접근은 공허하고 또 위험하기도 하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억압과 차별을 눈치 채지 못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실천이 단 하나의 도그마적인 이론과 지침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단순한 누적이나 취사선택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사회복지실천이 정말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평등원칙에 비춘 비판과 논쟁을 거쳐 억압과 차별에 기여하는 이론과 실천을 폐기하고 수정하면서 발전되어야 한다.  

사회복지실천이 억압과 차별에 기여한다면

사회복지실천 이론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경향성은 관찰된다. ‘환경 속의 인간’이라고 하여 환경과 인간을 ‘상호’적인 관계로 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활동은 많은 경우 개인이나 미시적인 환경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사회복지가 이념적으로 사회 불평등의 해소라는 거대한 정의를 지향하고 이론적으로 포괄적인 접근을 채택하고 있지만, ‘실천’의 영역은 주로 개인과 가족을 중심으로 한 활동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변화시키려는 대상 혹은 ‘개입’하려는 대상이 환경보다는 개인이 된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환경’을 변화시키는 활동들은 축소 혹은 생략되곤 한다. 분명 교과서에는 ‘사회행동’이나 ‘옹호’와 같은 용어가 실천 기법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어떻게 사회행동을 하는지 그 이론과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은 많지 않다. 실제로는 사회복지현장의 많은 변화들이 사회행동과 옹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이러한 활동들이 주요한 사회복지사 역할로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사회행동과 옹호를 위한 기본 역량으로 요구되는 권력관계에 대한 이해나 정치참여, 단체행동이나 입법 활동 등에 대한 논의는 사회복지실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사회복지실천은 주로 ‘대상자별’로 조직되어 있다. 이런 대상자별 복지체계는, 장애인복지법, 아동복지법 등 대상자별로 분류된 법체계와 관련 있다. 서비스 전달체계가 대상자별로 조직되어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현장에서 사회복지사로서 활동하게 된다. 교육과정에서도 장애인복지론, 아동복지론, 노인복지론 등 마찬가지로 대상자별로 구성된 교과목들이 많다. 이러한 교과목을 통해 대상자별 특징을 익히고, 주요 욕구를 파악하며, 어떤 활동이 필요하고, 현행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배운다. 

 

한편으로 보면 이런 ‘대상자별’ 복지는 일종의 ‘적극적 조치’로 이해될 수 있다. ‘적극적 조치’란 이미 불평등한 사회에서 동등한 취급만으로는 불리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불리해지는 사실상 차별이 존재할 때, 기존의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해 해당 집단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특별조치를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장애인, 아동, 노인 등 사회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런 의미라면 대상자별 복지는 평등을 실현하는 활동으로서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런데 대상자별 복지는 양날의 칼 같아서 오히려 불평등을 유지할 가능성도 잠재해 있다. 소위 ‘선별복지’라고도 불리는 이런 접근이 낙인을 유발한다는 오랜 지적에서 보듯, 누군가를 사회서비스가 필요한 집단으로 명명하는 순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배운 대상자별 ‘특징’은 개별적인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이들을 집단적으로 판단하는 편견이 되기 쉽고, ‘욕구’라는 것은 그들의 결핍과 결함으로 치환되기 쉽다. 이런 관계는 애초에 당사자를 열등한 존재로 ‘대상화’하고 시작하기에, 그 결과가 평등으로 나아가리라 기대하기가 어렵다. 

 

사회복지실천이 평등을 실현할 수도 있지만 차별에 기여할 수도 있는 정반대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특별히 현장의 사회복지사가 ‘대상자’를 멸시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한 것이 아니어도, 오히려 최선을 다해 존중하며 정성스럽게 대하였더라도, 어떤 종류의 활동은 그 제도나 구조 자체 때문에 억압과 차별에 기여할 수도 있다. 제도적으로 특정 집단을 구분하여 별도로 대우하는 것 자체가 당사자에게 모욕감과 배제를 초래할 수도 있고, 개인의 결함이나 비정상성을 전제하여 실천하는 기관의 목적 자체가 차별에 기여할 수도 있다. 

 

억압의 구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럼 사회복지활동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현장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부끄럽고 무책임한 말이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주장을 하기에 나는 아직 현장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현장의 한 쪽에서는 당사자와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활동과 제도적 변화까지 이루는 실천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가혹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일도 여전히 있다. 기존의 틀 내에서의 변화의 움직임이 있지만 사회변화는 사회복지가 아닌 ‘인권활동’의 몫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사회복지현장에서 사회변화를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많은 사회복지현장이 정부 예산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정부의 정책에 도전하기보다는 정부의 지침을 집행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평등을 위한 인권교육이나 인식개선활동과 같이 사업 방식의 실천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정부의 정책노선과 의지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사회복지사들은 이미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하며 각종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등에 반하는 정책이나 제도에 맞서는 사회행동과 같은 실천을 사회복지기관 혹은 사회복지사가 수행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할까? 

 

최근 탈시설 운동에서는 장애인 거주시설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설 내에서의 인권침해 문제보다도 시설이라는 접근 자체가 인권침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서비스의 관점에서 보면 폭행이나 약취와 같은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시설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다르다. 장애인 거주시설은 근본적으로 장애인에게 고립되고 통제된 생활환경을 제공하며 이런 환경은 결과적으로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사회복지사가 개인의 행위와 무관하게 제도나 구조가 만들어 놓은 불평등 체제 안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그 변화의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물론 사회복지사 개인이나 기관의 수준에서 변화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활동에 참여하는 당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정말 자신과 동등하게 이 사회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 생각하는지 성찰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이가 어리다고 의견을 가볍게 여기고, 학력을 이유로 능력을 판단하고, 여성과 남성의 일을 구분하고, 이주민의 진로에 한계를 두고, 장애인의 요구를 무리하다고 여기고, 노숙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성소수자라고 불편한 감정을 가지는 등 사회에 만연한 온갖 종류의 무시와 모욕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혹시 ‘대상자의 특성’이라며 편견을 더 깊이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테다. 사회복지사로서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이 평등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감각과 자긍심을 갖고 그런 일에 시간을 보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등은 본질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없으며 변화를 요구하는 활동이다. 그러기 위해 사회복지사가 당사자와 함께 발언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하고, 그 이야기가 사회에 의미 있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런데 혹시 사회복지사가 당사자를 옹호할 수 없는 이유가, 사회가 사회복지사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복지사가 당사자와 함께 사회적 억압 속에서 무력해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복지현장은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고, 이런 현장이 분리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을수록 사회복지사가 함께 취약해질 가능성도 높다. 사회복지사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활동할 수 없는 체제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결국 사회복지사도 억압의 구조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를 넘어서지 못하는 실천은 한계에 막히게 된다. 아마도 내가 아동청소년시설에서 만났던 거대한 벽은,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려 애를 쓰지만 벗어날 수 없는 그 억압의 구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회복지의 이념은 너무 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적었으며, 그 사이에서 무력해지기는 너무 쉬웠다. 

 

결국 평등은 모든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장의 사회복지사와 당사자 사이만이 아니라, 사회복지기관 내 구성원, 현장과 그 현장을 설계하고 평가하는 정부기관이나 연구자 등 현장을 둘러싼 모든 관계, 활동, 조직, 교육, 평가, 정책, 법제 등이 평등의 원칙을 중심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이 거대한 변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회복지종사자, 당사자, 교육자, 연구자, 활동가 등이 각자의 자리에서 더 평등한 사회복지현장을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 그 흩어진 마음들이 잘 모이면 좋겠다. 함께 이야기를 시작할 때 이미 변화는 시작될 테니 말이다.

 

 

1) 사회복지실천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입’, ‘서비스’, ‘대상자’ 등의 용어는 그 자체로 사회복지사와 당사자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를 상정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복지용어에 관한 논의와 대안 제시에 관하여, 곽효정 외(2018), 「성민복지용어사전」, 성민종합사회복지관, http://www.smw.or.kr/bbs/board.php?bo_table=m08_06 (2020. 3. 22.방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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