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6 2006-07-11   607

당신은 시설에서 살고 싶은가?

들어가며

지난 겨울, 경남의 한 농촌에서 근육장애를 가지고 있던 조씨 집에 보일러가 터져 방안과 이불이 물에 젖었지만, 조씨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동사를 당했다. 또 6월 2일, 인천 간석역에서 중증장애인 박기연씨가 철로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 중증장애인으로써 이동권과 교육권, 자립생활을 위해 스스로 열심히 투쟁하던 박씨가 끝내 철로에 몸을 던진 것은, 아마도 더 이상 우리사회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 답게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인해서 일 것이다. 대소변과 식사 등 일상생활에 활동보조가 필요했던 박씨는 활동보조인이 없이 꽤 오랫동안 혼자 생활을 해야했다. 중증장애인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활동보조인을 쓰는 것은 ‘권리’ 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주변의 ‘도움’에 감사해야 했고, 그 ‘도움’이 없을 때는 대소변과 식사와 모든 일상생활을 참아야 했다.

미신고시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내가 고인이 된 조씨와 박씨를 이야기를 하는 건,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미신고시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인인 된 두 분을 놓고, 웬만한 사회복지 한다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어휴, 안타까워라. 그렇게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안되면 시설에나 들어가지, 쯧쯧쯧……“

중증장애인은 우리와 함께 살수 없나?

우리는 쉽게 ‘혼자 살수 있는 능력이 안되는’ 사람을 복지시설로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중증장애인들은 서울시청 앞을 점거하고 삭발을 하고, 노숙을 하고, 휠체어에서 내려 한강대교를 처절하게 기어가면서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 자립생활을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시설에 보내느니 차라리 날 죽여라’며 ‘사육’당하기 싫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극구 시설에 가기를 싫어하는 걸까?

우리의 사고방식을 ‘확’ 바꿔 보자. 중증장애인이다 하더라도 빈곤하다 하더라도 ▲주거와 ▲소득,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활동보조를 이용할 권리)를 보장한다면 이들은 굳이 시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이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며, 이를 보장받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그러나 정부는 빈곤한 중증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들을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즉 저비용의 복지시설에 중증장애인들을 대거 수용해 버림으로써, 이들의 권리를 외면하고 있다. 노골적인 감금과 폭행, 성폭행이 자행됐던 시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러한 노골적인 문제가 없는 시설이라 하더라도, 집단생활에서 오는 규율과 통제, 사회적 배제, 자기결정권의 박탈, 존중감의 박탈은 당사자에게 ‘시설병 증후군’

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종합해서 보면 그동안 시설이 인권침해의 온상이었음에도 유지될수 있었던 것은 정부, 시설운영자, 장애인의 가족, 국민 등 4자간의 ‘침묵의 카르텔’ 때문이었다. 정부는 거액의 예산을 들이거나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지 않고서도 장애인들의 문제를 해결 수 있기 때문에 시설의 인권침해를 외면한 채 침묵하였다. 일반국민은 손쉽게 별다른 부담도 없이 장애인들을 우리 주변으로부터 격리할 수 있기 때문에 침묵하였다. 시설운영자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관심과 지원이 없는 어려운 상태에서 그나마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동정론에 기대며, 장애인들을 영리의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장애인의 가족은 국가의 지원이나 보조가 없는 상태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장애인가족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침묵한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이 중증장애인이 혼자 살수 없기 때문에 시설로 가야한다는 명제를 만들었고, 우린 이 불합리한 명제를 의심하지 않고 따라왔던 것이다.

미신고시설, 도대체 뭔데?

이렇게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시설’은 크게 신고시설과 미신고시설로 나뉜다. 신고시설은 또 법인신고시설과 개인운영신고시설로 나뉘는데, 앞의 것은 사회복지법인에서 비영리로 운영하는 시설을 말하고, 뒷것은 최근 <미신고시설 종합관리대책>에 의해 본래 개인이 운영하던 미신고시설중 복권기금을 받아 신고전환된 시설을 말한다. 또 미신고시설은 그야말로 신고하지 않고 시설을 운영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회복지사업법(이하 ‘사복법’)」에 의하면 신고하지 않고(신고조건을 갖추지 않고) 시설운영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법이기 때문에 존재조차 할수 없는 시설을 말한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인 것이 우리 사회인지라 불법인 미신고시설은 지난 2005년에는 약 1200여개에 달했다. 그러다가 복권기금을 쏟아 붓고, 그것도 모자르니 삼성복지기금을 주고 하여 건물을 신ㆍ증축해주었고, 그 결과 현재는 약 578개의 미신고시설이 남아있다. 이 나마도 종교시설의 외피를 쓴 미신고시설은 제외한 숫자이다.

정부는 이렇게 자신들의 양성화정책의 결과로 미신고시설 수가 줄고 있으니 복지시설의 인권침해도 없어질 것처럼 떠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고시설로 전환=인권침해가 없다’는 등식은 절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갖가지 복지시설의 인권침해의 역사를 보면 쉽게 알수 있다. 굳이 미신고시설만 따로 분류하지 않더라도, 복지시설의 인권침해는 현대의 이성으로써 도저히 납득 불가능한 상황에서 발견되어 우리를 경악케 한다. 양지마을 사건, 유부도 섬 사건, 에바다 사건, 구 쏘쩍새마을, 성실정양원, 은혜사랑의집, 옥천 사랑의집, 지인언어치료원, 바울선교원, 인제 수양원, 성람재단, 청암재단, 최근의 김포 사랑의집 기도원 사건 등. 이는 정부가 생활인들의 인권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무분별한 미신고시설의 양성화만을 추진해온 결과, 미신고, 신고를 떠나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하게 반복되어 왔다. 정부의 <미신고시설 양성화 정책>은 본래 ‘당근과 채찍으로 미신고시설의 옥석을 가리겠다’는 취지였으나 실제 양성화과정에서 사전 실태조사를 통해 옥석을 가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문제시설도 지원해서 양성화를 부추기기도 했다. 또, 옥석을 가리는데 있어서도 제일 핵심이어야 할 ‘생활인의 인권’은 신고기준에 들어가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그러니 뭘 기준으로 옥석을 가린다는 것일까? 또, 장애당사자들의 주장은 ‘시설이 아닌 자립생활 지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는 수용(생활시설) 일변도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누구를 위한 미신고시설 양성화인가, 누구를 위한 시설 정책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오며

잊을 만 하면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복지시설의 인권침해, 폭행 뿐 아니라 생활전반의 광범위한 인권유린이 가능한 ‘복지시설’ 뒤에는 항상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현재의 법과 정책에서 시설내 인권유린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있음을 알면서도 과거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중앙정부, 그리고 관리감독의 책임을 뒤로 하고 시설운영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지자체는 분명 책임이 있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들을 용인하고 있는 국가는 항상 중증장애인의 생활 전반에 대한 권리를 개인과 가족에게 떠넘기고 뒷자리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있는 셈이다.

맨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조씨와 박씨는 감금과 폭행이 없는 ‘시설’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 한 사람의 독립적 인격체로 존중받고 살고 싶어 했다. 아무리 중증의 가난한 장애인이다 할지라도 시설이 아닌 자립생활을 하고 싶다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 그런 사회를 기대하는 것, 이것이 욕심일까?

※이 글은 참여사회 7월호에 기재된 원고입니다. 편집자 주

김정하/ 사회복지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연대회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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