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4 2014-12-11   855

[동향1] 새로운 답을 요구받는 반성폭력운동

새로운 답을 요구받는 반성폭력운동

이임혜경 ㅣ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

 

성폭력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성폭력피해자보호법, 성폭력처벌법 뿐만 아니라 성폭력과 관련된 많은 법들이 생겨나고 변화했다. 피해자를 위한 지원체계 역시 다양한 영역에서 시스템이 마련되며 눈에 띄는 성과도 있고 안착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양하고 많은 법과 정책들은 상담 현장을 기반으로 성폭력의 문제를 이슈화하고 그 의미를 투쟁하는 여성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반성폭력운동의 역사이자 성과이기도 하다(물론 주장한 내용 모두가 관철된 것은 아니며 많은 쟁점들도 존재하기에 평가와 과제도 있다). 또한 ‘반성폭력운동을 한다’는 것은 법·제도 개정 활동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요인인 젠더규범, 구조, 관념, 편견, 지배담론에 대한 도전, 성문화의 변화, 이를 통한 사회적 인식 변화, 상담을 통한 경험의 재해석과 역량강화 등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성폭력특별법 시행 20주년이 된 즈음에 법·정책 변화뿐만 아니라 반성폭력운동이 어떤 활동을 하며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왔는지에 대한 정리와 평가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방대한 내용을 다 담지는 못하고 다만 이 글은 사회적 인식 변화를 위해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이 해 온 활동 중에서 몇 가지만을 사례로 들어 평가지점을 살펴보며 2014년 현재, 어떤 변화를 만나고 있는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성폭력특별법 제정 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소위 제도화) 맞닥뜨리게 되었던 일(정보화시스템, 평가지표)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을 정리하였다. 이는 반성폭력운동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성폭력상담소의 역할과 방향 모색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식 변화 및 확산

 

성문화 운동

 

여성들이 밤길을 되찾다

2004년부터 전국의 성폭력상담소와 여성단체들이 함께 개최해 온 밤길되찾기 행사 ‘달빛시위’는 여성들의 옷차림이나 밤거리 행실이 성폭력의 원인인 양 가르치면서 성폭력에 대한 그릇된 통념과 공포를 조장하는 사회에 맞서 여성들이 안전한 밤길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성폭력 가해자의 옷 핑계, 술 핑계, 본능 핑계 한심쿠나’, ‘야한 옷이 무슨 상관? 성폭력은 가해자탓!’, ‘여성들에게 밤길은 권리입니다’등 달빛시위에서 외쳤던 구호들이 지금은 익숙한 내용이지만 그 당시에는 참신하고 때로는 과격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개사곡에 등장했던 옆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다리를 쩍벌린 ‘쩍벌남’, 술에 취해 여성들에게 시비 걸고 위협하는 ‘시끌남’, 밤거리를 위협하는 ‘범죄남’이 지금은 사라졌나.

 

들어라 세상아

성폭력에 대한 공동체의 감수성을 높이고 소통함으로써 성폭력피해경험의 재해석 기회가 되기도 했던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2003년에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들어라 세상아! 나는 말한다’라는 1회의 슬로건은 말하기대회의 취지와 목적을 잘 드러낸다. 2014년 제11회 말하기대회까지 이어오면서 말 뿐만 아니라 음악, 퍼포먼스, 연극, 미술 등 다양한 표현 방식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시도하였고 참여자와 함께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며 성폭력 경험을 침묵하게 한 사회에 도전해왔다. 이는 피해자의 자존감 회복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에 대한 사회의 인식 변화를 가져왔고 성폭력 생존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와 고정관념을 깨며 성문화운동에 큰 몫을 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숨기고 싶은 경험들을 낱낱이 공론장에서 얘기하지만, 그리하여 ‘말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지만, 그 말해진 것들은 여전히 사적인 문제로 남고 공적 현안이 되지는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성폭력말하기대회의 목표는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에 있기 보다는 그 말 하여진 것들을 어떻게 사회적 의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반성폭력운동은 마주하고 있기도 하다.  

 

욕정은 못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안 이기는 것

성폭력 피해자들이 경찰,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경험하는 위협적이고 강압적인 태도와 성폭력 문제를 남녀 간의 성적인 문제로 치부하거나 피해자 유발론 등의 2차 피해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문제였다.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은 상담을 통해 수사나 재판과정에서의 성차별적 고정관념, 인권침해 현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하였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2004년부터 매년 수사재판과정에서의 디딤돌, 걸림돌을 선정하는 시민감시단 사업을 진행하며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통념에서 비롯한 2차 피해 방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제도나 정책 마련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조사나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실제 조사담당자나 법원관계자의 시각과 관점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의 활동전략이다. 2007년 한국여성민우회의 ‘검·판사 이렇게 할 수 있다!’프로젝트 역시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성폭력사건을 다룬 공소장과 판결문에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순간적인 욕정을 일으켜’, ‘욕정을 못 이겨’라는 문구를 삭제하라는 요구였다. 성폭력은 욕정 자체가 아닌 욕정의 표출방식의 문제이며, 욕정의 표출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었다면 이는 범죄가 되는 것이고, 남성의 욕정은 ‘참을 수 없는’것이 아니라 참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판결문의 이러한 표현은 사회의 잘못된 통념에 기반한 것으로 삭제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한 것이다. 이 요구는 상당 부분 수용되어 현재 다수 판결문에서 ‘욕정을 못 이겨’가 아닌 ‘강간을 목적으로’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런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으로 끊임없이 피해자임을 의심받는 2차 피해의 문제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소위 ‘강간시나리오’에 벗어나 있는 사건의 경우,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진실성은 끊임없이 의심받으며 성폭력피해자가 한순간에 무고죄 피의자가 되기도 한다. 성폭력 사건은 대부분 증거나 증인 없이 피해자 진술에 의존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에 성폭력 범죄의 잘못된 통념은 여전히 수사 재판 과정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대표적 사례가 성폭력 피해자 무고죄 피소의 문제이며, 이는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성폭력예방을 위한 다양한 교육 활동

 

사회적 의식의 변화를 위한 교육 활동은 반성폭력운동단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역이다. 성폭력상담소에게 교육은 ‘성’을 제대로 만나 성폭력을 예방하는 것과 더불어 반성폭력운동의 현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때 교육을 하는 활동가는 ‘강사’이기보다는 반성폭력운동을 하는 활동가의 정체성으로, 상담과 활동으로 쌓인 경험을 전문성으로 가진 존재로서 사회와 소통을 하는 것이고, 사회적 의식 변화를 위한 운동을 한다는 의미를 띄게 된다. 따라서 성, 성폭력을 포함한 여성폭력예방교육, 성평등 교육 등 성차별, 성의식 변화를 가져오고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교육의 확대와 예산 확보에 대한 요구를 반성폭력운동단체는 끊임없이 해왔다. 그러나 교육의 양 확대에 급물살을 탄 것은 아동성폭력사건이 언론을 통해 집중조명 되는 시기를 지나오며 ‘안전한 사회 조성’이 정부정책의 화두로 떠오르면서부터 이다. 많은 법률이 개정되면서 이를 근거로 현재 연1회 이상 예방교육이 의무화 되었으며 교육대상도 거의 전 국민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각급 학교 등)는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예방교육을 통합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양적으로 확대되면서 현장을 담지하고 그 문제의식으로 교육을 하던 성폭력상담소가 자연스럽게 제도화된 교육 모두를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로 인한 문제점과 고민지점은 후반부에서 다시 짚어보겠다.

 

일정한 긴장, 찾아가야 할 역할

 

제도화 논의 필요성 대두

 

90년대 초, 여성운동단체들은 성폭력 문제를 사회에 제기하면서 피해자를 위한 법과 제도 마련을 주장하였고, 성폭력피해지원을 위한 재정 지원 등 국가의 책무를 요구하였다. 이에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상담소에 정부보조금이 지급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반성폭력운동단체를 비롯한 여성운동단체는 곧 제도화로 인한 문제와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성운동 의제에 대한 국가의 책임성은 높였으나 도리어 여성운동의 자율적 공간이 축소되고 국가에 대한 여성운동의 개입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여성운동의 제도화(탈정치화 경향, 로비활동 비중 높아짐, 운동방식의 매뉴얼화 등)로 된 것은 아닌지, 또한 국가의 주도성이 높아지면서 여성운동은 제도화의 속도를 못 따라가고 대응조차 못하는 상황이 아닌가 라는 자성의 목소리였다.

 

이런 중에 성폭력상담소, 쉼터의 지도·감독(사회복지사업법 근거), 운영전반 및 상담, 자격조건 등 정부의 규율과 통제가 점점 심해지고, 보조금과 연계한 행정전산화시스템(새올행정시스템, 국가복지정보시스템, 사회복지정보시스템) 사용 압력, 운하반대·광우병촛불시위 등에 연대하는 여성단체(상담소 포함)에게 시위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확인서 요구 또는 확인전화, 여성부, 행정자치부 공동협력사업 탈락(소위 블랙리스트) 등 정부지원 및 위탁 사업을 하는 단위들의 자율성을 훼손하거나 탈정치화 시키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제도화 영역의 방향성 및 전략 논의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2007년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은 ‘반성폭력운동 제도화 대응회의’를 만들어 제도화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에 도출된 반성폭력운동 제도화의 성과 및 한계를 요약하자면, 성과로는 피해자를 위한 서비스체계 마련, 공신력 확대(현장 기반한 정책 제안), 보조금지원 등의 방식으로 국가의 책무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고, 한계로는 지도점검을 통한 획일적 운영기준 강요(운동의 자율성, 급진성 훼손) 등 정부의 감시와 통제, 상담의 질 보다는 건수 중시, 행정업무 증가, 국가 주도의 사업 방향에 귀속, 의료화·전문화(특정 학력, 전공, 자격증 요구) 추구 등이다.

 

반성폭력운동 제도화 대응회의가 그 당시 제도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구체적 방안을 도출하거나 실행하지는 못했으나 이후 급물살을 타는 제도화의 흐름에 긴장을 놓치지 않고 대응하는 힘을 스스로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2014년 현재까지 더 많은 제도와 서비스체계가 마련되었고 당시 도출된 한계는 가속화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무엇이 성과이고 무엇이 한계인지, 과연 어떤 대응이 필요하고 가능한 지에 대한 고민이 한층 두터워졌다.

 

피해자 개인 정보의 중앙 집적화 싸움

 

국가복지정보시스템(2007년 당시 새올행정시스템)이란 웹을 기반으로 한 사회복지시설 통합 관리 시스템으로서 사회복지시설의 회계, 시설 이용자 및 종사자 관리 등의 정보를 입력하고 운영되는 프로그램이다. 정부가 새올행정시스템이라는 개인정보 집적 시스템 사용을 요구했을 때 반성폭력운동 제도화 대응 회의가 이를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여성폭력피해자의 사생활 침해와 신변 안전 위협 때문이다. 정부는 이와 같은 거부 의견에 대해, 시스템의 목적이 업무의 효율성과 회계 투명성 확보를 위한 것인데 단체들이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정부보조금을 줄 수 없다는 방식으로 압력 행사를 해왔다. 이에 ‘새올 TFT’라는 확대된 대응체계를 만들고 이후에는 ‘국가복지정보시스템 전면거부팀’ 이라는 이름으로 5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대응을 했다. 그러나 ‘재정의 투명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정부의 프레임에 갇혀 사용거부는 마치 단체의 재정 불투명으로 비춰졌고 새로운 프레임을 짜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보인권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전국의 여성폭력피해자지원단체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 또한 대응에 어려움을 더했다. 더구나 각 상담소, 쉼터 별 상황이 다르고 심각성의 인지 정도가 다르다 보니 여성폭력피해자지원단체의 정보가 중앙 집적화 되는 것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운동으로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긴 싸움은 상담내용입력, 내담자 개인신상정보 입력, 종사자 정보 입력 등 지나치게 포괄적인 내용 입력을 요구받는 것에서 정부지원금에 한정한 회계입력으로 일단락되는 성과를 남겼다.

 

평가지표가 담은 뜻

 

여성폭력상담소 및 보호시설은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매 3년마다 평가를 받고 있으며, 2004년 시범운영을 시작으로 2013년까지 네 번 시행되었다. 성폭력상담소 등 여성폭력관련상담소가 사회복지시설로 구분되어 운영기준이 사회복지사업법에 준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폭력과 여성인권 문제의 특수성이 고려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 상황은 평가과정에서도 드러나면서 상담소들은 평가의 목적부터 평가의 기준(평가지표)까지 평가에 대한 많은 논의와 의견 개진을 해왔다.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이 특히 주목한 지점은 소장, 상담원 등 소위 ‘종사자’의 전문성 평가지표와 평가 결과의 활용 방안에 관한 것이다. 이는 제도화 논의와 결을 같이 하는 것으로, 여성가족부가 상담소 활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상담소가 앞으로 어떤 정체성을 갖고 나갈 것인가에 방향을 제시하는 지표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0년 평가지표(안)에는 의사, 법조인, 전문상담원, 사회복지사가 상담소장의 전문성 확보의 근거 기준이 되었다. 이는 여성폭력의 문제가 성차별을 원인으로 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에서 치료(의료), 법의 문제(법률), 개인(상담), 삶의 위기(복지)지원의 의미로 변화 혹은 확대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상담원의 전문성 역시 여성주의 기반 활동이나 여성단체 경력보다 상담(자격, 전공)과 복지를 중점에 두고 있었다. 성폭력상담소 상담원은 상담과 함께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위한 활동을 하는 존재이기도 하나 평가지표에는 이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었다. 여성단체 활동이 기준이 되기보다 상담 관련 학력이나 자격증(사회복지)으로 상담원의 전문성을 담보하겠다는 것은 여성가족부가 성폭력상담소를 복지서비스제공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는 사회복지사업법을 근거로 하는 상담소의 운영규정으로 인해 야기된 많은 문제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2000년대 초에는 심지어 상담소장 자격기준에 여성단체 경력이 포함되지 않아 강력하게 항의했었다). 반성폭력운동 제도화 대응회의는 석사학위, 자격증 등으로 성폭력상담소 활동의 전문성을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 하며 운동 경험을 통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기 위해 관련 활동을 경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과의 제한 또는 우대는 반대한다 등의 내용을 토론하며 상담소장 전문성 수정안으로 ‘여성문제 전문가, 인권문제 전문가, 관련분야 전문가’이라는 의견을 냈고, 이 결과로 2013년 평가지표의 변화가 있기도 하였다.

 

반성폭력 운동의 과제를 고민하다

 

성폭력은 단지 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법제화를 넘어 왜곡된 성문화와 성인식을 바꿔가는 활동은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하다. 성희롱을 포함한 성폭력에 대한 관심과 지식 정도가 높아지고 법제도의 개선과 교육으로 어떤 행위를 성폭력으로 인지하는 변화는 있었으나 때로는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법과 규정으로만 둥둥 떠다니고 있는 현실을 목격할 때가 있다. 즉, 성과 관련된 관계맺음, 성적의사소통을 얘기하는 반성폭력운동의 의도와는 달리 성폭력의 개념 자체를 법, 제도에 의한 판결, 징계 등의 테두리 안에서만 사고하고, 다양한 현실의 문제를 법, 제도의 문장으로만 해석하거나 단죄하려고 할 뿐 자신의 일상의 문제, 관계로까지 연결시키지 않는 것이다. 법, 제도의 틀 안에 가둬버리고 범주화 해버리는 것은 문제이다. 예를 들어 반성폭력운동의 영향으로 공동체 내 성폭력에 대한 규정과 징계절차가 마련되었으나 조직 내 가치 지향, 폭력에의 감수성을 갖기까지에는 그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과 최근까지도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전 국회의장, 전 검찰총장, 교수 등의 성폭력 행태를 보며 법, 제도, 교육이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된다.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성의식의 변화, 일상적 관계에 대한 점검과 더불어 성찰과 감수성이 요구되는 것으로 현재의 법과 현실의 괴리 채우는 방법의 모색은 또 하나의 중요한 운동의 과제이다.

 

조직문화와 일상적 권력의 문제화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문장은 간단한 듯 보이지만 상황과 맥락, 해석으로서의 개념으로 결코 간단하지 않으며, 성폭력으로 명명할 것이냐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묻는다. ‘이것이 (법적으로) 성폭력이냐 아니냐’고. 그런데 성폭력이 남성이 여성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최대/최악의 악행인가? 성폭력‘만’ 나쁜가? 성별권력관계를 유지/재생산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행위들을 ‘성폭력’이라는 한 가지 단어만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좋은가?

 

‘어디까지가 성폭력인가?’라는 질문은 좋은 질문이 아니다. 나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때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에겐 이 나쁜 질문을 더 이상 유통시키는 않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성별권력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수많은 폭력적, 억압적, 권위적, 차별적, 혐오적, 비하적 언행들이 모두 ‘성폭력’으로 ‘사건’화 되는 배경에는, ‘성폭력’만 아니면 큰 문제는 아니라는 드넓은 관용과 ‘사건’화 되지만 않으면 큰 문제가 아니게 만들 수 있는 일상적 권력이 놓여 있다. 이것이 많은 가해자들이 ‘성폭력만은’ 아니라고 혼신을 다해 부정하는 이유다. 성폭력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면(폭언, 폭행, 권위주의, 사기, 무례 등등), 그 다른 것은 괜찮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폭력 외의 다른 것’을 ‘별 것 아니’라고 관용해 온 공동체의 문화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폭력을 관용해 온 조직문화와 일상적 권력을 문제화할 수 있는 전략과 방법론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이것도 성폭력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지루하고 심난한 교착상태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법과 제도의 변화로 담기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변화로 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법/제도와 현실의 공백을 교육으로 

 

위의 과제들에 많은 답을 담아 소통할 수 있는 그릇 중 하나가 교육이다. 하지만 점검해 봐야 할 문제들도 많다. 먼저, 법적 의무로서 여성폭력예방교육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되었고, 심지어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예방교육을 통합하여 실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효과적인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성폭력예방교육을 연1회 실시하는 것조차 문서나 동영상 시청으로 대체하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확대되는 것은 환영하지만 질 확보가 동시에 이뤄지지 않으면 역작용이 따른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여성폭력예방교육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어떤 내용을 전달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반성폭력운동의 관점과 태도가 연결되어 진행되어야 한다. 교육은 법/제도와 현실 사이의 틈을 매꾸어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자 사회적 인식 변화를 위한 중요한 영역이기에 교육 내용 모니터링 등 교육의 질 확보 방안이 적극적 모색될 필요가 있다.

 

반성폭력운동 ‘활동가’되기

 

성폭력과 관련된 법과 제도의 개선은 많은 부분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의 운동의 결과이다. 하지만 제도화의 흐름 속에서 반성폭력운동의 의미는 퇴색하고 있으며 정부는 성폭력상담소를 운동단위가 아닌 복지시스템의 한 축으로, 성폭력 피해자를 시혜의 대상으로, 치료의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 비슷한 얘기로, 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여성폭력관련시설의 평가지표는 단순한 평가의 도구가 아닌 지향성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그 내용들은 서비스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획일화된 기준을 제시하며 그 방향으로 나가게 한다. 사실 성폭력상담을 위해 과연 상담 관련 학문이 꼭 필요한가? 사회복지사여야 하나? 반성폭력 의식은 그렇게 갖춰지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성차별 인식론에서 자격증 시스템으로 흘러가는 움직임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어떤 기준이 필요한지, 지금의 기준이 적합한지를 계속 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회복지사업법이 성폭력상담소 운영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면 이를 바꿀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운동 방향일 것이다.

 

여성폭력에 대한 다양한 서비스체계, 제도가 만들어지고 상담소가 이러한 제도화에 포섭된 부분이 있지만, 여전히 상담소, 쉼터를 지키는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기관의 ‘종사자’가 아닌 성차별 현실을 인식하고 이에 기반 한 활동을 펼치는 ‘활동가’, 운동적 관점을 가진 활동가였으면 한다. 민간 영역으로서 새로운 이슈를 제기 하며 제도 안에 갇히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피해자 보호라는 대의 속에 오히려 여성을 대상화하고 피해자화하며 주체성을 박탈하는 것이 반성폭력운동은 아닐 것이다. 법과 현실의 괴리, 상담활동의 의미, 운동의 방법론 등의 고민과 함께 반성폭력 운동을 둘러싼 지형의 변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답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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