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1 2011-07-18   2058

[동향4] 제100차 ILO회의 가사노동자위원회 참관기



김유진 | 하버드대 공공정책학 석사

 

지난달 21일 폐막한 국제노동기구 (ILO) 100차 총회에서 가장 주목을 끈 이슈는 가사노동자 협약의 채택이었다. 찬성 396표, 반대 16표, 기권 63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채택된 ILO의 가사노동자 협약(189호)은 각국 정부가 가사노동자에 대해 체계적인 법적, 사회적 보호 방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했던 가사노동자들이 국제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국제 NGO 참가단과 함께 ILO 총회에 참관하면서 지켜본 가사노동자 협약의 논의 과정과 핵심적 내용,  한국사회에 던지는 과제 등을 짚어보고자 한다.

 

가사노동자 협약이란
 

‘가사노동자’는 일반적으로 임금 등 보상에 기반한 고용관계 안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가사노동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여성이며,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가난한 여성들이 가사노동 종사를 위해 도시나 타국으로 이주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가사노동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파악된 것이 없지만, ILO는 전 세계적으로 약 1억명에 달하는 이들이 가사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전체 임금 노동자 대비 3.6%에 달하는 숫자다. 지역별로는 남미(12%), 중동(8%), 아프리카(4.9%), 아시아(3.5%)의 순으로 가사노동자가 임금 노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맞벌이 가구 증가나 고령화 등으로 인해 돌봄노동의 수요가 확대되고 있는 것과 맞물려서 가사노동자 숫자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나라들에서 가사노동자들은 기본적인 노동법에서 배제된 것은 물론이고,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집안일이나 보육 등의 가사노동을 전통적으로 여성의 ‘임무’로 치부하는 뿌리깊은 편견도 이들이 겪는 차별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처럼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서 기본적인 법적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가사노동자들에게 ILO 가사노동자 협약은 가사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이들이 응당 누려야 할 기본적인 노동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협약에 따르면 가사노동자들은 근로계약 체결시점부터 업무 성격, 급여, 초과수당, 노동시간, 휴가 등 고용조건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급적 서면 계약 형태로 제공받아야 한다. 고용주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임금은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적시했고, 고용주와의 협의 하에 (고용주의 거처에) 입주 여부를 결정할 수도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근로감독이나 구제절차의 마련 등과 같이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보호정책을 명시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또 가사노동자들이 산업재해 보호와 건강권 보장 (13조), 사회보장제도 및 모성보호 (14조) 등에 관해서도 다른 노동자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포함됐다.

 

협약이 탄생하기까지

가사노동자 협약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반영하듯, 총회 기간 내내 회의장의 열기는 대단했다.
논의 과정에서 가장 팽팽한 대립이 빚어진 쟁점은 가사노동자의 특수성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의 문제였다. 가사노동자는 사적인 공간이 곧 일터이고 노동자 한 명 한 명마다 고용주도 제각각이라는 점 등 근로조건 면에서 특수성을 갖는다.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에게는 당연하게 적용되는 보호조항이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느냐를 놓고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주당 의무 휴일제 등 노동시간 규제와 관련,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가사노동자에게 일반 노동자와 비슷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환자나 장애인 등 지속적으로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 경우에 노동자가 휴가를 간다면 무책임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노동자와 NGO참가단, 일부 정부 대표단은 “노동시간 규제야말로 가사노동자 협약의 근본정신인데, 업무상 특수한 상황을 이유로 정당한 휴식권을 박탈하는 것을 ILO의 ’양질의 일자리’ 정신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협상이 길어지면서 세부적인 문구의 표현을 놓고 지리한 공방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총회에서 이미 협약과 권고를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은 데다, 가사노동자 협약이 ILO가 2002년 공식적으로 발표한 ‘양질의 일자리’ 선언의 핵심 부분이라는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된 덕택인지 오래 지나지 않아 회의는 본 궤도로 돌아왔다.

지난해와 올해 모두 참가했던 노조와 NGO 측 관계자들은 “고용주 대표단이나 협약을 반대하는 일부 국가들의 비협조적 태도나 표결 시도 등이 빈번했던 작년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논쟁이 생산적이라는 느낌이다”고 입을 모았다. 협상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ILO의 기본 원리인 ‘사회적 대화’와 타협의 정신이 발휘된 것도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돕는 데 기여했다.
마침내 최종 협약이 탄생한 순간, 현장에는 환호와 감격이 넘쳤다. 특히 오랫동안 노동자로 인정받기를 염원해 온 가사노동자들에게는 더욱더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정부와 노동자, 고용주 대표단이 다 떠나버린 후에도 회의장을 빙 둘러싸고 자축하는 축제를 벌였다.

 

가사노동자 운동의 열매
 

ILO 가사노동자 협약의 탄생이 갖는 여러 함의 중에서도 시민사회의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가사노동자 운동의 역할이다. 길게는 40여년간, 짧게는 가사노동자 단체들간의 국제적 연대가 출발한 3년여간, 개별 국가는 물론이고 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운동이 국제노동기준 제정이라는 첫 승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008년 국가 또는 지역별 가사노동자 노동조합과 운동단체들의 느슨한 연대로 출범한 국제가사노동자네트워크는(IDWN)는 출범 이래, 가사노동자 노동자성 인정과 기본권 보장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가사노동자 협약 제정을 위한 캠페인을 벌여왔다. 비록 국가들마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가사노동자 단체들이 그동안 쌓아 온 조직화나 캠페인에 관한 노하우를 서로 나누면서 격려하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운동의 역사가 쌓이면서 가사노동자 출신의 리더도 양성되고, 가사노동자 노조나 단체가 일반노조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은 일부 나라에서는 노동자들 스스로가 총회에서 표결권을 갖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노사정이라는 삼자구조에 의해 움직이는 ILO의 특성상, NGO 참가단의 경우에는 협상 무대에서 발언권이나 표결권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대신 마지막까지 협약안을 조율하기 위해 막후에서 활발한 로비를 벌였다. 

가사노동자들 외에도 협약 채택까지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운동의 리더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2010년과 2011년 연속으로 가사노동자위원회 총회에서 노동자측 부의장을 맡았던 할리마 야콥을 들 수 있다. 원래는 변호사 출신이자 싱가포르 노조 대표단의 일원으로 수차례 ILO총회에 참석한 바 있는 야콥 부의장은 회의 내내 명확한 논리로 공방을 리드하며 협상력을 발휘했다. 야콥은 올해 총회가 열리기 직전 싱가포르 신임내각의 문화부 장관으로 지명됐지만, 가사노동자 협약에 관한 일을 마무리짓고 싶다고 양해를 구해 공식 업무 시작을 미룬 것으로 전해진다. 가사노동자의 딸이기도 한 그녀의 사무실에는 늘 근로조건 불이행 등을 호소하는 가사노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후문이다.

 
한국에서는

한국 정부는 올해 총회에서 ILO 가사노동자 협약에 찬성표를 던졌다. 지난해 투표 과정에 불참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제 정부 안에서도 가사노동자들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협약을 실제로 비준하는 일에는 국내 실정법과 제도가 미비한 점 등을 들어 아직까지는 소극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30만~6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돌봄연대 측 추산) 국내 가사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좀더 적극적인 보호대책이 요구된다. 요양보호사 등 일부 돌봄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어서다. 이는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에서 ‘가사 사용인’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산재보험법, 고용보험법, 최저임금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적용되는 법적 테두리에서 제외되고 있다.
 

2010년 9월 민주당 김상희 의원 주도로 돌봄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안 4개가 발의됐으나, 현재까지 뚜렷한 진전없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상태이다. 법안들은 각각 ▲가사노동자에 대한 근기법 적용제외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의 근기법 개정안 ▲가사도우미에 대한 특례조항을 두는 내용의 고용보험법 개정안 ▲특례조항을 신설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가사도우미에 대한 사회보험료를 정부가 부담하는 내용의 고용보험 및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보험료징수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정부가 사회서비스 분야 일자리 숫자 늘리기에 몰두하는만큼 일자리의 질을 개선하는 일에도 관심을 보일 지 앞으로의 향방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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