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07-11-01   2002

[칼럼] 정상인으로서의 장애인

임성만(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 회장) 


나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든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일정 기준을 가지고 자기를 다른 사람과 ‘분류(分類, classify)’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아버지나 아들, 정치가나 사업가, 아니면 학생이나 교사 등으로 규정하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분류를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남과 분류하는 그 자체에서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남이나 자기를 ‘장애인’으로 분류하는 문제에 부딪칠 때는 질적으로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그 용어와 관련된 별다른 비극체험이 없더라도 그 용어의 사용 자체로도 극단적인 ‘자기분열(自己分裂. self-dissociation)’을 경험하게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는 어떤 중간항목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50%의 장애인, 50%의 비장애인으로 분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다 고해서 자신이 아무런 장애, 즉 그 어떤 손상(impairment)이나 능력부재(disability)도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장애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신을 ‘정상인’ 또는 ‘일반인’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류는 아직도 의학적 특징에 의한 구별(distinction by medical marks)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별은 상호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분류로써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분류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구별에 ‘비장애인은 정상인’, ‘장애인은 비정상인’의 의미로 분류하게 되면 명백히 의학적 구별을 넘어서는 모종의 의미 변화가 끼어든다. 의학적 특징에 의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별과는 달리 ‘정상인(일반인)과 비정상인’의 구별은 분명히 법적, 사회적인 규제와 배제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을 피하거나, 또는 경우에 따라 정상인의 안전을 위해 격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상인(일반인)과 비정상인’의 구별은 본질적으로 그 구별(distinction)을 통해 비정상인으로 규정된 사람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당한’ 차별(discrimination)을 가하기 위한 일종의 선행분류작업이다. 비정상적인 사람에게 차별을 행하려면 그런 구별을 가능하도록 하는 정상인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당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쉽게 구별해 내면서도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 정당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정상성에 대한 규정은 역사적으로 돌이켜 볼 때, 많은 인권 유린의 상황과 사회적인 폭력 사태를 야기 시켜왔다. 이성의 시대가 시작된 18세기 유럽에서는 이성의 개념과 대비되는 비이성에 대한 철저한 적대감이 있었다. 이 시기의 편협한 계몽주의자들은 광인들을 비이성 내지 반이성으로 간주하여 그 이전의 어떤 지배자도 실행하지 못했던 감금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가했다. 광기라는 의학적 증상, 즉 일종의 정신장애를 없애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파리 시민, 100명당 한 명이 여러 달 동안 감금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 감금 조치는 광인이 아니면서도 일단 표면적으로는 광인과 비슷한 현상을 보이는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런 이상한 사태의 원인은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 즉 ‘자기와는 다른 것’에 대한 이른바 이성적인 정상인들의 자기 방어적인 혐오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와는 다른 것, 즉 광기를 비롯해 정상적인 것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에게 죽음을 안기는 것, 즉 살인이 정당화되는 그 어떤 판단형태가 “자연발생적이고 집단적인” 양상으로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는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전체주의적인 규율과 목적에 헌신적으로 매진하는 독일 국민 상을 정상적인 게르만 인종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표준으로 채택했다. 이에 근거하여 나치 독일은 2차 대전이 시작되는 날을 기해 치유 불능이라고 판단되는 환자들을 안락사 시킬 수 있는 권리를 의사들에게 허가하는 비밀명령을 발포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 정신적으로 병들거나 이상하거나 쇠약한 사람, 간질병을 앓는 사람, 마비되었거나 박약한 사람, 한 수용원에 적어도 5년 넘게 있었거나 독일 핏줄이 아닌 사람들을 집단수용소로 옮기고 그들을 학살했다. 같은 동포인 장애인들에 대한 이런 국가적 살인 조치는 나치가 그토록 박멸하고자 했던 유태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본격화되기 전에 이미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그 숫자는 근 50만에 달한다고 집계되었다. 이처럼 프랑스와 독일 나치의 역사에서 우리는 ‘정상적인 것’의 요건이 정당성을 갖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극단적인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도리어 자신을 완성시켜 나간다는 의미에서 이성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이성은 자신의 완벽성을 과신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반(反)이성의 행동양식으로 전치(轉置)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독일 나치즘은 비장애의 게르만 민족의 생명만을 정상적인 생명으로 간주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치는 전쟁을 통해 독일 민족 10명 중 1명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장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자체를 다시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한국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 구조도 기본발상에 있어서 장애인을 비정상인으로 분류했던 과거 유럽 사회의 장애 인식 구조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 아래서는 비장애인이라는 일반인들이 장애현상에 대해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이고 배타작인 이미지를 일반화시킴으로써 장애인에 대한 차별분위기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편승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장애인을 비정상으로 인식하는 한, 장애문제에 대해 비장애인의 이해를 구하는 것은 동정과 자비의 구걸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나치 독일의 예에서 보듯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방식은 결과적으로 비장애인 자신이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비인간화되는 과정이었음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은 장애인을 비정상인으로 보는 기본명제를 분쇄하는 역 계몽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장애인의 인권문제는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귀중한 생명과 권리를 보존하고 발달시켜 건강한 삶을 이루는데 공통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의 장애인복지법에는 장애인을 “신체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및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의하면 우리 인생의 절반 가까이가 바로 이런 상태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장애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는 또 다른 방식임을 서로 깨닫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 위 원고는 필자가 한국사회복지사협회 오피니언 칼럼에 게제 했던 내용을 수정하여 게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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