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09-08-14   1055

22조원의 즐거운 상상


[의제 27 ‘시선’] 4대강 사업만 포기하면….

호날두와 근초고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자신의 고국 명문축구가인 레알 마드리드로 거액의 이적료와 함께 둥지를 옮긴 사나이 크리스티아노 호날두. 그리고 4세기 고구려를 너머 멀리 대륙을 넘보는 장대한 비전을 갖고 백제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이 인구에 회자된 이유는 한 네티즌의 기발한 발상 때문이었다. 호날두가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물은 이적료 1,600억원은 서기 346년부터 통치하였던 근초고왕 시절부터 연봉 1억씩을 받아 그대로 저축해야만 만들 수 있는 돈이라는 비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한발 더 나아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쏟아붓는 돈 22조원이 호날두를 137명이나 영입할 수 있는 돈이요, 강 한곳마다 호날두 35명씩을 세워 놓는 꼴이라는 힐난조의 비유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 한국 사회를 위해 현재 22조의 돈이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실제 감세로 매년 20조원에 가까운 세수를 포기해야하는 현실에서 굳이 대기업과 부유계층에게 70% 이상의 귀속효과를 보이는 이 정책을 되돌릴 수 있다면, 매년 실제 20조원 이상의 여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꼴이고 이것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지 않는가?


저출산 사회에서 육아부담을 줄이기 위해 거론되는 무상보육. 6세미만의 아동들을 전액 무료로 보육시설에 다닐 수 있도록 하자면 6조원 정도가 필요하다.


또한 아동부양에 필요한 추가적 부담을 덜기 위해 지급되는 아동수당. 이미 1930년대부터 서구국가가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아동의 사회적 양육 개념을 뿌리 내리게 한 이 제도는 OECD 주요국가에서 우리나라만이 외면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어쨌든 노무현 정부 시절 ‘저출산고령사회 연석회의’라는 노·사·정·시민사회의 합의기구에서도 끝내 재정마련이 어려워 포기하였던 아동수당을 12세미만의 아동 모두에게 월 10만원씩 지급하기 위해서는 8조원을 요구한다.


대학의 무상교육. 얼마전 ‘졸업후 상환’에서 ‘취업후 상환’이란 대단한(?) 변화를 꾀해 획기적인 교육복지 정책으로 포장되어 발표했던 정부안보다는 원천적으로 독일, 프랑스와 같이 무상교육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 혁신적이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필요한 재정은 10조원이다.


비수급빈곤층을 위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확대. 보건복지가족부의 공식적인 발표에서도 인정한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빈곤선 이하이지만 수급권자가 되지 못하는 이들, 나아가 그 120% 수준인 차상위계층이지만 여전히 생활이 어려운 빈곤한 계층임에도 국가로부터 안정적인 급여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모두 410만명. 이들을 위해 적절한 보완책을 행하고 이로써 이들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에 의미 있는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현재 기초생활보장 예산 만큼인 약 8조원이 있다면 된다는 추산이 가능하다.


어디 이뿐인가? 건강보험에서 보장해주는 의료비의 보장수준이 평균 65%에 불과하여, 무상의료까지는 아니지만 선진국 수준인 80%의 보장성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정부의 추가 예산소요분은 2조원 정도이다.


한때 시민사회단체들이 경제위기 하에 괜찮은 사회적 일자리(descent social job)를 창출하여 공공적 성격의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늘리자고 했을 때에도 100만원의 월급을 100만명에게 주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10조원이라 주장했었다.


20조원을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해 우리가 필연적으로 도입하여야 하는 일에 쏟기 위해 위와 같은 재정소요처를 생각해보는 즐거운 상상은 사실 끝이 없다. 그러나 상상은 여기까지. 현실은 이 돈이 감세로 허공에 뿌려져 가뜩이나 희미한 적하효과(trickling-down effect)가 이젠 적상효과(trickling-up effect)로 화할 판이다. 아니면 4대강을 되려 죽은 강으로 만드는 일에 흩뿌려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야흐로 예산철이다.


지금쯤은 기획재정부가 최종 완성한 정부 예산안을 놓고 당정협의의 형식을 빌어 한나라당 의원들과 각종 사업의 치고받기(?)가 이루어지고 있을 시점이다. 기획재정부가 여당용으로 친절하게도 마련해 놓은 완충지대의 돈을 이런 저런 정권홍보용 사업이나 실세의원 관심사업으로 쓰도록 장막 뒤에서 작업이 한창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8월 6일 1차로 끝난 예산당정협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제 추경예산에 비해 2% 감소한 예산이라느니,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7천명이나 줄어든 예산이라느니 시끄럽다.


그러나 감세로 인해 매년 20조원을 덜 걷고 4대강 사업 등에 재임기간동안 연간 5-6조원을 축내는 현실에서 그 어떤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복지국가를 불손한 사회주의의 산물로 여기고 최저계층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에 익숙한 미성숙한 우파진영으로 꽉차있으니, 있는 돈도 쓰기 어렵다.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는 목도리를 받는 시장통 할머니, 수급자로 전격 편입된 ‘봉고차 가족’ 등의 횡재성 구제자들만을 남길 뿐 획기적 제도의 진전은 있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이명박 정부는 한국의 복지국가 발전에 재앙의 시기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반세기 이상 뒤진 우리의 복지국가수준을 아마도 한세기까지 벌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불길함이 엄습한다. 더 나아가 각종 복지사업을 시장과 경쟁을 도입하여, 더군다나 공공성이 이름이 아니라 ‘이윤획득’을 이유로 행하게 함으로써 한국의 복지국가 골간을 미국식 복지국가체제로 안착시킨다면 우린 영구히 북구형의 고복지수준을 접하기에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북구와 같은 복지국가가의 도래가 불가능한가? 필요없는가? 이 두가지 답에 대해 복지친화세력, 진보세력들은 그간 미온적이었고, 아니면 구체성 없는 원론적인 주장에만 오지 않았던가. 반성의 지점이 여기에 있다.


단순한 정치동맹은 공허하다. 정책동맹이 핵심이다. 정책에 있어 이제 교육, 주거, 의료 등을 포함한 복지정책이 그 핵심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세부적인 정책디자인을 만들어낼 때이다. 이명박 정부가 끝내 감세에 집착하고 복지의 지평을 좁히면 좁힐수록 역설적이게도 얼음덩어리를 깨버리기 위해 내려치는 정의 끝부분은 더욱 효과적이다.


상상은 즐겁지만 그 끝은 공허하다. 결국 현실에서 그 꿈을 이루기는 고통스럽지만 그 끝은 즐거움이다. 즐거운 상상을 멈추고 고통스런 현실의 세계로 나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편적인 복지국가의 확립이란 현실은 사실 그리 멀리 있지도 않은 것이 아닐까?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이 글은 8월13일자 프레시안(www.pressian.com)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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