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1657

[032] 국세청 삼성변칙증여 과세촉구 시민행동

국세청 삼성 과세 통지 축하연

100일을 예정했던 ‘국세청 과세촉구 릴레이 1인 시위’는 79일째인 2001년 4월 16일 삼성에 과세 통지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종료되었다. 1인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조촐한 축하모임 자리를 가졌다.

┃ 배경과 문제의식 ┃

1999년 2월 삼성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였던 삼성SDS는 신주인수권부사채 230억 원을 발행하였다. 이 신주인수권부사채는 사채권에 부가하여 1년 후 한 주당 7,150원에 삼성SDS의 새 주식 3,216,738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그런데 이 신주인수권부사채는 모두 SK증권과 삼성증권을 거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씨를 비롯해 자녀 4명과 핵심임원 2명(이학수 삼성구조조정본부 본부장, 김인주 삼성전자 이사)이 인수하였다.

문제는 이들 6명이 1년 후 삼성SDS의 주식을 인수하는 가격이었다. 한 주당 7,150원은, 당시 이 회사의 주식이 한 주당 58,000원에 거래되고 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싼 것이었다. 이는 삼성그룹 계열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계열사의 주식을 확보하거나 싼값에 주식을 확보한 뒤 비싸게 되팔아 또 다른 계열사의 주식 확보 자금을 마련하려는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을 위한 ‘변칙증여와 상속’ 작업이었다. 즉 매매를 가장한 증여행위였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는 1999년 11월에 삼성SDS 이사들을 배임죄로 검찰에 고소하고, 12월에는 ‘신주인수권 행사 등 금지 가처분’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2000년 2월, 검찰은 무혐의처분을, 법원은 가처분 소송을 기각했다. 검찰과 법원에 각각 항고했지만, 또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이 문제에 대해 참여연대 납세자운동본부 조세개혁팀은 세금 문제로 접근했다. 당시 장외시장에서 삼성SDS 주식거래는 활발했고, 거래량에 상관없이 거래가격을 시가로 보아야 한다는 대법원 및 국세심판원의 판례를 찾아낸 조세개혁팀은 국세청이 증여세를 추징해야한다고 본 것이다. 참여연대는 2000년 4월 26일 국세청에 탈세를 제보하고 증여세 추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국세청은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 총수 일가에 대해 선뜻 나서지 않았다.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MBC의 시사고발프로그램 ‘PD수첩’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신주인수권 행사 등 금지 가처분 항소심에서 이겼지만, 국세청은 “조사가 진행 중이니 기다려 달라”는 답변뿐이었다. 언론의 관심도 점점 줄고, 2000년 가을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변칙증여상속 문제가 별로 거론되지 않는 등 사건이 묻혀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겼다. 이런 상황을 돌파할 묘안이 필요했다.

┃ 주요 활동 경과 ┃

탈세제보 이후 7개월이 지났다. 참여연대는 2000년 11월 21일부터 12월 15일까지 ‘재벌변칙증여심판 시민행동’을 진행하기로 했다. 11월 22일부터는 2주 동안 매일 시민과 국세청장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국세청은 답하라’ 시리즈를 이어갔다. 종로거리의 서울YMCA 건물 앞에서 ‘국세청 항의시위’를 4차례 열었다. 그렇지만 부족했다. 특히 좀 더 직접적으로 항의할 방법이 필요했다.

지금은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법이 바뀌었지만, 당시의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서는 국회나 법원뿐만 아니라 대사관 주변 100미터 내에서의 집회와 시위를 무조건 금지했다. 당시 국세청이 잠시 입주해있던 서울 종각 맞은편 삼성타워(종로타워)에는 온두라스 대사관이 입주해 있었다. 그러니 참여연대로서는 그 곳에서 일반적인 집회는 물론이거와 집회신고를 해야만 가능한 거리홍보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이때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삼성의 변칙증여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국세청 직원들을 향한 ‘국세청 앞 1인 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집시법은 2인 이상 다수인이 모여서 하는 행위들만 규제하는 것이니 한 사람의 행위는 상관없었다. 단식농성이라도 할까하는 마음이었는데, 증여세를 과세하지 않는 것을 두고 ‘단식’을 하는 것이 뭔가 어색하여 다른 방식을 고민하던 차에 나온 결과였다. ‘국세청 앞 1인 시위’는 12월 4일부터 시작해 ‘재벌변칙증여심판 시민행동’의 종료일인 12월 15일까지 이어졌다. 단식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있었던 윤종훈 조세개혁팀장(회계사)가 2주간의 1인시위를 책임졌다. 윤 회계사는 국세청 공무원들이 출근하는 길목 한 켠에서 “국세청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고 적힌 큰 피켓을 들고 오전 8시부터 9시까지 섰다.

갈수록 겨울추위가 심해졌다. 2주간 1인시위를 계속했지만 국세청은 화답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12월 15일 재벌변칙증여심판 시민행동 종료와 함께 윤종훈 회계사의 국세청 앞 1인시위도 끝났다. 참여연대는 1차 시민행동을 종료한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낼 수 없었다. 참여연대는 다음 주 월요일인 18일부터 100일간의 2차 시민행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2차 시민행동은 ‘국세청 앞 100일간 1시간씩 릴레이 1인시위’였다. 참여연대 임원과 회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100일간 1인시위를 이어가는 것이다. 일반시민의 경우 점심때면 참여 가능성이 좀 더 높지 않을까 해서 릴레이 1인시위 시간대를 낮 12시부터 오후 1시로 바꾸었다. 릴레이 1인시위를 하기로 한 초기에는 참여연대 임원들이 역할을 맡았다.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참여를 신청 할지 미지수였다.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화와 이메일을 이용해 참여하겠다고 연락해왔다. 참여연대 임원들이 시작한 1인시위는, 해를 넘겨 1월 8일부터는 일반시민들이 이어갔다. 12월 말에 이미 다음 달 1월의 1인시위 일정이 거의 확정되었고, 매일 평균 3~4명씩이 신청할 정도였다. 참여를 신청한 시민들이 많아서 2월 5일부터는 한 사람이 30분씩 하는 것으로 변경해 하루에 두 명이 참여하는 날도 생겼다. 3월 한 달 동안은 현직 기자를 비롯해 언론인들이 동참하였다. 눈이 오면 하얀 눈을 맞으면서,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국세청 앞을 지켰다. 대학생, 고등학생, 주부, 자영업자, 연차휴가를 내고 온 직장인, 교사, 정년퇴직한 어르신들, 버스와 택시 운전기사, 교수, 언론인 등 직종도 다양했다.

12월 28일부터는 1인시위자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올리고 시민들이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캠페인 사이트도 개설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직접 참여는 못하지만 지지한다는 글과 1인시위자를 격려하는 글이 캠페인 사이트에 가득 올라왔다. 참여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1인시위를 보조하러 나가는 참여연대 활동가가 매회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 모습은 당시 신생매체였던 오마이뉴스를 통해서도 전파되었다. 오마이뉴스는 전담기자 한 명을 배치해 릴레이 1인시위 전 과정을 취재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 기획을 통해 네티즌들의 관심과 참여를 촉발시켰다.

이렇게 ‘국세청 앞 100일간 1시간씩 릴레이 1인시위’는 4월 16일에 끝이 났다. 윤종훈 회계사가 12월 4일부터 15일까지(주말제외) 했던 열흘을 포함하면 89일째였다. 그 날 오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강운태 의원이 이재용 씨에게 증여세를 부과했냐고 묻자, 안정남 국세청장이 “4월 13일에 과세를 통지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겨울을 관통하고 봄의 가운데까지 이어진, 108명이 참여한 릴레이 1인시위가 목표를 달성했음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열흘 후인 4월 26일, 참여연대는 릴레이 1인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초청해 조촐한 자축파티를 열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성과와 의미 ┃

국세청을 향해 삼성그룹의 변칙증여에 과세하라는 1인시위는 시민들의 폭발적인 호응 속에 전개되었다. 1인시위가 이때가 처음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전에도 관공서 앞에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서 있는 시민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궁궐 앞에서 상소하는 유생이 있었다. 따라서 참여연대의 순수한 창조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시법의 제약에 맞선 시민행동의 수단으로 1인시위를 발굴해내고 이것을 사회적 현상으로 만든 것은 참여연대였다.

이후 1인시위는 보편적인 운동수단이 되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의사표현으로만 받아들여지거나 가십거리 정도로 소비되고 있는 1인시위도 많다. 국세청 앞 릴레이 1인시위가 주목받고 호응을 얻었던 것은 단순히 1인시위였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대상인 국세청 바로 앞이라는 장소, 한겨울 눈과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하게 진행하는 모습이 인터넷을 통해 전파된 점, 시민운동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시작했지만 일반 시민들도 참여했다는 점, 참여하지 못한 시민들의 지지와 격려의 메시지를 모은 점 등이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2000년 4월의 탈세신고와 11월에 시작한 ‘변칙증여심판 시민행동’은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시민행동을 제약하는 법제도를 뛰어넘기 위해,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답보상태에 있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했으며, 시민행동(1인시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를 결합시켰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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