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낙천낙선운동 리뷰, 그리고 2004년
2000년 낙천낙선운동의 배경
2000년 총선시민연대 낙천낙선운동의 배경에는 역시 부정부패와 반개혁성, 지역주의와 1인 보스 지배의 폐쇄적 정당 구조, 사회적 갈등해결 능력 전무 등 수십 년 넘도록 우리 정치를 규정해온 부정적 유산으로부터 정치권이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객관적 정세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정치권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적 분노가 터질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주체적 배경으로는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양적, 질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시민단체가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이해와 요구를 전면에 내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있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치권은 당시의 시대적 요구였던 정치개혁을 거부했다. 2000년 들어서 여야는 총선일정에 쫓겨 선거법에 한해서 정치개혁 입법 협상을 벌였는데 선거를 90여일 앞둔 1월 15일 여야가 합의한 선거법개정안이라는 것이 가관이었다. 여야는 당시 IMF 환란으로 인한 고통분담 차원에서 국회의원 정수를 10% 줄이기로 한 약속을 버리고, 오히려 지역구 5석을 추가했다. 또, 국고보조금 사용내역을 투명하게 하라는 요구는 물리치고 도리어 선거보조금만 50% 인상했다. 또한, 정당명부-비례대표제(1인 2투표 제도) 도입, 국민들의 자발적인 선거운동을 가로막는 선거법 87조 폐지, 여성 30% 할당, 선거구획정위원회의 중립적 구성, 선거사범 공소시효 연장 등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여야 담합에 의한 선거법 개정안은 당시 낙천낙선운동을 선언한 시민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대와 빗발치는 여론의 반발로 후퇴했다. 그 후 2월 7일 새로운 선거법안이 통과되었다. 여야는 국회의원 정수를 당시 299석에서 현 273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 여성 30% 할당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제기되었던 수 십여 개의 정치개혁 과제 중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선거법 87조-시민단체 선거개입 금지조항의 경우에도, 낙선운동을 원칙적으로 가능하도록 개정하였으나, 낙선운동의 실제 수단인 가두 캠페인, 유인물 제작 등은 일체 불허함으로써 사실상 낙선운동을 불허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여야의 첨예한 정치공방으로 식물국회, 파행국회라는 오명도 15대 국회의 별칭이었다. 당시 손혁재(성공회대 교수)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15대 국회와 정치개혁’이란 토론회 발제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99년에는 제 199회 임시국회부터 제 205회 임시국회까지 8월 31일 현재 179일이 열렸지만 회의가 열린 것은 34일에 지나지 않았다. 회의가 열렸던 실시간은 모두 84시간 43분으로 하루 8시간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10일 남짓 일한 셈이다.”
반세기 넘도록 단 한번도 강력한 유권자 운동과 맞닥뜨려 본 적이 없는 당시 정치권의 인적 구성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물, 새로운 정치를 열망했던 당시 국민들의 이해 내지 정서와 정면으로 배치됐다는 점도 낙천낙선운동의 배경이었다. 이에 따라 총선연대 낙천낙선 대상자 중에는 군사독재시절 고문 등 반인권 전력자, 군사 쿠테타 가담 및 협력을 통한 헌정파괴자 등이 상당수 포함됐다.
낙천낙선운동의 전개 과정
정치사회의 무능, 부패, 낡은 정치 패러다임에 저항하고자 하는 시민사회는 2000년 1월 12일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선언 이전까지 총선시민연대의 구성, 지역 유권자운동의 조직 등 만반의 준비를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낙천낙선운동 발족식 당시 가입한 전국의 시민단체는 412개 단체로, 이 단체들은 이후 낙천낙선운동의 폭발적인 전개과정에서 단순간에 1000여개의 단체로 불어 났다. 사실상 전국의 거의 모든 개혁적 시민단체의 연대가 조직된 것이다.
총선시민연대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여론조사 결과 80∼90%가 넘는 국민들이 낙천낙선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월 19일 총선시민연대 정책자문단 구성, 2월 3일 가수 이정현의 ‘바꿔’ 로고송 지정, 1월 25일 ‘쓰레기 분리수거’ 퍼포먼스 및 ‘낙선운동 지지와 선거법 독소조항 폐지를 위한 범국민 100만인 서명운동’, 1월 30일 제 1차 국민 주권의 날 등의 행사를 거치며 낙천낙선운동은 유권자 운동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다.
최초의 낙천 대상자 발표는 1월 24일 이뤄졌다. 1차 낙천대상자는 68명이었다. 공천반대의 기준은 부패 행위, 선거법 위반 행위, 민주헌정질서 파괴 및 반인권 전력, 의정활동의 성실성, 법안 및 정책에 대한 태도, 정치인의 기본 자질을 의심할만한 반의회적, 반유권자적 행위 등이었다. 2월 2일에는 원외인사 42명과 및 1차명단 추가 인사 6명을 포함시킨 2차 낙천 대상자 48명을 발표했다.
4월 3일 최종 낙선 대상자가 발표됐다. 민주당 16명, 한나라당 28명, 자민련 18명, 민국당 8명, 한국신당 3명, 무소속 13명 등 총 86명이 낙선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총선시민연대와 국민들의 엄청난 열기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정치권은 총선시민연대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 86명의 낙선 대상자 중 64명이 이미 낙천운동 대상자였을 정도로 정치권은 총선시민연대의 물갈이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일전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다.
총선시민연대는 이후에도 시민사회단체의 유권자 운동을 가로막는 선거법 87조 폐지 운동, 총선 후보자 병역 사항, 전과 기록, 납세실적 공개 운동 등을 통해 정치권을 지속적으로 압박해 갔다.
정치권과 보수언론의 반격을 넘어서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정치권과 보수언론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상대적으로 낙선 대상자가 많이 포함된 한나라당, 자민련 등 정치권은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김대중 정권과의 교감 하에 진행되고 있다”면서 이 운동의 순수성을 공격했다. 초기에 우호적이었던 보수언론 역시 소설가 이문열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홍위병론’을 전후로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특정 정당과 정권의 당파적 음모와 연결시키기 위한 부단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선거법 87조 위반이라는, 실정법에 기반한 비난 공세도 계속됐다. 당시 정치권은 시민단체 낙천낙선운동을 원칙적으로 허용하게끔 선거법을 고쳤으면서도 이 운동의 유효한 수단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제한을 가함으로써 사실상 낙천낙선운동을 불법화하는 위선을 발휘했다. 이에 대해 총선시민연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 악법에 대해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결단력을 보여줬다.
그리하여 4월 13일 총선에서 마침내 낙선률 68.6%라는 성과를 거뒀다. 정치권과 일부 보수언론의 집요한 공세를 국민적 지지로 견디며 마침내 한국 유권자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낙선운동 대상자 86명 중 59명이 탈락했고, 이 중 총선시민연대가 22개 집중지역으로 선정한 22개 지역구에서도 15명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특히 수도권 20개 지역구에서는 19명을 낙선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핵심낙선 대상자였던 이사철, 김중위, 이종찬, 함종한, 김봉호 등 후보의 전원 낙선도 빛나는 성과였다.
성과와 한계
이런 수치상의 성과와 별개로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많은 직·간접적 효과를 거뒀다. 당시 성과로 평가된 것들은 ▲정치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개입 근거와 견제의 기반 마련 ▲현실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비판의식 제고와 국민주권의식 고양 ▲시민운동의 사회적 위상과 국민적 평가 제고 ▲시민운동의 질적 발전 기반 확보 ▲시민운동 단체들의 전국적 연대망 구축 등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계로 남는 부분도 있었다. 당시 총선시민연대는 낙천낙선운동의 본질적 한계로서 ▲대안적 정치세력에 대한 전망의 부재 속에서 출발 ▲지지운동과 후보전술을 포기한 네거티브 운동 ▲지역감정(특히 영남지역)의 벽을 넘지 못한 한계 등을 지적했다.
2004 총선운동, 2000년과 어떻게 다른가
2000년 총선연대 낙천낙선운동의 정치적 배경이 됐던 정치권의 무능, 부패, 반개혁의 모습은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다르지 않다. 오히려 차떼기 수법, 체포동의안 전원 부결 등의 모습에서 보듯이 국민의 부패 체감지수는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이 선거일 90 여를 앞두고 담합에 의해 정치관계법 개악에 나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한발 후퇴했던 2000년의 상황도 지금의 상황과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이처럼 시민사회가 대응하는 정치사회의 객관 조건이 4년 전이나 오늘이나 비슷하다면, 2000년 총선시민연대 운동의 경험을 안고 부단히 성장해온 시민단체의 심화발전은 정치권에 대응하는 시민사회의 주체적 조건을 4년 전의 모습과 다르게 만드는 지점이다.
먼저 조직적으로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전국적 단일 조직에 기초한 하향식 연대기구의 성격을 가졌다면, 2004년 총선운동은 개별 단체들이 자기 이해와 요구에 기초한 다양한 유권자운동을 개별적으로 전개하고, 이런 부문별 운동이 상향식으로 연대하는 형태를 띨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환경운동 단체들은 반환경 후보 중심의, 문화운동 단체들은 반문화 인사를 중심으로 낙천낙선운동을 전개할 계획으로 알려졌고, 여성계는 여성의 정치대표성을 중심에 놓고 각 당과 후보에 대한 지지당선운동에 무게를 싣겠다는 입장이다.
총선운동의 담론과 전술에 있어서도 2000년과 달리 시민사회는 크게 낙천낙선운동과 지지당선운동으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민영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은 “2004년 총선은 각 부문과 지역의 다양한 유권자 운동이 만개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물론 이런 시민사회의 분화가 단일 대오, 단일 원칙에 기초한 일사불란한 낙천낙선운동보다 운동의 힘과 성과 면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각 부문과 지역이 자기 이해와 요구를 담고 스스로 총선운동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는 점, 다양한 방식의 총선운동이 유권자 운동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반개혁, 부패정치 청산에 대한 국민의 높은 기대는 2004년 총선운동이 2000년 총선운동과 공유하는, 시민단체 총선운동의 든든한 자산이다. 지금 국민의 정치사회에 대한 분노와 시민사회에 대한 기대는 결코 2000년에 못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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