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희망이어야 하며, 정치인은 모범이어야 합니다. 교과서에나 접할만한 식상한 경구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치와 정치인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무입니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는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었고, 정치인은 반칙과 탈법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미래를 개척하고,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를 바라는 것은 헛된 꿈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치를 포기하지 않은 한 정치에 대한 희망의 꿈도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분노와 좌절의 정치를 희망의 정치로 바꾸기 위한 첫걸음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퇴출시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바로 4년 전, 우리는 같은 이유로 낙천낙선운동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당시 낙선운동은 폭발적인 관심과 지지 속에 이뤄진 사상 초유의 유권자 행동으로 기억됩니다. 실제 낙선대상자의 대다수를 선거에서 탈락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치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현실을 대하면서 2000총선연대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우리로서는 깊은 자괴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2000총선연대의 진정한 성과는 정치개혁이 유권자의 참여로만 가능함을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오늘 2004총선시민연대는 16대 현역의원 중 공천되어서는 안될 정치인의 명단을 발표합니다. 선정한 공천부적격자는 퇴출되어야 할 정치인의 최소한에 불과합니다. 또한 2000총선연대 낙선대상자 중 일부도 빠져있습니다. 명단에 빠진 정치인이 면죄부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갈이, 판갈이로 표현되듯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실망은 정치인 모두를 향해 있음에도 이 같은 국민 정서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섣부른 판단과 과도한 논란이 우리의 대의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 비해 좀 더 촘촘하고 엄격한 원칙과 기준을 적용했고 그만큼 이번 명단 작성에 있어서도 최대한의 신중함과 엄밀함, 공명정대함을 기하려 노력했습니다.
2000총선시민연대는 공천반대자 선정과정을 ‘전쟁 같은 불면의 밤’에 빗댄 바 있습니다 이번 명단선정과정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국민적 관심과 사명감, 책임감, 그리고 만약 있을지도 모를 실수를 막기 위한 긴장감 때문이었습니다. 자료수집부터 정리, 분석, 평가, 기준적용, 대상자 선정에 이르는 전 과정에 있어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았습니다. 자료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공공기관 기록에의 접근은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았고, 그마저도 협조를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자료수집 과정은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언론 보도내용을 꼼꼼히 검색했고, 국회의 회의록을 조사해 발언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부패, 선거법 위반 사건은 관련 사건의 공소장과 판결문 등을 꼼꼼히 일독 했고, 때론 취재기자에게 직접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판단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의원들의 반론과 소명을 요청했으며, 확인이 필요한 사항은 재질의를 통해 이미 수집한 자료와 비교해 판단하였습니다. 나아가 관련 전문가들의 견해를 청취하고 시민적 상식에 입각한 법률적 판단을 위해 법률지원단의 의견도 물었습니다. 공천반대 사유와 기준의 객관성을 기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으며, 시민단체 회원과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유권자위원회가 선정기준과 부적격 대상인사를 심의토록 하였습니다.
정치인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정치의 문제와 정치인의 병폐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라 할 수 있는 법안발의와 본회의 출석 실태는 그야말로 낙제수준이었습니다. 160여명의 의원이 1년에 단 한 건의 법안도 발의하지 않았고, 30여명의 의원은 4년 동안 단 한 건의 법안도 발의하지 않았습니다. 현역의원 중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 정치인 역시 50여명에 달합니다. 출발부터 불공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정치인들이 그들의 권한과 의무를 공정하고 성실하게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의정활동 중에 일어난 막말과 폭언, 몸싸움과 같은 추태 역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을 드러내는 비하발언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동료 여성의원을 모욕하는 성희롱 발언도 등장합니다. 망국적 병폐인 지역감정 조장 발언, 무차별적 색깔공세, 면책특권을 이용한 근거 없는 폭로 또한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권력과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쫓아 이리저리 당적을 옮기거나, 합의를 깨고 승패에 불복하는 철새정치인도 상당수입니다. 심지어 공조라는 이름으로 의원을 꿔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패와 비리 행위는 그 규모와 내용에 있어 경악할만한 것입니다. 휴게소, 지하주차장, 호텔커피숍, 사과박스, 쇼핑백, 차떼기, 책떼기 등은 이제 부패와 동의어가 된 듯 합니다. 그러나 부패연루 혐의자 모두를 선정하지 못했습니다. 기준을 적용함에 있어 실정법의 해석을 판단의 전부로 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있을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정치인에서 과거 검찰 소환 혹은 구속에 앞서, 그리고 재판 과정에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하다 결국 고개를 떨구던 모습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 중 추가로 사실관계가 확정되는 정치인은 이후에라도 반드시 낙선대상자로 선정해 퇴출 운동을 벌일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면책특권을 이용한 소환 및 재판 지연 행위 등은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으로서 떳떳하지 못한 특권적 행태라는 점에서 그 책임을 해당 정치인에게 물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결과물을 유권자와 개별정치인, 각 정당에 내어놓습니다. 2004총선시민연대는 공천부적격자로 선정된 인사 이외의 정치인 정보도 모두 공개할 것입니다. 이미 각 정당은 정치개혁이라는 대의에 동의한 바 있습니다. 지금 정당이 내려야 할 첫 번째 결정은 부패, 무능, 저질 정치인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작업이 완벽하지 않다 할지라도 공익적 양심과 최선의 노력을 다한 이 명단이 충분히 반영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울러 공직자로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거나 국민적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정치인들 역시 스스로 진퇴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낙천·낙선 운동은 미답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4년 전에 낙선운동이 걸어온 험난한 여정을 경험 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를 외면할 수 없었으며 유권자의 분노와 실망을 눈감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4년간 정치와 정치인을 향해 쏟아냈던 분노를 이제 정치개혁의 희망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기억하고 심판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입니다. 오늘의 명단발표가 지난 2000년에 이어 재차 유권자 혁명의 물결로 이어져 그토록 원하던 부패정치 청산, 정치개혁의 가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4. 2. 5
2004 총선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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