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3년 10월 2023-09-25   844

[여는글] 정치는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요즘 이 책 제목을 자주 떠올린다. 윤석열 정권 들어 민주사회가 급락하는 여러 모습을 보면서 극한적 불안과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 시절 언론 탄압의 주역으로 활약해 이미 방송통신위원장으로 불합격인 것이 자명한 사람의 등용, 법률에 따라 충실하게 수사하던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한 항명죄 적용과 수사 축소·왜곡, 홍범도 장군을 공산당과 무리하게 연결 짓는 시도 등 지금의 상황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또한 ‘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현실을 보면, 이러다가 난데없는 매카시즘이 부활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마저 된다. 민주주의의 급속한 퇴행 조짐이 분명하다.

이 모든 퇴행과 더불어 많은 국민은 극단적 분열과 대립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내전 상태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통령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하는 의회와 정당은 제 역할을 포기하고 편 가르기를 부추긴다. 

대통령·의회·정당 모두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이 부재하고, 이런 상황은 하향적으로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극성 지지자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혐오와 배제 문화를 사회 곳곳에 심고 있다. 여기에 정치에 냉소적인 국민까지 포함한다면, 우리는 상생과 평화의 문화에서 상당히 이탈한 채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대안의 시대, 전환의 시대’라는 담론이 실로 무참하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적군 섬멸과 우리 편 승리에만 목매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상이 복잡하면 출발점에서 다시 단순하게 진단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다. 정직하게 묻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물어야 할까? 첫 번째 물음은 ‘왜 존재하는가’이다. 이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뜻이다. 대통령·국회의원·정당·지방자치단체장·국가의 여러 기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의 답이 확실하면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 핵심 질문이 해결된다면 성경 마태복음(새번역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반석 위에 상생의 집을 지을 수 있다.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태복음 7:21~27)

여기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말한 ‘백성의 마음’일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살자는 시민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하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시민의 마음을 읽는 정치인, 시민을 위하는 정치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정치인의 존재 이유’라는 튼튼한 반석을 버리고 ‘당리당략’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배제와 혐오의 모진 광풍에 떠밀리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정직한 질문에 이어 정직한 반성과 성찰이다. 다시 마태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법으로 읽어보자.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7:1~5)

나는 이 성경 구절을 읽을 때마다 상대방 눈의 티를 지적하기에 여념이 없는 대한민국 정당의 ‘입’들이 떠오른다. 그 입은 결코 자기 정당의 들보를 말하는 법이 없다. 내 편의 허물을 감추고 상대편의 허물을 부풀리는 언변이 현란하다.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빼내지 않으면 위정자는 위선자가 된다. 상대방의 티를 들보로 만들고 나의 들보는 티로 보는 정치는 대통령과 정당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하고, 상대방의 실책에 의존하여 정권을 얻고 유지하려는 반사이익 정치문화를 만든다.

‘갈택이어竭澤而漁’라는 말이 있다. 연못을 말려 물고기를 얻는다는 뜻이다. 진나라의 왕이었던 문공이 군사 대국인 초나라를 이길 방법을 신하들에게 묻자 그 중 구범이 속임수를 쓰자고 했다. 그러나 신하 옹계는 이런 비유를 들어 반대했다.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면 어찌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이듬해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을 것입니다. 산의 나무들을 모두 불태우면 어찌 짐승을 잡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듬해에는 잡을 짐승이 없을 것입니다. 당장은 구차한 이익을 얻을 수는 있어도 나중에 큰 이익을 얻지 못하므로 속임수는 장기적인 술책이 되지 못합니다.”

이 고사를 읽으며 나는 우리 사회가 지금 자칫 ‘다른 편’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말려 죽이고 불태워 죽이는 문화로 급속도로 흘러가는 건 아닌지 염려된다. 그저 ‘정권의 획득과 유지’라는 구차한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다시 간명하게 정리해 본다. 상극에서는 외길만 있다. 반면 상생에서는 여러 길이 생긴다. 사람들은 행복과 평화로 가는 여러 갈래의 길을 원한다. 상생의 길은 존재의 이유, 성찰과 반성, 경청과 대화에 있다. 그러므로 ‘분노하라, 투쟁하라’라는 말을 이제는 ‘우리 함께 풀어가 보자’로 바꿔야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사회의 병통을 치유하는 황금률을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通則痛’이라 하였다. 서로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이 아프다.


법인 스님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16세에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대흥사 수련원장으로 ‘새벽숲길’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현재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에서 수행 중이며 지은 책으로 인문에세이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중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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