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한개를 세워 보이는 뜻

손가락 한개를 세워 보이는 뜻

삶이라는 것의 근본문제를 놓고 끝없이 괴로워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나는 누구이고 왜 살고 있으며 그러나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삶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해서 가장 훌륭한 삶인 것인가? 세계의 본디 모습은 무엇이고 역사의 참모습은 무엇이며 사회의 구조는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 사람들은 왜 서로 갈등하고 적대하며 싸우다가 마침내는 서로 죽이기까지 하는가?

아니, 무엇보다도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일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 것일까? 이 세계의 시작은 무엇이며 끝은 또 있는 것일까?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하여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 직장생활을 하게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친구와 선배며 선생님들을 만났지만 아무도 뚜렷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교과서를 빼 놓고도 많은 책을 읽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판에 박은 소리였고 지극히 당연한 말들만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모든 학문의 어머니가 된다는 철학공부를 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 곧 세계관을 세워주는 학문이라는 철학은 만물의 근원을 신 또는 정신이라고 보는 관념론과 물질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는 유물론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을 뿐, 삶의 근본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하였다. 종교로 가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자기 종교의 뛰어남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 지역과 민족에 관계없이 보편적이며 궁극적인 완벽한 공감을 주지는 못하였다.

식음을 전폐한 채로 괴로워하던 젊은이는 집을 나왔다. 이른바 일류 직장이라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집을 나온 젊은이는 산으로 갔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으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근본문제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물 맑고 공기 좋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며 3년간공부를 하였지만 깨달음의 길은 멀기만 하였다. 다시 3년의 공부를 하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갈등 그리고 회의와 갈등 끝에 찾아오기 마련인 절망감에 치를 떨며 젊은이의 육신은 점점 병이 들어갔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병이 들었다기보다 온몸이 사시랑이처럼 야위어가면서 잠못 이루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바위를 꿰뚫을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던 눈빛도 많이 죽었고 돌맹이를 넣고 깨물어도 금방 또 배가 고파지던 식욕도 떨어지면서 자꾸만 근력이 줄어들었다. 어느덧 귀밑머리에 희끗희끗한 잔설이 덮히기 시작하는 중년이 된 것이다.

아,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삶의 근본무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그리하여 길을 잃고 헤매이는 이 시대의 중생들에게 한 점 등불이 되어보겠다고, 이른바 출세와 성공이 보장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산으로 왔건만, 깨달음의 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늙고 병들어서 마침내 죽게 되는가.

장탄식의 한숨을 내뿜으며 신들메를 고쳐맨 사내는 바랑끈을 한 번 추슬렀다. 중생들이 살고 있을 저자거리로 내려가 보기 위해서였다.

역시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옳은 길이라기보다 중생답게 사는 것이 중생이 길인지도 모른다는. 비롯됨도 없고 마침도 없이 그렇게 태어나서 일하고 싸우면서 늙고 병들어 마침내는 아침 햇살과 함께 풀끝의 이슬이 사라지듯 이름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그렇게 나는 누구이며 그리고 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어 갈 생각을 하니, 무릎 밑에 힘이 빠졌다. 막막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슬픈 것이었다.

손등으로 눈께를 훔치며 산을 내려가는데 저만치 웬 사람 하나가 올라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보니 그 사람은 머리가 허연 늙은이였다. 새둥우리처럼 머리칼은 부스스하고 입성도 초라한데 눈에는 또 잔뜩 눈꼽까지 끼어 있어 한눈에도 길을 잃고 헤매이는 늙은 양아치로 보였다. 한숨을 삼키며 지나치는데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 좀 물읍시다.”

“물으슈.”

“왜 산을 내려가는 거유”

“남이야 산을 내려가든 말든 왜 그러슈?”

사내가 시쁘다는 표정으로 올곧지 않게 되물었고, 늙은이가 묘하게 웃었다.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산길을 내려가니 걱정이 되서 그러는 게요.”

“이 양반이 지금… 날은 저물었으니 산을 내려가는 거 아뇨. 노인장은 왜 산을 올라가는 거요? 날 저물었는데 왜 산길을 올라가?”

“길을 찾아보려고 그럽니다.”

“길?”

“깨달음을 얻어보려고 그런다면 알아들으시겠소이까?”

“깨달음이라고 그랬습니까?”

시답잖은 늙은 양아치로 보고 건성으로 대꾸하던 사내는 이것 봐라 싶은 표정이었고 늙은이가 목쉰 소리로 웃었다.

“클클. 그런 몰골을 해가지고 내려가봐야 갈 데가 없을게요. 저자는 시방 지옥이니까. 사람이 사람을 치고 민족이 민족을 치며 계급과 계급이 서로 죽이고 죽는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화탕지옥이다 그런 말이외다.”

“그거야 이른바 인류의 역사가 비롯된 이래로 끝없이 이어져 되풀이 되어 온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새삼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그 참상이 극에 달해서 이제는 끝장에 이르렀으니까 하는 말이지. 모두가 함께 죽게 되어있다 이런 말일세. 판이 이렇게 된 판이랄 것 같으면 시방 산으로 올라가야 되겠나 저자로 내려가야 되겠나?”

늙은이의 말투는 어느덧 아랫사람을 대하는 하게로 바뀌어 있었고, 사내는 바랑끈을 쥐고 있던 두 손을 배꼽 앞으로 모아 잡았다.

“가르침을 주십시요.”

“산천초목 두두물물이 다 말해주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가르침이 소용되는고?”

“저 역시 그 문제를 놓고 괴로워하던 끝에 집을 떠나 온 중생이올시다. 가정과 직장을 버린채로 십년이 넘도록 공부를 해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빈손을 들고 내려가는 길이올습니다.”

“빈손으로 내려가서 어쩔 작정인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거지요.”

사내가 힘없이 중얼거렸고, 늙은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묻게.”

“예?”

“자네가 얻어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란 말일세.”

“예. 여쭙겠습니다.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

“사람은 왜 살며 그리고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간절하게 사무치는 심정으로 물었는데, 늙은이가 말없이 손가락 한 개를 들어올렸다. 손가락 끝은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사내는 명치께를 짓누르고 있던 천근의 돌맹이가 쑥 내려가면서 천지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늙은이의 손가락을 보는 순간 물론 깨달음을 얻은 때문이었다.

서둘러 산길을 내려온 사내는 그 때부터 세상 사람들이 와서 깨달음의 세계를 물어볼 때마다 말없이 손가락 한 개만을 세워보였으니, 세상에서는 그를 가리켜 손가락 도인(道人)이라고 불렀다.

손가락을 세워보이는 것이 무슨 뜻일까?

김성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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