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 2003-03-17   940

신정부 과학기술정책의 방향: 시민단체의 시각

I. 현대사회와 과학기술, 그리고 과학기술정책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정치, 경제, 사회를 비롯한 일반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점차 증대되고 있음. 과학기술이 일반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볼 때 과학기술은 당연히 긍정성과 부정성의 양면을 지니고 있음.

– 긍정성: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생활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하는 각종 인공물과 서비스를 제공해 사람들의 물질적 삶의 풍요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함.

– 부정성: 반대로 과학기술은 사회구성원들을 제어할 수 없는 위험 속으로 빠뜨리는 부정적인 효과를 산출하기도 함.

o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기조는, 최근 약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이 지닌 이러한 양면성 중에서 긍정성만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면서 과학기술 진흥에 매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 경쟁력 이념이 과학기술정책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으면서 성장, 효율, 육성 등과 같은 “경제적 가치” 담론이 안전, 삶의 질, 생태적 건강성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사회적 가치” 담론을 압도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음.

– 이러한 과도한 개발 담론에 대한 반동으로 시민사회의 일각에서는 반개발주의, 반문명주의, 반과학기술주의적 태도를 갖는 개인이나 환경단체들도 존재하지만,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임.

–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이 “위험사회”(risk society)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가 필요하다고 한 바와 같이, 이제 기존의 성장중심의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꾀할 때라고 생각함.

o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새로 등장할 정부의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바 있는 ‘과학기술중심사회’라는 개념은, 아직 그 구체적이 내용이 충분히 제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의 도구로만 취급하던 전통적인 입장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함.

– 인수위가 과학기술분야 국정과제로 발표한 ‘과학기술중심사회’의 세부항목은 과학기술자 사기 진작 및 과학기술인력 양성, 연구개발비의 투자 확대, 기술혁신 및 신산업육성, 일자리 창출 등임. 결국 “육성”과 “투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지난 30년 동안 과학기술정책의 기본이념 역할을 해 왔던 양적 성장주의 논리를 되풀이하는 것에 다름 아님.

II. 신정부 과학기술정책의 기본 방향

o 곧 출범할 신정부(‘참여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은 과학기술을 단지 양적 경제성장의 도구로, 그리고 과학기술정책을 경제정책이나 산업정책의 하위 범주로만 인식하던 기존의 오래된 관행과의 단절이 요구됨.

o 신정부 과학기술정책의 바람직한 기본 방향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조화롭고 균형 있게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

– 미국, 유럽, 일본 등과 같은 주요 선진국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과학기술정책은 경쟁력 강화와 같은 “경제적 가치”(또는 국방과 같은 “군사적 가치”)를 중요한 정책목표로 추구하고는 있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가치”들을 정책목표 안에 유기적으로 통합하고자 노력해 오고 있음.

– 지난 1999년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렸던 <세계과학회 의> 역시 ‘과학과 과학지식의 이용에 관한 선언’과 ‘과학의제: 행동강령’ 등의 문건 발표를 통해 향후 추구해야 할 과학기술정책의 목표가 “지식을 위한 과학, 진보를 위한 지식”, “평화와 발전을 위한 과학”, 그리고 “사회 속의 과학과 사회를 위한 과학”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음.

1. 삶의 질 향상

o 이러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기본법 제1조에 목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과학기술을 혁신하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인류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이라는 문장 속에 들어 있는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구절이 단순한 수사적인 표현 이상의 실질적인 내용을 갖도록 해야 함.

–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 핵심적인 정책목표가 된다면, 필요할 경우 과학기술의 “진흥”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에 대한 “규제”도 가일층 강화되어야 함. 앞에서 과학기술의 양면성에 대해 언급하였듯이,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진흥보다는 규제가 더 중요할 때도 있기 때문임.

– 이와 관련하여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에 대한 투자도 훨씬 더 증대되어야 함.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할 정도로 시민들의 실생활에서 수많은 위험들이 복합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현실에서, 일상적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지식 창출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의 증대는 매우 시급한 상황임.

– 아울러 사회구성원들에게 골고루 과학기술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위해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 농민, 노인, 아동, 장애인, 환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공공복지기술과, 자연환경의 개선 등을 위한 연구개발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임.

2. 민주주의 증진

o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더불어 신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의 또 하나의 기본 방향은 “참여 확대를 통한 민주주의의 증진”이어야 함.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 과학기술정책의 결과로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면, “참여 확대를 통한 민주주의의 증진”은 과학기술정책의 결정과정에서 관철되어야 할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음.

– 과학기술정책 결정과정에서의 민주주의의 증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과학기술정책의 결정과정에는 과학기술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만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술관료주의와 전문가주의, 그리고 과학 예외주의(science exceptionalism)로부터 벗어나야 함과 동시에 과학기술시대의 새로운 시민권으로서 “기술시민권”(technological citizenship) 개념이 승인되어야 함.

– “기술시민권” 사상에 기반하여 추구되는, 과학기술정책의 결정과정에서의 민주주의의 증진이란 결국 주요 과학기술정책의 결정이 소수의 전문가와 기술관료들에 의해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밀실”에서, 이제 정책결정과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광장”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함.

– 신정부는 참여 확대를 위해 과학기술정책 결정과정에 일반 시민, 소비자, 현장과학기술자, 이해당사자들이 폭넓게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함. 참여는 정책결정의 모든 국면에서 다 장려되어야 하지만, 특히 국가기술지도 사업이나 국가연구개발사업 기획과 같이 장기적이고 국가적인 비전을 형성하는 단계에서부터 참여가 촉진되어야 함.

– 아울러 과학기술정책의 결정과정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활동 자체에 대한 사회적 약자집단의 참여(진출) 역시 촉진되어야 함. 특히 여성의 참여 촉진은 사회정의의 차원에서도, 국가과학기술력 향상의 차원에서도 매우 긴요함.

III. 신정부 과학기술정책의 내용

1. 연구개발의 공익성 확대

o 현실적으로 과학기술 투자에서 공익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쉽게 이루기 어렵고, 또한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연구개발 재원의 투자 우선 순위를 정하고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시행하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기술 예산의 재원이 시민들이 내는 세금에서 나온다는 대전제에서 보면 기업 부문이 대종을 이루는 민간부문의 연구개발과는 달리 공공 연구개발은 원칙적으로 공익 증진에 최우선적으로 투자되어야 함.

o 우리는 공익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검토하고자 함.

– 첫째, 넓은 의미의 공익인 연구개발의 공공성 증진,

– 둘째, 좁은 의미의 공익이라고 할 수 있는 공익적 연구(public interest R&D),

– 셋째, 앞의 두 가지를 포함하지만 약간 다른 차원의 공익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의 투자.

1) 연구개발의 공공성 증진

o 우선 넓은 의미의 공익은 공공성 증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음. 이 경우에 공공성 증진은 특정 부문보다는 전체사회의 요구를 반영하고 소수의 이익보다는 다수의 이익을 증진하며 사회적 수혜 계층보다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

– 이런 점에서 보면 우선 국가 연구개발 재정이 기업 부문의 사적 이윤의 증대에 직접적으로 지원되는 것은 문제가 있음. 따라서 정부의 정부개발 예산이 기업에 의해서 전유되는 성질이 높은 형태의 연구개발(예를 들어 개발연구)에 지원되는 것은 억제될 필요가 있음.

– 또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산업기술 연구개발이나 첨단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해 이루어지는 지원에 대해서 “공익성 검증”을 해 볼 필요가 있음. 이러한 점에서, 공공 연구개발사업과 공공연구기관은 특정한 산업 부문의 요구나 기대를 우선적으로 반영하는 연구보다는 전반적 지식과 기술을 증진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으로 생각됨.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전략적 차원에서 “선택”과 “집중”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결정은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사회적 합의에 기반해 이루어져야 함.

o 한편, 이와 관련하여 최근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대학연구의 상업화 강화 정책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음. 정부는 최근 <기술이전촉진법> 제정, <특허법> 개정, <산업교육진흥법> 개정 등 ‘산학협력’과 관련된 다양한 입법 활동을 통해 대학연구결과의 상업화와 지적재산권의 강화를 도모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대학의 연구자들로 하여금 특정 기업을 위해 일하도록 몰아가게 됨으로써 연구자들 사이에 비밀주의를 조장하고 이익갈등을 증폭시키는 등 대학연구의 공공성을 현격하게 약화시키게 될 것으로 우려됨.

2) 지역주민을 위한 공익적 연구개발

o 공익적 연구개발이란 공익을 증진시키는 지식 혹은 기술을 개발하는 것으로써, i) 주된 직접적 수혜자가 전체 사회이거나 지역 주민 (특히 사회적 약자 계층을 포함하여)이고, ii) 연구의 결과인 지식과 기술이 자유롭게 이용 가능해야 하며, iii) 연구 과정에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음.

–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과학상점'(science shop), 혹은 ‘지역연구센터'(community research center)임. 이들 공익연구개발센터의 운영은 연구의제 설정의 과정에서부터 연구의 수행과정과 해결과정에 걸쳐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학생들이 전문가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을 중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음. 이러한 참여를 통해서 연구 수행이 지역주민의 구체적 이해에 밀착된 문제중심적 접근을 함으로써 연구활동의 공적 성격을 확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연구결과가 사유화되거나 사장되는 일을 방지할 수 있고, 적은 예산으로도 공공연구기관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음.

– 이러한 공익연구개발센터의 고객은 주로 재정능력이 낮은 시민단체나 여성단체, 세입자단체,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나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음. 근래 들어 (중)소기업이 고객이 되는 경우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데, (중)소기업들의 경우 연구개발 재원과 인력이 부족하므로 대학 등 공공연구기관이 지원해야 할 필요성이 인정되고 있음.

– 현재 외국에서는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벨기에, 영국, 아일랜드, 루마니아, 이스라엘, 캐나다, 미국 등지에 공익적 연구개발을 위한 센터들이 도입되어 있으며, EU에서는 이러한 공익연구개발센터 활동을 범유럽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연구사업을 현재 진행하고 있음.

o 우리나라에서도 대학과 공공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공익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근년에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으며,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는 이러한 공익적 연구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과학기술기본법에 포함시키도록 요구해 왔음.

– 과학재단에서 지원하는 연구비의 일정 부분이 이러한 공익적 연구개발 활동을 지원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지원항목을 재조정해야 함. 예컨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시민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Citizens)이라는 지원프로그램을 만들어 공익적 연구개발이나 사업에 재정지원을 한 바 있는 미국과학재단의 경험을 참고할 수 있음.

– 병역특례와 같은 지원제도도 공익연구개발센터의 연구역량 강화를 위해 활용될 수 있다고 봄.

3)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

o 공공 및 민간 부문을 포함하여 과학기술 투자가 산업경쟁력 향상과 같은 경제적 논리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현대 첨단 과학기술이 초래하고 있는 부정적인 사회적, 환경적인 영향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지고 있음. 그 결과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이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정도로 매우 심대해진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므로, 이제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공공 과학기술 투자를 활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해졌음.

– 방사능의 위해, 복합적이고 대규모적인 기술체제에서 비롯된 위험 등과 같은 다양한 기술적 위험, 대기오염, 하천 오염 등 환경 위해, 홍수와 같은 사회적으로 초래된 대규모 자연재해, 황사, 식품, 의약품 등에 관련된 각종 보건상의 위험이 대규모화되고 구조화되어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생명, 안전을 위협함.

– 공공 과학기술 투자는 이러한 생명, 안전, 환경과 관련된 편익의 증진에 최우선적으로 배치되는 것이 요구됨. 현재 우리 나라 과학기술 투자의 경우 공익보다 사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간기업의 비중이 80% 정도로 매우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그나마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에서도 산업기술 개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이 되며 공익과 관련이 깊은 보건, 안전, 환경, 농림 분야는 비중이 매우 낮은 것이 현실임.

– 보건, 안전, 방재, 환경 등의 분야는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도 기여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도 경제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 됨. 대규모 자연재해가 얼마나 대규모 경제적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지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음.

2. 국가연구개발사업의 투명성 증진

1) 제기되는 문제점

o 정부가 추진하는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은 주로 일반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추진되기 때문에 공공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음. 그렇기 때문에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선정, 실행, 평가 과정은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함. 그러나 현재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선정, 평가의 합리성과 투명성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임.

– 예컨대 최근 프론티어연구사업 단장 선정과 관련하여 민주당 박상희 의원은, 정부가 대표적인 국가연구개발 사업중의 하나인 프론티어 연구사업을 시작하면서 후보 평가 결과를 무시하고 사업단장을 불공정하게 선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음. “지능형 마이크로 시스템 개발”과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의 경우, 1단계 전문위원회 평가 후 2단계에서 서면 및 발표 패널 평가를 통해 사업단장을 선정토록 돼 있었으나 당시 과기부장관이 일방적으로 2단계 평가를 없애고 1단계 평가에서 3등을 한 정부 출연연구소 출신을 사업단장으로 선정했다는 것임. 이는 평가위원의 선정 및 섭외를 과기부가 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여 논란이 되었던 사건임.

– 또한 작년 말에 참여연대는, 시민의 제보에 기초하여, 차세대 초전도 핵융합연구장치개발을 위해 정부가 1996년부터 2004년까지 9년 동안 총 248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되어 있는 국가핵육합연구개발사업에 대해 불량발생 사실의 은폐, 평가부실, 국가핵융합연구개발위원회 구성에 있어서의 이익충돌 등의 문제점들을 제기한 바 있음.

2) 투명성 제고 방안

o 국가연구개발사업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안들을 강구해 볼 수 있을 것임.

– 이익충돌(conflict of interests)의 방지책 마련: 앞의 사례로 제시된 국가핵융합연구개발사업의 경우, 사업단에 속해 있는 기업의 대표 2인과 1단계 사업의 총괄책임자가 국가핵융합사업의 추진에 대한 평가 및 단계별 승인여부를 결정하는 국가핵융합연구개발위원회에 각각 위원과 위원장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 사업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는 문제점을 낳게 됨. 이러한 이익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업단과 평가단은 엄밀하게 분리되어야 함.

–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기획 및 평가과정에 시민단체 관련자나 추천 전문가의 참여를 통한 인적 구성의 다양화 보장: 이는 연구개발사업의 투명성 제고뿐만 아니라 특정 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킴으로써 결국 국가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신뢰 증대에도 기여할 것임.

– 회의록 공개제도 시행: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기획과 평가 등과 관련된 각종 위원회의 회의록은 성실히 작성되어야 하며, 작성된 회의록은 국가기밀과 관련되지 않는 한, 연구자나 관심 있는 일반 시민에게 공개함으로써 국가연구개발사업의 투명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음.

3. 참여 확대

1) 시민단체 및 일반시민의 정책참여

o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를 보면 산·학·연 전문가들의 참여는 많지만 이해당사자나 일반시민,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의 참여는 매우 제한적임.

– 현재 정부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는 시민참여 제도로는 공청회와 자문위원회를 들 수 있음. 그러나 전자는 시민참여 제도라기보다는 절차적 정당성 획득을 위한 요식행위로 여겨지는 것이 대부분이며, 후자는 2000-2001년에 활동한 생명윤리자문위원회를 제외하면 시민 대표를 포함해 운영된 경우가 드묾(반면 환경정책 분야에서는 이해당사자와 환경단체의 참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

– 2000년 말에 제정된 과학기술기본법에서 “정책결정 및 추진과정에서의 참여 확대”를 천명한 바 있으나, 국가 과학기술정책을 심의하는 최고 정책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민간위원”에는 산업계, 학계, 과학기술연구소 인사들만을 포함해 시민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고 있음.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의 시민단체들은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정책참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참여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음.

– 1990년대 말부터는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와 무관심 속에서 시민단체가 주도해 서구의 시민참여 모델을 수용해 이를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음. 1998년과 1999년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주최로 두 차례에 걸쳐 열렸던 합의회의가 대표적임.

– 새로운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서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비롯한 정부 차원의 각급 위원회에 시민단체 대표를 일정비율 이상 포함시켜 과학기술기본법의 원래 취지를 살리고 정책의 대표성 제고를 꾀해야 할 것. 아울러 과학기술정책의 주요 사안들에 대해 여론조사, 합의회의, 시민배심원, 시나리오 워크샵 등과 같이 외국에서는 이미 많이 활용되고 있는 다양한 시민참여 모델들을 도입함으로써 일반시민의 목소리가 정책과정에 직접 반영될 수 있는 참여의 통로를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함.

2) 현장과학기술자들의 정책참여

o 그간 국가정책과정에 대해 과학기술자들이 참여하는 정도가 낮음을 개탄하는 목소리는 많이 있어 왔음. 이에 대한 근거로 국회의원이나 정부 국무위원 중 이공계 출신 비율이 낮다는 점이 종종 지적됨.

– 그러나 정책 상층부에 “이공계 출신” 인사가 기용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상징적” 효과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소, 기업연구소 등에서 연구 일선에 종사하고 있는 현장과학기술자들의 목소리가 해당 기관의 운영이나 국가 과학기술정책 전반에 반영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두는 것이라고 생각됨. 이는 사회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연구행정이 정책관료들과 소수의 정치화된 엘리트 과학자들의 탁상공론에 좌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과정으로서도 의미를 가짐.

– 이를 위해서는 중견급 이상 과학기술자뿐 아니라 연구개발인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청년·소장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이 정책과정에 투입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 특히 이공계 정부출연연구소의 현장과학기술자들을 대변하고 있는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이 정부의 정책수립 과정에서 공식적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함.

3) 여성의 연구개발활동 및 과학기술정책 참여

o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여성의 과학참여는 낮게 나타나지만,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볼 때 여성 과학기술자의 비율이 더욱 낮은 편에 속함.

– 우리나라는 연구개발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절대수가 부족할 뿐 아니라 그나마도 하위직과 비정규직에 많은 수가 집중되어 있음. 이는 초·중·고 및 이공계 대학 교육과 과학기술 연구개발 과정에 유·무형의 다양한 차별 기제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

– 이로 인한 인력 풀의 협소함 때문에 정부 및 국회의 각급 과학기술 관련 위원회에서 여성 대표의 비율은 10-20% 대에 그치고 있으며, 그나마도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위원직을 수행하거나 위원회를 번갈아가며 위촉되는 경우가 많음.

– 최근 몇 년 동안 정부 차원에서 여성부와 과학기술부가 여성 과학기술 인력 양성과 여성과학자 지원을 목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거나 기획중인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임.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향후 그 종류와 대상에 있어 더욱 확대될 필요가 있음. 아울러 여성과 관련된 과학기술 활동 관련 통계의 보완을 통해 이런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내실 있게 운영되어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를 평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함.

4. 과학과 사회의 접점 확대

o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확대·심화됨에 따라 과학과 사회의 접점이 확대되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음. 특히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획득해나가는 것이 사회 내에서 과학기술의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는 전제조건이 되고 있음.

– 기술로 인한 위험이나 대규모 기술사고들이 대중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기술 도입에 따른 정보격차 등의 사회문제들도 있음.

– 이런 상황은 단순히 개인들이 극복해야 하는 문화지체(cultural lag)가 아니라 사회와 과학기술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 사회적인 수요가 없을 경우 과학기술의 수용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음.

– 그러나 기존의 과학기술정책에서는 연구개발의 촉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 다른 모든 영역들이 과학문화로 분류되어 추진되었기 때문에 “과학과 사회의 접점확대”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어 왔음.

– 과학과 사회의 접점을 확대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크게 “과학기술의 사회적 호응성(책임성)”(accountability) 증진 및 “과학기술과 사회(STS)를 잇는 교육”의 내실화를 들 수 있겠음.

1) 과학기술의 사회적 호응성(책임성)

o 유전자변형작물의 안전성 문제, 생명복제의 윤리성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의 확산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최근 과학기술과 사회의 접점이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호응성(책임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계가 사회적 차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민사회·의회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과학활동에 대한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

– 이를 위해서는 연구개발활동이 수반하는 사회적·윤리적 함의를 고려하는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어야 함. 이와 관련하여 현재 인간유전체사업단의 사업의 일부로 진행되고 있는 ELSI(Ethical, Legal, and Social Implications) 연구가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겠음. 이러한 ELSI 연구는 여타의 사회적으로 민감한 연구개발사업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임.

– ELSI와 비슷한 것으로, 과학기술의 사회적 호응성(책임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는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 활동 역시 내실화되어야 함.

·현재 과학기술기본법에는 ‘정부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이 경제·사회·문화·윤리·환경 등에 미치는 영향을 사전에 평가하고 그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여야 한다’고 기술영향평가의 실시를 명시하였음.

·그러나 과학기술기본법에서는 아직 평가의 대상과 주체 등이 불분명하게 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연구개발사업의 기획·관리 기관과 기술영향평가를 수행할 기관이 같게 되어 있어 기술영향평가의 실효성을 의심케 함.

·따라서 향후 기술영향평가의 대상과 주체를 보다 명확히 하고, 장기적으로는 기술영향평가 기관의 독립화 방안을 강구해야 하며, 기술영향평가 과정에는 반드시 이해당사자와 일반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함.

2) 과학기술과 사회를 잇는 교육

o 학교 과학교육은 과학 지식습득 및 입시 위주의 과학교육에서 벗어나 과학, 기술, 사회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과학적 소양을 함양을 강조하는 과학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함.

o 대학에서도 인문사회계와 이공계 학생들에게 STS 교양과목을 활성화하여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관계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 즉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 과학기술에 의해 파생될 수 있는 윤리적 문제, 사회적 문제, 과학기술자의 역할 등에 대한 대학생들의 인식을 높일 필요가 있음.

– 또한 과학자와 엔지니어로 성장할 예비 과학기술자들에게도, 이들이 장차 연구개발 현장에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가교를 놓을 수 있는 ‘시민과학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대학의 훈련과정에서 습득할 수 있도록 전공 커리큘럼의 개선을 통해 이와 관련된 교과목들을 더 많이 포함하도록 해야 할 것임. 이를 위한 정부의 지원이 요구됨.

o 일반 시민에게 과학기술에 관련된 쟁점과 문화를 이해시키고 과학기술 시대를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출 수 있는 STS 교육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야 함.

– 그러나 일반 시민들이 과학을 이해한다는 것, 또는 시민들이 이해해야 하는 과학기술은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나 동일한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임.

– 일반 시민들에게 과학기술적 지식의 습득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이 자신들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 즉 과학기술의 사회적·문화적 영향을 성찰해 볼 수 있는 능력임. 이러한 능력 향상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지원체제의 정비가 요구됨.

* 이 글은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들과의 공동작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글에 대한 책임은 최종적으로 이 글을 정리한 필자에게 있음을 밝힌다.

이영희 | 시민과학센터 소장, 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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