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473] 혜성 충돌 2시간 전, 당신은 누구를 살릴 것인가?

혜성 충돌 2시간 전, 당신은 누구를 살릴 것인가?

사회혁신? 문제는 불평등이다

 

이승원 경희대학교 전환과 사회혁신 연구센터장

 

 

혜성이 다가오고, 탈출할 우주선이 있긴 하다.

 

지금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미래.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서 돌진한다. 남은 시간은 오직 두 시간. 두 시간 후 혜성과 지구가 충돌한 직후 지구의 모든 존재는 물론 지구 자체도 남지 않게 된다. 지금 인지 가능한 범위 내에 살아있는 사람은 열 명이다. ① 31살의 산모이자 수학교사, ② 40세의 베테랑 군인 남자, ③ 14살의 흑인 무슬림 중학생 남자, ④ 3살 여자 아이, ⑤ 56세의 가톨릭 신부 남자, ⑥ 22세의 인기 아이돌 스타 남자, ⑦ 51세의 경험 많은 농부 여자, ⑧ 44세의 지리학을 연구한 여자, ⑨ 37세의 만능 수리공 남자, ⑩ 29세의 의사 여자. 

 

다행일까? 그들이 모여있는 곳엔 최첨단 무한동력 자율주행 우주선이 이륙할 준비를 하고 있다. 탑승 직후 탑승자는 동면상태에 취하게 되고, 얼마나 시간이 흐를지 모르지만, 우주 어딘가에서 인간이 생존하기에 적합한 행성을 찾게 되면 우주선은 자동 착륙하고 탑승자들은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이제 이 우주선에 타기만 하면 지구 폭발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불행일까? 이 우주선에 탑승 가능한 인원수는 단 다섯 명뿐이다. 여러분이라면 열 명 중 어느 다섯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지난 십여 년 수많은 사람들과 토론해보니 몇 가지 경향이 보인다. 하나는 대부분 선택의 기준이 새로운 인류의 번식과 생존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일부일처 이성애 사회의 윤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측은지심이 앞서는 3세 여아도 생존력 앞에선 선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산모인 수학교사는 의견이 크게 나뉜다. 한 생명이 추가로 보존될 수 있기에 (혹은 가임이 확실히 증명되었기에) 우선 선택되기도 하지만, 산모도 3세 아이처럼 생존력이 약하기에 탈락하기도 한다. 가장 많이 선호되는 인물은 남자 군인이다. 생식력과 생존력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막강한 지도력으로 새로운 인류를 지키리라는 것이다. 대부분 이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

 

토론이 여기에서 끝나면 큰 의미가 없다. 토론이 마무리될 즈음 추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열 명을 선택한 자는 누구인가? 토론자 대부분의 선택 방식과 관점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자신을 3세 여아나 힘센 군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이타적인 가톨릭 신부는 말할 것도 없다. 방 안 장난감, 혹은 중국집 메뉴판 요리 목록에서 몇 가지 선택하듯 그리 큰 갈등이 없다. 만일 자신이 저 남아있는 열 명 중 하나라면, 그리고 우주선에 타지 못해 혜성과의 충돌 속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과연 선택된 다섯 명의 명단에 쉽게 합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택된 자들은 남은 자들과 쉽게 이별을 고하고 유유히 우주선에 탑승할 수 있을까?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벗어나 일인칭 시점으로 바뀌는 순간 현실은 잔인해진다.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못한 자들 사이에 아름다운 합의는 없다. 미래를 위한 어떤 원칙도 죽음을 목전에 둔 자들의 희생을 강요할 순 없다. 오히려 생식과 생존의 원칙은 남은 자들에게 열등감을 주는 모욕일 수 있다. 

 

두 가지 다른 이야기

 

아주 예외적인 두 개의 결론이 있었다. 두 결론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둘 다 열 명 모두 지구 폭발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하나는 아비규환의 끝이다. 군인이 무력을 사용해서 자신을 포함해 다섯 명을 선발해 우주선에 탑승하려 하지만, 남은 다섯이 남아서 죽기보다 싸우는 것이 살 확률이 높다는 판단 아래 군인 세력에게 반기를 든다. 결국, 혈투 끝에 남은 자들이 우주선에 타지만, 배제된 누군가 설치한 시한폭탄이 우주선의 이륙과 함께 폭발한다. 동시에 지구가 혜성과 충돌하면서 모두가 죽음에 이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전혀 다른 또 다른 열 명 모두의 죽음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열 명 모두 처음 얼마 동안은 다섯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논쟁과 몸싸움을 벌인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한 명이 우주선의 엔진을 부숴버린다. 잠시 다른 아홉은 허탈감과 함께 분노를 폭발한다. 그 한 명이 말한다. 어차피 저 우주선을 타면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우주선은 우리에게 희망의 자원이 아니라, 갈등과 번뇌의 원인이라고. 그래서 죽음을 두려하고 우리 남은 삶을 탐욕에 빠뜨리기보다, 우리가 살아온 날을 감사하고 남은 시간 서로를 위한 축복 속에서 보내면서 기쁘게 최후를 맞이하자고.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사회혁신을 말한다. 기업혁신, 과학혁신, 정부혁신, 시장혁신 등 혁신 앞에 붙은 다른 수식어와 달리 사회혁신은 우리가 마주친 공존의 문제, 사회적 가치의 위기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사회는 임의적 복합체다. 습관, 상식, 윤리, 문화가 어우러져 관계와 경계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규정되기도 하고, 그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한다. 사회에 대한 어떤 정의든 중요한 것은 ‘사회’는 그 사회에 속한 존재들을 ‘보호’할 때 유지할 의미가 있다. 사회가 구성원들을 보호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도시 난민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삶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그래서 이 복합체로서의 사회를 담고 있는 그릇이자 둥지인 국가와 시장에게 그 보호의 역할을 위임했을지 모른다. 단지 육체적 생존을 넘어 그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엄성의 보호라는 위대한 역할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많은 이들이 사회혁신의 열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속한 사회, 그리고 국가와 시장이 우리를 보호하기보다 우리를 불안하고 하게 만들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사회혁신의 일반적 정의 자체가 이를 나타낸다. 사회혁신은 국가와 시장이라는 가장 강력한 사회의 합리적 두 주체가 해결하지 못하는, 혹은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난제들을 시민이 주도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라고.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정의다. 그런 난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풀어가는 것은 사회의 보호를 위해 국가와 시장이 설정한 전통적 경계를 넘어설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국가-시장-시민 사이 근대적 위임관계를 넘어서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난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저 합리적 두 주체의 어깨 위에 앉아서 거인의 걸음에 방향을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거인의 어깨에서 내려오는 것 자체가 우리 시민들이 풀어야 할 또 다른 난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혁신은 그 엄청난 난제에 직면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용어이자 실천이면서도, 너무 쉽게 남용돼서도 안 되는 단어이다. 

 

그런데 사회혁신을 위해 관료제와 행정 절차라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국가와 시장이 ‘근대’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유해온 자원, 제도, 통제, 절차에 대한 모든 권력을 시민역량(capabilities) 강화와 권한 부여(empowerment)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사회혁신은 정부와 기업에게는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 상자일지 모른다. ‘생식력과 생존력’처럼 GDP 중심 양적 성장과 취업률이라는 성과지표보다 다른 가치를 내세우기도 어렵고 복잡하다. 그뿐 아니다. 정부나 기업이 공모, 위탁, 지원 등올 제공하는 한정된 자원을 우주선의 다섯 석처럼 절대적인 자원으로 생각하는 판타지를 포기하기에도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거버넌스’, ‘협치’, ‘공론장’이라는 표현이 시민들 사이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이해관계와 갈등을 잠시 덮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해결할 수는 없다. 사회혁신이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을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평등을 난제의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거대한 합리적 두 주체가 해결하지 못한, 그래서 우리가 보호받지 못하는 위기의 사회를 만든 그 난제는 무엇일까? 문제는 ‘불평등’이다. 지역과 지역 사이 불평등은 물론 우리가 사는 지역 내에서도, ‘당신과 나’ 사이에도 불평등의 간격은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을 비웃듯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이 특정한 민주적 제도의 필요조건인지는 몰라도, 불평등은 경제발전이 지닌 동전의 양면처럼 되어버렸다. 불평등은 빈곤은 물론,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고 결국 육체적 생명이 무의미해지는 존재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불평등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타율적이고 무기력하고, 그래서 모멸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의료, 교육, 주거, 이동권, 정체성, 문화, 노동과 쉼, 젠트리피케이션, 문화적 다양성 속의 불평등은 물론, 대의제 정치와 스마트 시티가 누구를 어디까지 포용하고, 권한을 부여할 것인가에도 불평등의 문제는 도사리고 있다. 

 

불평등이라는 공멸의 혜성이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사회혁신을 앞세우는 ‘시민들’은 수많은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의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얼마 전 발표된 대통령의 ‘혁신적 포용국가의 비전과 전략’, 행정안전부 사회혁신추진단과 서울시 혁신기획관실을 비롯하여 들불처럼 퍼지는 지방자치단체와 정부 부처의 혁신정책과 실험들의 진짜 관심과 목표는 무엇일까? 필요한 것은 속도와 규모가 아니라 불평등의 원인, 현실, 구조 그리고 넘어서야 할 방향을 위한 깊은 성찰이 아닐까? 사회혁신은 이 불평등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이승원 센터장은 서울대 아시아도시센터 선임연구원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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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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