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북리뷰 9_21세기의 윤리적 희망은 무엇인가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수년 전부터 나는 전쟁책임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본질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책임이란 무엇인가, 윤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다.”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윤리성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저자는 칸트의 윤리학을 길잡이 삼아 21세기의 희망을 ‘윤리’에서 모색한다. 그가 칸트에게서 발견한 길은 도덕이 선악의 문제 이전에 자유의 문제라는 것이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그것을 야기한 원인을 찾아간다. 그런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원인이 아닌 일, 즉 직접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나 혹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일까? 칸트는 책임질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왜인가? 그것은 우리가 자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외적인 원인을 갖지 않는 순수하게 자발적인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행위나 주체는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 자유롭게 판단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데올로기나 교육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주입된 생각에 근거하는 것이고, 또는 개인이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인종이나 성별, 국가나 민족 또는 신분이나 계급 같은 자연적ㆍ사회적 관계로부터의 강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는 오직 실천적(윤리적) 차원에서만 주체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윤리적 책임이란 원인의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책임은 오직 자유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를 수단으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은 자유의 명령이다.

가라타니에게 타자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에게 타자는 언제라도 자기동일화될 수 있는 그런 타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소통 불가능한 상태에 있어서 끊임없이 우리의 윤리성을 환기시키며 자유의 능력을 시험하는 그러한 타자이다. 그리고 책임(responsibility)이란 죄과에 대한 보상이나 원한의 해소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들 타자에 대한 나의 응답(response)인 것이다.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사람의 눈으로 본 역사가 있고, 여성의 눈으로 본 역사가 있으며, 동성애자의 눈으로 본 역사가 있다. 그것은 아직 큰 목소리가 되지는 않았다.”(180쪽) 그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이 죽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책임이다. 역사 바로보기는 그런 의미에서 죽은 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들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실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세대가 죽고 없어진다 해도, 모든 재판과 보상이 끝난다 해도, 그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윤리성은 미래의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그 계산서를 돌린다면 그들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190쪽)이다. 환경윤리는 미래의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물론 죽은 타자가 우리의 응답에 대해 대답할 리도 없고 미래의 타자가 우리에게 감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응답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며, 이때 인과성의 역사와는 다른 차원의 역사가 출현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코뮤니즘 역시 바로 그렇게 출현하는 역사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코 자연사적 필연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적 경제는 영원할 것이다. 그것을 폐기하는 것은 윤리적인 개입이다. 즉 그것은 ‘자유’의 차원에서만 오는 것이다.”(189쪽)

만약 도덕이 자유로부터 나오지 않고 공동체의 규범이나 개인의 행복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한 공동체의 선이 다른 공동체의 선과 충돌하거나 개인의 이익이 다른 이의 이익과 상충(相衝)하는 시점에서는 그것은 더 이상 보편윤리로서 기능할 수 없다. 그러면 국가와 국가 사이에 도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어떤 훌륭한 시민도 결국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는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법칙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와 이에 대한 미국의 보복전쟁, 발칸반도에서의 인종청소나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의 공해산업 이전(移轉)과 같은 명백한 비윤리적 행위가 국가나 사회의 이름으로 용인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한 사회나 공동체의 도덕을 ‘도덕’으로,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도덕을 ‘윤리’로 구분하여 부르고 개인이 올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타율적 ‘도덕’의 기준에 따를 것이 아니라 세계시민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공적인 것은 국가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시민적으로 생각하는 데 있으며 세계시민으로서 자유의 명령에 따르는 개인의 도덕은 국가의 도덕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시민이란 것은, 어떤 악명 높은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코스모폴리턴을 자처하는 필자들처럼 국가나 민족 위에 둥둥 떠서 마치 자신은 그 위에 있는 존재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면제해 주기 위한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시민이란 국가나 사회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도 개인의 이름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종전 후 모든 이들이 독일의 전쟁책임만을 이야기할 때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추궁했던 사르트르나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공격에 대해 그 비윤리성을 집요하게 폭로하고 있는 촘스키는 바로 그런 세계시민일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그 세계시민적 윤리가 가라타니라는 일본지식인에게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도록 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야 할까? 우리에게 그것은 광주와 베트남에 대해, 분단과 한국전쟁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묻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윤리성을 환기시키는, 다시 말해 아렌트와 하버마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우리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리21』에서의 가라타니와의 만남은 매우 소중한 하나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그것은 서구가 보지 못하는 다른 지평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연대작업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가라타니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타자의 지평이 있다. 이 타자의 지평은 곧 새로운 사유의 지평일 것이고 너무나 많은 타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희망의 가능성 또한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그 타자들을 만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자유의 정신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자유를 모르는 정신은 타자 역시 자유의 존재로 대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응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채효정 / 학벌없는 사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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