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북리뷰 1_공론장의 구조변동, 그 새로운 맥락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하버마스를 철학과 사회과학의 세계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교수자격논문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처음 출판된 지 40년이 지나서 마침내 번역되었다. 그 동안 이 책의 저자는 현존하는 최고 사상가의 지위를 확고히 굳혔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위대한 철학자 겸 사회학자가 지금까지 펼친 그 복잡하고 정교한 논의의 기본 아이디어가 이 책 속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과 토론을 통한 공적 의지의 형성이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이 현실만이 아니라 이론 속에서도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이 분석은 그가 『의사소통 행동이론』에서 의사소통 합리성을 주창하게 된 이유를 일러주며, 또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제시된 담론적 민주주의론의 기본 사상, 즉 의사소통적 자유의 법적 제도화라는 기본 사상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하버마스 사유체계의 고향이라고 할 만할 것이다.

그러나 40년 세월의 거리를 두고서도 이 책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진짜 이유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대규모의 변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10여 년간 우리는 21세기 민주주의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세계사적 사건들을 경험했다. 첫째는 동유럽 현실사회주의를 무너뜨린 동유럽혁명이고, 둘째는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공간의 급속한 확장이며, 셋째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코소보 전쟁 등으로 요약되는 새로운 정치ㆍ경제적 세계질서의 형성이다. 이 세 가지 변화의 파장을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또 이 파장을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의 방향으로 실천적으로 유도하려는 사람에게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필독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변화는 이미 한 번의 구조변동을 거친 공론장에 두번째 구조변동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동유럽의 이른바 ‘만회하는 혁명’은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와 시장의 야만이 주는 교훈 그 어느 것도 망각하지 않고 역사적 학습능력을 발휘하려는 사람들에게 국가/시장의 이분법을 벗어난 국가 밖의 비경제적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때 화폐와 권력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시민사회의 문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공론장이다. 그러니까 동유럽혁명은 민주주의에서 시민사회와 공론장의 역할과 의의를 다시 부각시켰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민사회와 공론장은 동유럽혁명을 통해 새롭게 부각되는 순간, 두번째 구조변동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갔는데, 이는 사이버공간의 출현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과정 때문이었다. 이 두번째 구조변동과정에서 당연히 많은 질문이 제기된다.

사이버공간은 인쇄매체나 방송매체에 의존하는 종래의 공론장과 구별되는 사이버공론장의 형성과 그 정치적 역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근대 초 공론장의 한 장소였던 다방은 민주주의의 사회적 고향이었다. 그럼 사이버카페는 오프라인 선배의 그 역사적 역할을 다시 한 번 담당할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식일까?

또한 세계화과정 속에서 민주주의의 국민국가적 틀이 파괴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새로운 발달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현재 이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는 이를테면 사면초가의 상태에 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국민국가적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국민국가 너머의 민주주의라는 길은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를 헤쳐나가는 데 있어서 시민사회와 공론장은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가? 국내외 비정부기구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있으며,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지 않은 자율적인 세계적 공론장의 가능성이 인터넷을 통해 열릴 수 있는가? 또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근대 초에 시민사회와 공론장이 국민국가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물꼬를 열었듯이, 세계적 규모의 시민사회와 공론장이 국민국가 너머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적 조직원리를 확산하고 관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전략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넘어야 할 장애물은 무엇인가?

물론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찾아낼 수는 없다. 이 책은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초기 부르주아 공론장에서 사회복지국가 시기의 공론장으로 넘어가는 구조변동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답을 얻는 데 필요한 이론적ㆍ역사적 통찰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근대 공론장의 첫번째 구조변동을 분석한 이 책을 참조하지 않고선 공론장의 두번째 구조변동에 대한 논의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현재의 급속한 변화를 공론장의 구조변동과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시각에서 독해하고 이 맥락에서 앞의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이 책이 열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박영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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