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2002-05-07   1459

기념비적인 판결

지난 12월 27일 삼성전자 이사들을 상대로 한 주주대표소송에서 수원지방법원이 977억 원의 손해배상판결을 낸 것에 대하여 일부에서 비판 또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과감하고 신속해야 할 의사결정을 지체시키고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으며, 결국 백면서생 같은 판사들이 경영 현실도 모르면서 자의적인 사후판단에 따라 이사들에게 책임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특히 1월 3일자 중앙 시평에서 강위석 월간 에머지새천년 편집인은 이번 판결에 대해 “반시장적”이고 “반자유기업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시장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지적 교활과 오만’이라고까지 매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관련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오히려,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에 법치주의와 시장경제 질서에 입각한 기업지배구조를 확립하는데 기여할 기념비적인 판례로 평가되고 있다.

경영판단의 원칙이란

경영판단의 원칙은 미국 회사법에서 비롯된 원칙으로, 이사들이 한 “경영판단”에 대해서는 추후에 실패를 하더라도 책임을 면하도록 하는 법칙이다.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고 있고 고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기업경영만큼 사전에 그 결과를 알기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한 여건에서 이사로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예컨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IMF 위기나 9·11사태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판단에 대해서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누구도 경영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이사로서 최선을 다하여 경영판단을 했는지 여부이다. 만일 이사가 오류투성이인 재무제표를 전혀 확인·검토하지 않고 승인했다면 경영판단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경영판단의 원칙에 따라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

투자실패가 아닌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책임

삼성전자 주주대표소송 판결을 살펴보자. 삼성전자 이사진은 두 번에 걸친 이사회에서 이천전기의 지분을 85%나 인수하였는데, 불과 1년 후에 그 회사는 부도가 나 1900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문제는 투자의 실패가 아니라, 그 의사결정과정에 있다. 삼성전자가 증인으로 내세운 삼성전자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이사진은 인수과정에서 전문가의 자문이나 대안검토는 물론 부채가 얼마이고 자산가치가 얼마이고 수익성이 얼마인지 등 재무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경영학개론을 마친 대학생도 확인할 법한 기초사항에 대해 삼성전자 이사들은 전혀 검토도 하지 않은 것이다. 3년간의 재판과정에서 재판부가 수 차례에 걸쳐 관련 검토자료를 제출하도록 재촉했으나, 실무진 차원의 검토자료조차 없다는 답변에 재판부가 오히려 당혹해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고의나 과실로 인해 경영판단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재판부가 판시한 것이다.

한편, 이천전기 “퇴출 결정 이후에” 1570억 원의 지급보증을 해준 부분에 대해서는 삼성전자가 적색거래처로 지정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는 경영진의 사후설명을 재판부가 인정하고 면책함으로써, 경영판단의 범위를 지나칠 정도로 광범위하게 인정한 측면도 있다. 솔직히 미국 법정이었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업가 정신을 장려하는 판결

이번 삼성전자 판결은 의욕적인 기업가 정신을 위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까지 재벌그룹의 전문경영인들은 그룹 차원의 지시에 따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부실한 계열사에 지원을 해준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이러한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강력한 명분이 생겼으므로 앞으로 보다 소신 있게 경영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거 때마다 그리고 정권교체 때마다 정치자금 요구에 시달리던 경영인들을 해방시킬 튼튼한 방패막이도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직 항소심이 남아있지만, 이번 1심 판결에 의해 대한민국 최고 기업의 경영진도 똑같이 회사법의 엄정한 적용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독립적 이사회, 투자자보호, 더 나아가 시장경제질서 및 법치주의의 확립에 크게 공헌할 것으로 본다.

김준기 |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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