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4 2014-11-10   886

[동향2] 사회적 타살과 노동

사회적 타살과 노동

장지연 ㅣ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어떤 죽음을 두고 우리가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칭할 때, 그 의미와 결과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아파하는 이웃에 무관심했던 스스로를 포함하여 넓은 범위에서 책임소재를 찾는 태도가 나타난다. 자살의 주된 원인이 사회적 배제에 있다고 보고, 사회구조적인 대책을 마련할 필요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사회 수준에서 책임을 묻다보니 오히려 실질적인 책임소재를 흐리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발생한다. 노동자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을 둘러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지 않을 수 없다. 막연하게 ‘우리 다같이’ 잘못했으니 반성해야한다고 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이 글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분배정의와 인정의 정치

 

어떤 이는 현대의 고도화된 생산체제로 인하여 경제적 분배(불평등)의 문제가 ‘착취’에서 ‘배제’로 옮겨갔다고 말한다(바우만, 2008). 만연하는 청년실업자나 장기실업자를 보면서 생산체계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불필요한 존재로, ‘인간쓰레기’로 전락하고 있다고  1990년대 이후 유럽의 사회문제를 진단한 것이었다. 이 이론가들이 워킹푸어의 문제가 주된 사회문제가 된 최근에도 같은 진단을 내릴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현대 한국은 착취와 배제가 유럽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것은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특징이라면, 노동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고도화된 생산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으나, 이로 인해 실업이 만연하게 된 것은 아니다. 착취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전형적인 예로 들 수 있는 두 가지 양상은 장시간 노동과 간접고용이다.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하지 않고 그것을 자본가들이 전유하는 것을 착취하고 할 때,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착취의 가장 전통적인 양상이다.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도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는 사례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문성훈(2005)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 개념을 적용하여 분석한 바 있다. 1987년 당시의 투쟁은 권력투쟁이나 계급투쟁의 성격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음으로써 자기실현의 사회적 조건을 확보하려는 인정투쟁의 성격으로 파악된다고 하였다. 때로 노-노갈등의 양상으로도 나타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은 인정투쟁으로 해석하기에 더욱 적합해 보인다.

 

‘(부)정의’의 문제를 개인 혹은 집단의 정당한 인정 요구에 대한 무시의 문제로 보는 호네트의 이론은 분배 패러다임에 경도되어 있던 기존 정의론을 수정하는데 기여하였다고 평가되지만, 분배 패러다임이 인정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수는 없다는 비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호네트는 올바른 인정은 정당한 분배를 낳기 때문에 분배투쟁 역시 일종의 인정투쟁이라고 보고, 분배와 인정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접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분배문제를 인정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 흐름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주자는 낸시 프레이저이다(Fraser & Honneth, 2003). 그녀는 ‘인정’의 필요성에 충분히 동의하는 입장에 있지만, 분배를 인정의 하위개념으로 두는 것은 반대한다. 호네트의 인정이론이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인정모델이라면, 프레이저는 인정의 문제를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의 문제로 접근하자고 제안한다.

 

노동학대, 그리고 상품이 되어버린 인간

 

분배의 정의와 인정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노동’ 그 자체가 너무 괴로운 것이어서는 안 된다. 착취가 있어서는 안 되며, 응분의 보상이 있어야한다. 권리의 침해가 발생하면 자발적인 결사와 집단행동으로 대응함으로써 노동자 지위에 대한 인정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평등한 지분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노동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를 떠나서, 노동을 팔지 않고서도 기본적인 생계가 가능한 사회, 즉 노동의 탈상품화가 진전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자살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현상이 된다.

 

착취, 배제, 모욕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배제, 모욕은 분배와 인정이라는 정의(正義) 원리에 정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현상들이다. 과도한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 모욕적인 감정노동, 간접고용을 통한 위험의 전가는 모두 착취의 여러 유형들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간접고용을 통한 분리, 특수고용형태라는 새로운 유형의 고용은 배제의 기제들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모욕적인 감정노동, 그리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보편적 존재로서 대우받고자 하는 인정욕구에 대한 거부이다. 착취하고 배제하고 무시하는 행위는 일상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학대가 된다.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학대가 청소년 자살을 낳고, 노인에 대한 학대가 노인자살을 낳는 것처럼, 노동자에 대한 학대는 노동자의 자살 현상을 초래한다.

 

과도한 노동강도와 업무 스트레스

 

시간당 임금이 적으면 오래 일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경제활동인구조사(통계청 2013년 8월 원자료)를 분석해 본 바에 따르면, 주당 40-44시간 법이 정한 정상적인 시간만큼 일하는 사람의 월소득이 가장 높았다. 그보다 길게 일하는 사람들의 월소득은 제아무리 60시간 70시간을 일해도 평균적으로는 월200만원 수준이었다. 월200만원을 벌 수 있을 때까지 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장지연, 2014).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 일하는 우리나라 현실은 저임금이라는 문제와 닿아있다. 장시간 노동과 과도한 노동강도, 그리고 업무 스트레스가 죽음을 부른 사례는 복지공무원의 잇따른 자살이 대표적이다. 2013년 1월에는 용인에서, 2월에는 성남에서, 3월에는 울산에서 사회복지 공무원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다(MBC 기사입력 2013. 3. 30). 열악한 근로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죽음을 부른 사례는 혼자 기관차를 운전하며 캄캄한 전면을 주시하는 것이 일상인 지하철 기관사의 경우에서도 발생하였다. (경향신문 2013.8.20. “복지공무원 ‘살인적 업무’ 하나도 안 바뀌어”; 국민일보 2012.6.29. 전직 호소했지만 사측은 묵살, 결국 죽음으로… 공황장애 지하철 기관사 ‘무언의 절규’)

 

감정노동? 모욕!

 

흔히 감정노동이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상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서비스직과 판매직 여성에게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남성이 겪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자이자 노동자일텐데, ‘소비자는 왕’이라는 왜곡된 서비스 지상주의의 폐해는 돌고 돌아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까지 와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직원의 자살사건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최악의 상태를 보인다. 먼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문제가 있고, 모욕 수준의 감정노동으로 인한 우울증세가 나타난다. 여기에 더하여 노조활동에 대한 탄압까지 추가되면서 최악의 노동학대 상황을 보여준다. (한겨레 2013.12.16.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직원 정신건강 심각; 한겨레 2013. 11. 1. “삼성전자서비스 ‘고객평가’가 사람 잡았다”; 한국일보 2013.11.4. 자살한 삼성전자서비스 기사 처우 어땠길래)

 

간접고용과 비정규직 차별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직원의 자살은 간접고용의 문제도 드러내고 있음을 앞서 언급하였다. 우리나라에 매우 독특한 고용형태인 제조업 부문에서의 ‘사내하청’도 전형적인 간접고용이다. 용역, 사내하청, 파견, 위탁… 이런 이름을 단 새로운 노동형태가 늘어났다. 노동자는 A업체와 계약을 하고 일은 B 사업장에서 한다. 파견이 아니라면 B 사업장 소속의 관리자에게 직접적인 업무지시를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실제로 지켜지기 어렵다. 한동안 파견으로 일하다가 2년이 되면 같은 그 일자리에서 이번에는 용역으로 일하는 일이 흔하다(은수미 2013).

 

비정규직의 한 유형인 간접고용은 위험을 외주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흔히 채택된다. 이 때 대표적인 위험은 해고(고용불안정)의 위험과 산업재해의 위험이다. 경기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에 따라 발생하는 고용불안정의 위험은 해고라는 형태 대신 ‘협력업체’와 재계약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소된다. 최근에 부쩍 산재사고가 비정규직, 그 중에서도 하청업체 직원에게 집중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힘들고 위험한 일을 떠안는 문제 이외에도 하청업체나 협력업체 직원들은 숨어버린 고용주로 인해 권리의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무엇보다 사내하청은 같은 사업장 안에서 유사한 일을 하면서도 작업복이나 사내식당 이용과 같은 일상적인 부분에서 차별과 배제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일보 2013.8.22 비정규직 차별이 낳은 자살)

 

특고와 위장된 자영

 

“제가 노동자인가요?” 은수미(2013)는 노동권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을 묘사한 자신의 책에서 한 학원 강사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을 들었던 사례를 소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노동자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자인 것도 같은데, 그렇다면 나의 고용주는 누구인지 그것이 또 애매하다. 20-30년 전 같으면 당연히 노동자였을 일자리들이다. 학원 강사 뿐 아니라, 소규모 호텔 메이드, 레미콘 기사, 택배 기사도 자신들에게 업무지시를 내리는 관리자로부터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학습지교사, 보험판매인, 골프장 도우미도 일찍부터 임금노동자가 아닌 것으로 분류되었다. 연극, 영화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프리랜서라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명칭이 주어졌는데, 이것도 임금노동자성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자영업자와 마찬가지다.

 

임금노동자와 자영자라는 지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임금노동에는 ‘종속’이라는 특징과 ‘보호’라는 특징이 공존한다. 회사의 규칙과 상관의 업무지시를 따라야하는 대신 자의적인 해고로부터 보호와 집단적 노사협의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사회보험에도 가입된다. 앞 절에서 노동이 선인가 악인가를 질문하기도 하였다시피, 종속을 댓가로 보호를 얻어낸 임금노동자로서의 지위도 그만큼의 딜레마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이런 위장된 자영자의 지위는 실제적으로는 임금노동자와 같은 종속성을 가지면서 보호로부터는 배제된다는 참으로 억울한 위치에 있다. 위장된 자영업자(disguised self-employment)는 고용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이익만을 전유하려고 하는 자본의 속성이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다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조탄압

 

노동운동은 ‘좋은 노동’을 만들기 위한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앞서 언급된 열악한 노동환경과 착취, 배제의 문제들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파업권만 실질적으로 보장된다면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서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 노자관계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힘의 불균형 속에 있다. 노동자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개인 자격으로 자본과 맞서서 권리를 지켜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노동자간에 연대하여 대응하는 길 밖에는 없는데, 국가와 기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시도 자체를 억압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 지위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는 것이고, 사회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하고자 하는 요구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조활동에 대한 탄압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이데올로기적인 공세라고 할 수 있는데,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개별 사업장의 파업을 법적으로 불법파업으로 낙인찍는 것이다.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의 발언, 신문사설 등을 통해서 대기업 노동자의 파업이나 노조활동을 ‘귀족노조’ ‘밥그릇싸움’ ‘집단 이기주의’의 용어를 써가며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 이로 인해 곧장 노동자의 자살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이데올로기적 공격은 이어서 벌어지는 물리적 폭력이나 경제적 압박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둘째는 직접적인 폭력을 동원한 노조파괴이다. ‘SJM(에스제이엠 홀딩스), 한국3M, 발레오만도, 상신브레이크, 유성기업, KEC 등 최소한 14개 이상의 사업장에서 용역경비업체를 불러들여 파업노동자에 대한 폭행을 자행하였다. 기업과 경찰이 법을 무시하고 노동자를 공공연하게 폭행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그것에 침묵했다는 사실’(은수미 2013)은 많은 노동자 자살 사건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공한다. 세 번째는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도 이어지는 경제적 압박이다. 수백억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리면서 노동자들은 정신적으로 위협감을 느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일상생활이 망가지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총 자료에 따르면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이 손해배상 청구당한 총액은 1691억6천만원에 달하며 가압류 금액도 182억 8천만원에 달한다(안진걸, 2014). (경향신문 2011.3.3 [쌍용차가 남긴 그늘] 정리해고… ‘쌍용차 출신’ 딱지… 결국 ‘사회적 타살’)

 

인간의 상품화

 

노동은 가능한 한 ‘좋은 것’이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 하는 동안에 착취, 배제, 차별, 무시가 없어야한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서, 그리고 ‘좋은 노동’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고용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기본적인 소득보장이 실현되어야 한다. 고용 중단으로 인하여 소득이 단절되는 경우에도 사회적으로 용인될만한 수준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국가가 복지국가이다. 해고가 곧 생활고로 이어지고 자살로까지 귀결되는 사회라면 노동의 탈상품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해고는 살인이다”

모든 해고가 살인은 아니지만, 어떤 해고는 살인이다. 해고가 억울하거나 자존심을 심하게 다치게 하는 경우, 해고는 살인이 될 수 있다. 최근 신성여객 버스노동자 자살 사건은 해고 자체가 억울하다며 해고무효 소송을 진행 중이던 진기승씨가 무릎 꿇으면 복직시켜준다는 말에 굴욕을 감내했지만 결국 복직되지 않자 자살한 사건이다. 30여일 사경을 헤매는 동안 ‘해고무효’ 판결이 나왔지만 이를 알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한겨레 2014. 6. 3. 무릎 꿇으면 복직시킨다더니 이용만…끝내 돌아오지 못한 억울한 해고)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노조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나라에서 두 가지 이유로 치명적이라는 뜻이다. 하나는 해고가 낙인이 되어 재취업이 어렵다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실업급여를 받기가 어렵고 수급하게 되더라도 수급가능 기간이 짧고 액수도 적어서 곧바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정리해고나 희망퇴직으로 일자리를 잃은 후 생활고 때문에 자살하는 사건이 가끔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사회보장으로부터의 배제

 

구조조정으로 인한 해고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한 고용 단절은 소득보장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이상 생활고로 이어진다. 지난 2월 송파구 세모녀 자살사건은 많은 이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사건 직후 참여연대가 개최한 토론회에서 이병희 박사는 어머니 박씨가 식당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길에서 넘어져 수입이 끊기게 되었지만,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사회보험의 제도적 사각지대 문제를 제기하였다(이병희, 2014). 우리나라의 산재보험은 출퇴근 과정에서 발생한 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급여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식당에서 180일 이상 일하였다면 실업급여 수급자격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용보험제도 하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실업급여를 받지 못 하였을 텐데, 그 이유는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구직활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세모녀 자살 사건의 어머니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소득 단절에 대응하는 사회보험의 소득보장으로부터는 배제되어 있었다.

 

결론

 

갈등적 사회현상의 하나인 자살은 경제적 분배의 불평등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인정의 결핍에서 온다. 우리나라 노동현장에서 볼 수 있는 분배정의의 훼손은 착취와 배제라는 두 가지 기제가 모두 작동함으로써 자행되고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지위의 인정’이 필요하다. 인정 개념의 반대편에는 무시와 모욕이 있다. 정의론에서 출발한 착취와 배제, 무시와 모욕 개념은 사회현상이 된 노동자 자살을 해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좋은 노동’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배제, 모욕은 분배와 인정이라는 정의(正義) 원리에 정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현상들이다. 착취는 과도한 노동 강도와 업무 스트레스, 모욕적인 감정노동, 간접고용을 통한 위험의 전가라는 형태로 노동현장에 만연해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간접고용을 통한 분리, 특수고용형태라는 새로운 유형의 고용은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 관철되고 있는 배제의 기제들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모욕적인 감정노동, 그리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보편적 존재로서 대우받고자 하는 인정욕구에 대한 거부이다. 착취하고 배제하고 모욕하는 행위는 일상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학대이다. 학대는 자살을 초래한다.

 

고용 중단으로 인하여 소득이 단절되는 경우에도 사회적으로 용인될만한 수준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국가가 복지국가이다. 해고가 곧 생활고로 이어지고 자살로까지 귀결되는 사회라면 노동의 탈상품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라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현재 이런 상태에 있다. ‘좋은 노동’의 기획으로부터도 멀 뿐 아니라,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는 필라델피아 선언의 제1원칙도 낯설기만 하다.

 

자살 사건 하나하나는 개별적인 개인사일 수 있지만,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집단에서 자살사건이 급증한다면 이것은 해명되어야 할 사회현상이 된다. 우리 사회의 자살률이 OECD 국가들 중에서 1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자체로 사회문제이다. 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사회학적인 관심이 특별히 요구된다. 이 사건들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삶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경종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들을 사회적 타살로 규정하면서 두 가지를 주장하고자 한다. 하나는 이런 사건들이 일어날 개연성을 높이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한 다른 하나는 이 죽음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주체와 제도들은 곧바로 고쳐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막연히 ‘사회적’ ‘구조적’ 이런 단어 뒤에 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문성훈 (2005) ‘노동운동의 이념적 자기반성을 위하여: 1987년 노동자 대 투쟁은 ‘인정투쟁’이다‘ 시대와 철학 제16권 3호

지그문트 바우만 (2008) 정일준 옮김, 『쓰레기가 되는 삶들』, 새물결.

Fraser, Nancy and Axel Honneth (2003) Redistribution or Recognition: A Political-Philosophical Exchange, Verso. 김원식․문성훈 옮김 (2014) 『분배냐, 인정이냐』사월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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