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센터(종료) 미분류 1999-04-15   741

[06호]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중시되는 기술정치 (2)

민주적 설계기준 對 진보파의 제안들

위에서 든 몇몇 예들은 "붕괴하고 있는 미국의 기술적 하부구조(technological infrastructure)를 재건"하자는 정치적 진보파들의 귀에 익은 요청에 중요한 결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1 만약 우리의 기술적 하부구조를 복구하거나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면, 지역의 민주적 자치에 보다 적합한 방식으로 그것을 재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산업쓰레기나 도시쓰레기를 관리하고 에너지를 보존하는 방법들 중에는 광범한 지역적 참여에 의해 전개되고 운영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2 그리고 가정이나 건물의 난방을 위해 태양에너지를 저장하는 설비가 현재 스칸디나비아에서 개척되고 있는데, 이 또한 구역 규모(neighborhood-scale) 기술의 또다른 사례가 된다. 강조하건대, 만약 지역(locality)들이 그들 자신의 하부구조에 대해 더 많은 통제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강한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풀뿌리 정치참여에 대한 유인(誘引)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요한 지역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지역정치에 참여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제시된 기준들이 지니는 또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이 기준들이 [하나의 기술이 아닌] 기술 질서 전체에 대해 적용되는 것이며, 또한 기준들 각각이 상호보완적인 체계를 이루어 함께 작동하도록 고안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 역시 진보파들이 옹호해 온 기술정책의 문제점들을 개선할 수 있다. 예컨대 작업장 민주주의의 주창자들은 기준 A와 B를 훌륭하게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그 결과 나타난 상품이나 서비스가 사회적으로 무해한(benign) 것인지를 따져묻는 일을 대체로 소홀히 한다.3 만약 우리가 민주적으로 의심스러운(democratically dubious) 기술들 ― 예컨대 화학무기나, 사회적 상호작용과 연대를 침식할 수 있는 워크맨 같은 특정 가전제품들 ― 을 경쟁적으로, 또 민주적으로 생산해 낸다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진보를 이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4

마찬가지로, 산성비나 성층권의 오존층 고갈, 지구온난화 등에 대해 대중의 관심이 점증하고 있는 현 시기에 있어, 그 누구도 생태적으로 좀더 지탱가능한 기술들을 고안할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준 G). 그러나 환경운동가들은 종종 기술 설계가 근거해야 하는 원리로 지탱가능성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5 이러한 사고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알고 싶다면, 과거의 중앙집중화된 하수처리 시스템이 공공 보건을 향상시키면서 동시에 지역적 자치를 파괴한 사례를 떠올려 보거나, 상대적으로 엄격한 환경정책이 가혹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와 결합되어 있는 싱가폴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6 기술을 평가함에 있어 우리는 모든 기술들을 고려에 넣어야 하며, 그것들의 모든 주요한(focal) 효과와 부차적인(nonfocal) 효과들을 생각해야 하고, 기술이 정치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모든 방식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민주적 기술정치를 향하여

민주적 설계기준들은 민주적 기술정치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민주적 설계기준들이 기술관련 의사결정의 모든 영역에서 대중의 더 많은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들과 결합되었을 때만 그러할 것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함의가 도출된다: 즉, 민주적인 설계기준들에 대해 (공동체, 작업장, 그리고 다른 사회영역들에서) 논쟁하고 이를 적용하며, 연구개발(R&D)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중요한 기술시스템들을 통제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 대중의 참여를 위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R&D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민주적인 과정을 도입하거나 민주적 설계기준을 이용할 때 그 기업의 R&D에 대한 세금공제 혜택을 확대하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근본적인 목표는, 관련된 정부기관들을 개방시켜 민주화하고 그것의 권한을 부분적으로 분산시키는 것, 기업의 R&D와 전략적 계획(strategic planning)에 노동자들과 지역공동체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창출하는 것, 그리고 기술이 가져오는 정치적·사회적 결과들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경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공공기관들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 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치적 전략들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이미 존재하는 대중운동들과 기술적 자원(technological initiative)들에 근거하여 건설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7

기술관련 의사결정을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와 관련된 하나의 예는 1970년대 초, 대단히 춥고 외진 캐나다 북서쪽 오지의 땅 밑에서 천연가스가 발견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에너지 회사들은 수천 마일에 달하는 고압 저온의 수송관로를 황야를 가로질러 건설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는데, 이곳은 전통적으로 이뉴잇 족(에스키모)을 비롯한 다양한 인디언 부족들이 생활해 온 터전이었다. 이 시점에서 정부는 중대한 환경적·사회적 영향이 나타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존경받던 대법원 판사인 토머스 버거(Thomas R. Berger)의 지휘하에 공개적인 조사 작업을 시작했다.

맥켄지 계곡 수송관로 조사단(MacKenzie Valley Pipeline Inquiry)은 예비 청문회를 열어, 에너지 회사측의 제안에 의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는다고 느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이를 모든 캐나다 사람들에게 개방했다. 버거와 조사단 실무자들은 철저하고 개방적이며 접근하기 쉬운 조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개발했다. 공식적으로 열린 준(準)사법적 청문회에서는 통상적인 전문가 증언에서 반대 심문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버거는 또한 일련의 비공식적인 "공동체 청문회(community hearing)"들을 개최했다. 맥켄지 조사단은 17000마일을 여행하면서 35개의 외진 마을과 정착지들에 들러 1000명에 달하는 토착민들로부터 증언을 수집했다. 그리고 조사단은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처한 집단들이 보다 나은 여건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여비와 법적 조언을 제공하였다. 캐나다 방송 회사(Canada Broadcasting Company)는 모든 청문회의 내용을 요약하여 매일 라디오를 통해 영어와 여섯 가지 토착어로 방송하였다.

맥켄지 조사단의 경험에서 얻은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일반인들이 유용한 사회적 정보뿐만 아니라 기술적 정보까지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술적 조언을 제공했던 한 전문가의 말을 들어 보자:

기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얻은 정보는 조사단이 고도로 기술적이고 전문화된 과학과 공학적 주제들에 대해 토의하는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 [최종보고서에서는] 보퍼트 해(Beaufort Sea)의 생물학적 취약성에 대해 언급함에 있어 고도로 훈련된 생물학 전문가가 공식 청문회에서 제출한 증거뿐만 아니라 공동체 청문회에서 증언한 이뉴잇 족 사냥꾼들의 관점에도 의존하고 있다. . . [뿐만 아니라,] 토론이 사회적·경제적 영향에 관한 복잡한 사회경제적 쟁점들과 토착민들의 토지에 대한 보상 청구, 지역 사업과의 관련 등의 주제로 넘어가자, 그런 쟁점들과 부대끼면서 평소에 살아 온 사람들이 모든 측면에서 전문가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 . 그들의 인식은 영향 평가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바로 그런 유형의 정보들을 제공해 주었다.8

전문가들과 시민들의 증언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인용한 버거의 최종보고서는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보고서가 출판되고 나서 몇 달 후, 애초의 수송관로 계획안은 기각되었고 그 대신 캐나다 의회는 기존의 알래스카 간선도로와 나란히 뻗은 대안적인 경로를 승인했다.9 혹자는 맥켄지 조사단에 대해서, 수송관로 계획에 의해 영향을 받는 토착민 집단들이 최종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기보다는, 단 한 사람 ― 버거 판사 ― 의 민주적 감수성과 훌륭한 신념에만 너무 많이 의존하지 않았느냐고 흠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이 다른 산업사회에서의 유사한 의사결정 노력들에 비해 보았을 때 훨씬 더 개방적이고 평등한 것이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10

기술관련 의사결정에서 더 많은 대중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나 과정들의 원형(prototype)은 이 외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최근 생겨난 '공동체 보건 의사결정(Community Health Decisions, CHD)' 운동은 의료정책 및 기술을 좌우하는 윤리적 원리들에 관한 광범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대중들에 기반한 절차들을 개발해 왔다. 이 운동의 성과들 가운데 하나는, 오레건 주 전역에 걸쳐 수십 개의 공동체 모임을 조직하여 주 보건 체계 개혁안에 대해 논쟁을 벌여 왔다는 것이다.11 CHD 운동은 앞으로 시민들이 보다 일반적인 기술의 민주적 설계기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토론의 장을 마련함에 있어 하나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메인 주, 워싱턴 주, 캘리포니아 주를 비롯한 몇몇 주들에서는 반전활동가들, 노동조합들, 기업 대표들, 지역운동 단체들, 정부 관리들 등이 연합해서, 지역 경제를 군사적 생산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민주적 과정을 창출해 왔다. 예를 들어 워싱턴 주는 기층으로부터의 압력에 대응하여 시민자문집단(citizen advisory group)을 새로 설치하였는데, 이 집단은 주의 군사적 지출을 모니터링하고, 탈냉전기의 경제적 필요와 기회를 평가하고, 국방지출에 의존하고 있는 지역공동체들이 생산기반을 다양화할 수 있도록 돕는 행동 계획을 공포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12 이는 하나의 지역이 기술 질서 전체를 평가하고 다시 방향짓는 데 있어 어떻게 사회적 기준을 이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지난 20년 동안 네덜란드에서는 거리 모퉁이에 자리한 "과학상점(science shops)"의 네트워크가 발전해 왔다. 이 과학상점들은 인접한 대학의 스탭과 학생들에 의해 지원을 받는데, 여기서 시민단체들은 기술적 요소를 내포한 사회적 이슈들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무료로 조력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한 과학상점은 지역의 환경운동단체가 채소의 중금속오염 실태를 자세하게 알려내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이는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하여 금속가공 공장에서 대규모의 정화(clean-up) 작업을 지원하도록 했다. 과학상점은 기술관련 의사결정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일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해내었고, 이는 서유럽의 많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유사한 노력을 하도록 추동하고 있다.13

기술적으로 단순하거나 낙후된 것으로 종종 잘못 인지되어 왔던 전통적인 애미쉬(Amish) 공동체들은 [그들이 도입하고자 하는] 기술들을 그 누적적인 사회적 효과들에 근거해서 [사전에] 검사하는 대중적 숙고 과정을 개척해 왔는데, 이는 표 1에서 제시된 기준들 중 많은 것들을 만족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들 중 한 가지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때 그것이 갖는 사회적 효과들이 어떤 것일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1년간의 유예(probation) 기간을 두는 것이다. 예컨대 일리노이 주 중동부에 위치한 애미쉬 낙농공동체들은 디젤로 가동되는 대용적 우유탱크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인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1년간의 시험 기간을 두었다; 그리고 다른 애미쉬 공동체들은 한때 유예 대상이었던 가정의 전화나 개인용 컴퓨터를 금지하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사회적 시험 결과를 이용했다.14

위에서 제시한 사례들은 물론 전형적인 것들은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술적 선택들은 전문가들이나 관료적 협잡, 혹은 규제되지 않은 시장에서의 상호작용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들의 존재는 만약 적절한 제도적 환경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일반 시민들이 그들 자신의 우선순위를 반영하여 합리적인 기술관련 결정들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심지어 기술영향평가국(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이나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국립보건연구소(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와 같은 연방기구들도 종종 자신들의 의사결정 과정에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지원하거나 포함시키고 있다.15 예를 들어, NIH는 연구계획서를 평가하는 데 있어 전문가와 일반인 자문 패널을 모두 두고 있다. 전문가들은 연구의 과학적 장점들을 평가하고, 일반인들은 사회적 가치나 정치적 의미, 윤리적 타당성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돕는다. 이러한 모형을 이용해 기술의 선택 과정을 위한 새로운 민주적 절차 체계를 개발하는 광범한 민간·공공기관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여적 연구개발과 설계

기술의 선택과 감시를 위한 민주적 과정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참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광범한 영역의 대안적 기술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노력은 헛된 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기술적 연구개발과 설계(research, development, and design, RD&D)의 구조 그 자체에 민주주의를 짜넣는 일이 필수적이다.16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 네 가지 예를 보도록 하자.

작업장 기술의 민주적 설계

스칸디나비아에서는 1980년대 초에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신문 그래픽 노동자들이, 취지에 공감하는 대학의 공학연구자들과 스웨덴 정부의 연구소, 국영 출판회사 등과 협력하여 당시로서는 유일무이했던 특정한 형태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신문의 지면배정(layout)이 규격화·기계화되어 가던 당시의 경향에 따르지 않고, 나중에 탁상 출판 프로그램에서 구현되는 몇몇 기능들을 선구적으로 고안해서 인쇄공들과 그래픽 담당자들이 페이지 디자인을 할 때 상당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17 UTOPIA라는 약자로 알려진 이 프로젝트는, RD&D 과정에 대한 확장된 참여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조건 중 하나인 창조적 노동(기준 B)을 뒷받침하는 설계상의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UTOPIA는 작업장 내에서의 참여설계를 추진한 몇몇 다른 사례들보다 덜 야심적이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영국 루카스 항공사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노동과정을 민주화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다 유용한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추구하였다.18 그러나 UTOPIA는 노동자들이 단순히 시제품을 개발하는 수준을 넘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또한 노동자들과 기술전문가들이 서로 협력한 이러한 사례 ― 최초에는 한 분야의 산업 내에서 한 종류의 기술만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 가 사회·정치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조건들 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스웨덴의 노동자들은 85%가 노조로 조직되어 있고, 노동자친화적인 사회민주당이 지난 50년 동안 사실상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있었다.

참여적 건축

기계류나 가전제품, 기술적 하부구조 등의 참여설계 사례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건축설계 영역에 대한 시민참여의 경우에는 풍부한 전사(前史)가 있다. 하나의 예로, 브뤼셀의 뤼뱅 의과대학 내의 카톨릭 대학(Catholic University of Louvain Medical School) 구내에 설치되었던 "사회적 구역(Zone Sociale)"을 들 수 있겠다. 1969년에 학생들은 인근 병원 건물이 환자들에게 주는 소외의 경험을 지적하면서 새로 지을 대학 건물들은 이런 경험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축가인 뤼시엥 크롤(Lucien Kroll)은 이를 위해 개방적인 참여설계 과정을 만들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정교한 유기적 건축형태(예컨대, 비틀어진 나무줄기처럼 생긴 받침기둥)와 대단히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상호작용(예컨대, 행정사무소와 술집 근처에 위치한 간호대학)을 이끌어내었고, 보행자 길과 정원, 공공 공간들로 구성된 치밀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려 하였다. 건물들의 벽과 바닥은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학생들이 자신의 생활공간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었다. 건설노동자들에게는 최종설계도 대신 설계의 원칙과 제약조건만을 주고, 이들이 나름대로 조각 형태를 만들어 전시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건축 엔지니어들은 처음에 자발성과 장난스러움의 정도에 당혹감을 나타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유능한 참여자들이 지닌 다양성에 그들 자신을 적응시켜 나갔다.

이 모든 과정은 몇 년 동안 훌륭하게 진행되었다 ― 대학당국이 건설과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기 이전까지는. 방학 때 학생들이 학교를 비운 틈을 타서, 학교당국은 크롤을 해고하고 더 이상의 건설을 막았다.19

페미니즘적 설계

만일 여성이 RD&D에서 현재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여성들의 사회적 고립감을 강화하고 가정주부로서 여성이 갖는 무급(無給)의 낮은 지위를 온존시키는 주택 설계와 도시 계획(urban layout)을 그 동안 줄기차게 비판해 왔던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20 만약 여성들이 공동체 설계 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면, 육아, 세탁, 취사를 위한 공용의 구역 시설들을 확충하고 가정과 직장, 상가, 공공 시설 등이 서로 가까이 한자리에 모여 있도록 배치했을 것이다. 이러한 페미니즘적 설계는 런던, 스톡홀름,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Providence, Rhode Island) 등의 지역에서 실제로 현실화되었다.21

또다른 접근은 미술가이자 한때 혹사당해 온 어머니(former overworked mother)였던 프랜시스 가베(Frances GABe)에 의해 개척되었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에 걸쳐 저절로 청소되는 주택을 발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잔 찜머만(Jan Zimmerman)의 묘사에 따르면, "가베의 집에서는 접시가 찬장 속에서 세척되고, 옷은 옷장 속에서 세탁되며, 집의 다른 부분은 습기를 뿜은 후 더운 공기로 말림으로써 깨끗하게 청소된다!"22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위한 컴퓨터 네트워크를 설립하는 한편으로, 여성들의 지긋지긋한 사무노동과 여성들의 필요에 둔감한 교통 네트워크에 대한 대안을 설계해 왔다.23 현재의 생식기술 ― 불임 시술들, 대리모, 자궁 척출, 낙태 등과 같은 ― 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요한 불만은 여성들이 의학적 RD&D의 의제를 설정하는 데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학적 RD&D의 결과로, 피할 수 있었거나 다른 식으로 구조화될 수도 있었을 골치아픈 도덕적 딜레마들이 여성들에게 덮어씌워지고 있는데도 말이다.24

장벽없는(barrier-free) 설계

지난 20년 동안,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고려하여 "장벽없는" 설비나 건물, 공공 공간을 설계하는 데 있어 상당한 혁신이 있었다. 이런 변화를 추동한 동력의 많은 부분은 신체장애를 지닌 시민들 자체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자신들의 필요를 내세우고 설계상의 해법을 발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쇄된 텍스트를 컴퓨터 합성된 목소리로 크게 읽어 주는 쿠르쯔바일 독서기(Kurzweil Reading Machine)는 150명이 넘는 시각장애자들에 의해 테스트를 받았다. 18개월에 걸친 시험 기간 동안 이 시험사용자들은 100개 이상의 제안을 내놓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만들어진 이 기기의 개량형 속에 통합되었다.25

대중에 의한 기술

이러한 모든 참여설계의 사례들은,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기술적 연구개발과 설계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26 뿐만 아니라, 참여설계는 기술적 선택의 폭을 넓혀 준다. 그러나 많은 참여설계의 실천들은 권력을 가진 기관들로부터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해 온 것도 사실이다 ― 이 반발은 참여설계의 실천들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참여적 RD&D의 몇몇 주창자들은 비참여자들의 물질적 이해관계라는 견지[즉,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인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하는 것 ― 역주]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설명하려 시도해 왔다. 다른 이들은 참여가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더 나은 설계 결과를 얻어내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적절하고도 합리적인 주장들이다. 그러나 RD&D에 참여할 기회가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민주적인 자치에 있어 핵심적이기 때문에, 그 기회를 갖는 것이 일종의 권리의 문제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특정한 윤리적 주장은 그동안 분명하게 표현된 적이 거의 없었다.

참여설계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강력한 윤리적 사례는 장벽없는 설계를 줄곧 요구해 온 신체장애인들의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운동의 성과는 이제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곳곳에 설치된 경사로들과 개조된 휴게실을 공공 공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으며(기준 C에 대응), 1990년의 신체장애인 보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하에서 새로운 규제 조항들이 공포되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운동은 단지 반민주적인 설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희망에 찬 핵심을 내포하고 있다. 시장논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민주적 설계 기준들 ― 종종 신체장애가 있는 일반인들에 의해 정식화되고 적용되었던 ― 은 이제 개인적·집단적 필요(예컨대 공공 공간들에 대한 접근)를 정의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참여자들은 한번에 단지 하나의 기술만을 평가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 이것이 통상적인 기술영향평가의 규범이다 ― 기술적 환경과 건축 환경 전체를 평가한다. 앞으로 민주적 기준의 범위가 넓어지고 참여자들이 신체장애인들 집단을 넘어 확장될 때,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이 민주주의와 양립가능함을 확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론

현재의 기술질서들은 일반적으로 공동체적 혹은 협동적인 활동을 결여하고 있으며, 소외와 권위주의를 강화시킨다(기준 A의 위배). 노동은 종종 공허하고 지긋지긋하며 도덕적 성장과 정치적 능력을 손상시키는 경향을 갖는다(기준 B의 위배). 권력의 정당하지 못한 불균형은 기술적 수단을 통해 재생산된다(기준 C의 위배).

활기찬 시민 생활에 참여할 기회는 종종 쇼핑 몰, 교외의 세분화, 무제약적인 자동차 보급, 가정용 오락 기기의 폭발적인 확산 등에 의해 애초부터 배제된다. 그 결과 우리는 보다 넓은 사회 속에서의 민주적 권한 부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지역적 매개 조직이나 공공 공간들에의 접근을 감소시켜 왔다(기준 A와 F의 위배).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해악들을 관리할 필요에 더해, 중앙관리 기술시스템들에 대한 광범한 의존과 전지구적 경제 속으로의 점증하는 통합 경향은 지역 정부들을 상대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였고, 이는 다시 사람들을 [지역 정치에의] 참여로 끌어들이는 유인(誘因)을 감소시켰다(기준 D, E, F의 위배). 한편, 국가 전체의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데 있어서도 앞서의 [지역 정치에서의] 손실을 보상할 만한 유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국가 정치에의 참여를 수동적인 방관자가 즐기는 스포츠로 바꾸어 버렸고, 그 결과 강력한 거대기업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사회구조를 문제삼는 심각한 질문들은 약화되었고 평균적인 시민은 기껏해야 미미한 영향만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구조적 결함들로부터 다른 사회악들로 이어지는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적 유대의 약화와 지역의 정치적 능력의 위축, 권위적이고 격하된 노동과정이 문맹, 스트레스, 질병, 이혼율, 십대 임신, 범죄, 약물 남용, 정신적 장애 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는 거의 상상하기 힘들어 보인다. 아마도 토크빌이 예견한 바대로, 우리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도 종종 편협한 이기주의 속에 갇혀 우리 존재의 절반을 강탈당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엄청난 공허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진보파의 기술전략가들은 하나의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국가경쟁력과 같은 지배적인 경제적 목표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단기적인 승리를 얻어내려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이상에 걸맞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수파의 정책과 다를 바 없이 국가적인 경제적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해 지금껏 제안되어 온 진보파의 정책들이 미국 사회의 가장 중대한 사회적·정치적 병폐들을 악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더 이상 가장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제 민주적 기술정치를 위해 행동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 아닐까?

* 출전: Richard Sclove, "Technology Politics As If Democracy Really Mattered: Choices Confronting Progressives," Michael Shuman and Julia Sweig (eds.), Technology for the Common Good (Washington, DC: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1993). [Reprinted in Albert H. Teich (ed.), Technology and the Future, 7th ed.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7), pp. 223-245.]

* 후주

1. 예컨대 Bowles et al., Beyond the Wasteland; Yudken and Black, "Targeting National Needs", 그리고 Robert B. Reich, "The Real Economy," Atlantic Monthly, 267:2, February 1991, pp. 35 52을 보라.

2. Amory B. Lovins, Soft Energy Paths: Toward a Durable Peace (Cambridge, MA: Ballinger, 1977); National Center for Appropriate Technology, Wastes to Resources: Appropriate Technologies for Sewage Treatment and Conversion, DOE/CE/15095-2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July 1983); Ken Darrow and Mike Saxenian, Appropriate Technology Sourcebook: A Guide to Practical Books for Village and Small Community Technology (Stanford, CA: Volunteers in Asia, 1986); Valjean McLenighan, Sustainable Manufacturing: Saving Jobs, Saving the Environment (Chicago: Center for Neighborhood Technology, 1990).

3. 예컨대, Michael J. Piore and Charles F. Sabel, The Second Industrial Devide: Possibilities for Prosperity (New York: Basic Books, 1984); Cohen and Zysman, Manufacturing Matters을 보라.

4. 이후에 많은 영향을 미친 데이비드 노블(David F. Noble)의 논문 "Social Choice in Machine Design: The Case of Automatically Controlled Machine Tools," in Case Studies on the Labor Process, ed. Andrew Zimbalist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9), pp. 18 50[국역: [기계 설계에 있어서 사회적 선택 ― 수치제어 공작기계의 경우], 송성수 편역,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녹두, 1995), pp. 199 236]에서는 작업자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유지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공장노동자들이 기술의 선택에 참여한 노르웨이의 사례를 긍정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물론 옳은 얘기지만, 문제의 공장은 국가 소유의 무기제조 공장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5. 예컨대 John Todd and Nancy Jack Todd, Bioshelters, Ocean Arks, City Farming: Ecology as the Basis of Design (San Francisco: Sierra Club Books, 1984)를 보라.

6. Susan Sesser, "A Reporter at Large: A Nation of Contradictions," The New Yorker, 13 January 1992, pp. 37 68.

7. Richard E. Sclove, "The Nuts and Bolts of Democracy: Toward a Democratic Politics of Technological Design," in Critical Perspectives on Non-Academic Science and Engineering, ed. Paul T. Durbin (Bethlehem, PA: Lehigh University Press, 1991), pp. 239 262; 그리고 Sclove, Technology and Freedom을 보라.

8. D.J. Gamble, "The Berger Inquiry: An Impact Assessment Process," Science, 199:4332 (3 March 1978), pp. 950 51.

9. Ibid., pp. 946 52; Thomas R. Berger, Northern Frontier, Northern Homeland: The Report of the MacKenzie Valley Pipeline Inquiry, 2 vols. (Ottawa: Minister of Supply and Services, Canada, 1977);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Technology on Trial: Public Participation in Decision-Making Related to Science and Technology (Paris: OECD, 1979).

10. 예컨대, Barry M. Casper and Paul David Wellstone, Powerline: The First Battle of America's Energy War (Amhers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81); David Dickson, The New Politics of Scienc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를 보라.

11. Bruce Jennings et al., "Grassroots Bioethics Revisited: Health Care Priorities and Community Values," Hastings Center Report, 20:5 (September/October, 1990), pp. 16-23.

12. Kevin S. Cassidy, "Defense Conversion: Economic Planning and Democratic Participation,"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17:3 (Summer 1992), pp. 334 48.

13. Seth Shulman, "Mr. Wizard's Wetenschapswinkel," Technology Review, 91:5 (July 1988), pp. 8 9.

14. 애미쉬 공동체의 기술관련 의사결정에 관해서는, 예컨대 다음을 보라. Marc A. Olshan, "Modernity, the Folk Society, and the Old Order Amish: An Alternative Interpretation," Rural Sociology, 46:2 (Summer 1981), pp. 297 309; Victor Stoltzfus, "Amish Agriculture: Adaptive Strategies for Economic Survival of Community Life," Rural Sociology, 38:2 (Fall 1973), pp. 196 206; Kraybill, The Riddle of Amish Culture.

15. 예컨대 U.S. Congress, 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 Coastal Effects of Offshore Energy Systems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6); Rachelle Hollander, "Institutionalizing Public Service Science: Its Perils and Promise," in Citizen Participation in Science Policy, ed. James C. Petersen (Amhers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84), pp. 75 95을 보라.

16. 참여설계를 뒷받침하는 추가적인 논증에 대해서는 Richard E. Sclove, "The Nuts and Bolts of Democracy: Democratic Theory and Technological Design," in Democracy in a Technological Society, ed. Langdon Winner (Dordrecht: Kluwer Academic Publisher, 1992), pp. 139 157.

17. Andrew Martin, "Unions, the Quality of Work, and Technological Change in Sweden," in Worker Participation and the Politics of Reform, ed. Carmen Sirianni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87), pp. 95 139.

18. Hilary Wainwright and Dave Elliot, The Lucas Plan: A New Trade Unionism in the Making? (London: Allison and Busby, 1982).

19. Lucien Kroll, "Anarchitecture," in The Scope of Social Architecture, ed. Richard C. Hatch (New York: Van Nostrand Reinhold, 1984), pp. 166 85.

20. Hayden, Redesigning the American Dream, Chapter 4.

21. Ibid., pp. 163 70.

22. Jan Zimmerman, Once Upon the Future: A Woman's Guide to Tomorrow's Technology (New York: Pandora, 1986), pp. 36 7.

23. Wright, Women, Work, and Technology; Kramarae, Technology and Women's Voices.

24. Sarah Franklin and Maureen McNeil, "Reproductive Futures: Recent Literature and Current Feminist Debates on Reproductive Technologies," Feminist Studies, 14:3 (Fall 1988), pp. 545 60을 보라.

25. Michael Hingson, "The Computer Testing Project for the Kurzweil Reading Machine for the Blind," pp. 89 90, 그리고 Raymond Kurzweil, "The Development of the Kurzweil Reading Machine," pp. 94 96, in Virginia W. Stern and Martha Ross Redden, eds., Technology for Independent Living: Proceedings of the 1980 Workshops on Science and Technology for the Handicapped (Washington, DC: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1982)를 보라.

26. 더 많은 추가적인 사례들을 알고 싶다면, Sclove, "The Nuts and Bolts of Democracy: Towards a Democratic Politics of Technological Design"을 보거나 로카 연구소로 연락하기 바란다. 연락처는 다음과 같다: Loka Institute, P.O. Box 355, Amherst, MA 01004, U.S.A.; e-mail: loka@amhers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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