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센터(종료) 미분류 1999-04-15   511

[06호] 일상 속의 과학기술

과학기술의 일상성, 그 함의 – 자판기 이야기

필자의 연구실이 있는 건물은 오후 6시가 넘으면 출입문을 모두 잠근다. 그래서 그 이후에 출입할 때에는 옆 건물로 구름다리를 타고 넘어가서 그곳의 출입문을 이용해야 하는데, 거기 출입문 바로 앞에 커피자판기가 한 대 있다. 필자도 밤늦게 내려갈 때면 그 자판기를 종종 애용하곤 한다. 그곳에 원래 있던 자판기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판기로, 앞에 커피 종류를 선택하는 버튼이 네 개, 그 옆에는 국산차와 우유를 선택할 수 있는 버튼이 두 개, 모두 6개의 버튼이 달려 있는 종류였다.

이 자판기에는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역시 아주 흔한 일이지만, 선택 버튼을 누르면 종종 컵이 걸려서 안나오고 커피만 주르륵 나오고 마는 것이었다. 자판기 고장도 종류가 여러 가지―동전을 꿀꺽 하고 삼키는 경우, 커피가 나오기는 나오되 아주 묽은, 마치 프림하고 설탕만 넣은 듯한 액체가 조금 나오는 경우 등등―지만, 컵은 안나오고 커피만 주르륵 흐르는 경우는 상당히 보기에 안타깝다. 어, 저거저거저거… 이러다가 그냥 못먹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간혹 그런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 자판기에는 그런 일이 상당히 자주 있었다. 그래서 필자와 같이 그 자판기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판기를 이용하는 '특별한' 방법(일종의 '생활의 지혜'?)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 방법은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을 때 컵이 나온 후 커피가 나오기까지의 사이에 약 1초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는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동전을 넣은 후 선택 버튼을 누르기 전에 주먹을 불끈 쥐고 허리를 굽혀 커피가 나오는 구멍을 들여다보는 포즈를 일단 취한다. 이 상태에서 버튼을 누르는데, 들여다보고 있다가 만약 제때 컵이 안나오면 잽싸게 자판기를 주먹으로 한방 갈긴다. 이 타이밍이 상당히 정확하면 커피를 먹을 수가 있었다. 때를 조금이라도 놓쳐 버리면 이미 커피는 흘러 버리고 난 다음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 자판기를 처음 써보는 소위 '초짜'들은 골탕을 상당히 많이 먹었다. 하지만 필자와 같이 그 자판기와 '공생관계'를 유지한 인간들도 꽤나 많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에는 새로운 변수가 하나 나타났다. 그 자판기가 최신형 자판기로 바뀐 것이었다. 새 자판기는 색깔이 베이지색 비슷한 색이 아니라 요즘 전철역에서 많이 보이는 빨간색인데, 버튼이 모두 12개가 달려 있어 가격이 좀더 비싼 고급 커피라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을 뿐 아니라 1000원짜리 지폐도 쓸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자판기를 한참동안 관찰하다 보니까 이 신형 자판기에는 새로운 기능이 하나 추가되어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앞 사람이 뽑은 음료와 다른 종류의 음료를 다음 사람이 뽑을 때에는 버튼을 누르면 컵이 나오기 전에 먼저 뜨거운 물이 조금 흘러나와서 음료가 나오는 출구를 세척한 후 컵과 음료가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그 시간간격이 약 3-4초 정도 된다). 반면 앞 사람도 커피를 뽑았는데 그다음 사람도 커피를 뽑는 경우에는 바로 컵이 나오고 음료가 나오는 식이다. 추측컨대, 이런저런 음료가 섞이면서 맛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장치를 한 것 같았다. 이건 분명히 이전 자판기에 비해 보았을 때에는 기술력이 좀더 향상된 것일 테고, 그런 면에서 기술발전의 개가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필자에게 더 흥미로왔던 것은, 그 사실을 알아챈 다음에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를 지켜보면서 알아낸 것이었다. 이전 자판기에 익숙했던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보면 처음에 바로 컵이 나오지 않고 출구세척용 더운물이 흘러나오면 컵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바로 자판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판기를 두들기면 약 3-4초 후에 컵이 나오면서 음료가 나오니까(물론 이 두 사건 간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그냥 과거와 같은 자판기 문제인가보다, 하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자질구레한 얘기를 했는지에 대해 의아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이러한 일상적 관찰을 토대로 나름대로 이끌어낸 '기술사회학적' 결론은 이렇다.

1. 기술(혹은 인공물)은 특정한 방향으로 사람들의 행위방식을 구조화한다. 첫번째 자판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방식이 그 예이다.

2. 기술을 개발하는 과학기술자들의 생각 혹은 전망은, 설사 그것이 선의를 가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의도했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시 국지적인(local) 맥락에 위치되어 변형되는 과정을 겪는다. 분명 기능이 '향상'된 두번째 자판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방식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 글은 방송대학보 1071호 (1998.11.30)에

실린 것을 옮겼습니다.

김명진 (학생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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