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센터(종료) 미분류 1999-07-15   2645

[08호] [기획번역] 과학은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녹색" 주장들이 사회적 주목을 받기 위해 여전히 분투하던 시절, 기성 과학자들은 폐기물의 해양 방출 혹은 방사능 유출의 허용과 같은 활동들이 "안전"하다고 자신있게 주장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은 과학과 과학이 기초하고 있는 데이터가 본질적인 불확실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불확실성이 무시되거나 경시되어 왔다는 점이었다.

환경운동가들에게 있어 성공적인 전략은 이처럼 드러나지 않은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불확실성의 폭로는 앞서 언급한 활동들의 근거를 필연적으로 약화시켰으며, 때로 지나친 안전성 주장들을 뒷받침했던 과학 단체들에 대한 폭넓은 신뢰를 감소시키기도 하였다. 한 예로, 이러한 전략은 80년대 초 방사성폐기물 방출에 반대하는 그린피스(Greenpeace)의 성공적 캠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환경운동가들이 "반(反)-과학적"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캠페인들은 과학에 내재하는 불확실성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대처해야 함을(즉, 보다 엄격한 과학을 ― 역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친(親)-과학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불확실성의 인정 혹은 비판에 대한 개방적 자세 등과 같은 좋은 과학(good science)의 필수적 측면을 경시했던, 폐기물 방출 찬성 로비의 입장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의 부족을 드러내는 데이터의 불확실성은 위험에 대한 "증거"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동등하게 활용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80년대 영국 정부와 중앙전기발전위원회(Central Electricity Generating Board)의 과학자들은,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던, 산성비에 관한 기존 과학적 데이터가 지나치게 불확실하다고 주장하면서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함을 요구하였다.

환경의 중요성이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오늘날이지만, 여전히 위험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부담은 환경운동가들에게 돌려지고 있다. 현재의 산업 활동이 위험을 야기할 '가능성'만으로는 "늘 하던 대로(business as usual)" 식의 태도를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환경운동, 과학자 그리고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UN 산하 전문가 패널 ― 역주) 전문가들간의 대립은 온실기체(greenhouse gas)가 기온 상승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지구온난화 모델의 기본 가정에 관한 것이 아니다. 논쟁은 위험이 어느 정도이며 이에 따르는 진지한 정책적 대응이 얼마나 절박한가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다. 그린피스 과학자 제레미 레겟(Jeremy Leggett)은 기후모델의 불확실성이 기후변화의 징후를 무시함에 따라 우리가 치러야 할, 전지구적 차원의 더 큰 잠재적 손실을 간과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난의 가능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산업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과학자들은 기후모델의 불확실성이 매우 크며 따라서 기후변화의 심각성이 훨씬 적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정책의 대폭적 변화라는, 비용이 비싸게 먹히는 행동을 취할 근거도 없다고 주장한다. 주류 과학자들의 견해는 이 상반된 두 견해들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쟁의 핵심은 과학적 불확실성과 이것이 정부 정책결정에서 어떻게 인지되고 해석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보인다. 여기서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이같은 과학적 모델 내의 그리고 이를 둘러싼 불확실성의 해석이 과학자들만이 관여해야 하는, 순수한 과학적 문제로 여겨져 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실상 사회적·정치적 함의가 스며들어 있는, 광범한 토론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모델의 기술적 세부사항과 한계는 과학자들에 의해 독점되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널리 정보가 제공되고 논의되어야만 한다. 환경적 위험에 관한 논의에서, 과학과 정책 사이에 명쾌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 불확실성이 서로 다른 과학적 해석들을 결과하는 유일한 요인인 것은 아니다. 무지(ignorance, 여기서는 비전문가 대중의 과학적 문맹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가 채택하고 있는 패러다임의 한계로 말미암아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 즉 '과학자의 무지'를 의미한다 ― 역주) 또한 이에 기여한다. 영국에서 이른바 "좋은 과학"의 문화는 이같은 무지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수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하게 구성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이는 다시 정책결정자들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환경보호에 대한 편견을 갖도록 하여 왔다.

과학적 불확실성과 무지를 구분하지 않는 치명적 혼돈이 기존의 사고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산업폐기물의 경우를 들어보자. 영국의 산업폐기물 정책은 "동화 접근(assimilative approach)"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즉, 생태계가 오염물질을 동화시킬 수 있는 수용력을 과학적으로 밝혀낸 후, "안전한" 한계 내에서 폐기물의 방출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환경운동은 이러한 접근을 비판해 왔는데, 이 접근은 인지된 가능한 환경적 영향들을 치사량이나 물고기에의 질병 유발과 같은 몇 가지 관찰 가능한 최종 결과로 환원시키고 이처럼 선택된 효과들과 주어진 화합물의 방출 사이에 인과관계의 사슬이 발견되는가를 질문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접근은 정책이 마치 과학적으로 명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이는 오직 다른 최종적 효과, 간접적 효과 그리고 화합물들간의 또는 화합물들과 다른 요인들간의 상호작용 등의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만 그러하다. 제한된 과학적 관점 내에서 불확실성을 확인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더 많은 ― 심지어는 적절한 조건과 변수가 채택되고 있는가에 대한 ― 불확실성들은 묻혀 버리게 된다. 이러한 폭넓은 불확실성들은 무지로 표현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불확실성들은 과학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이 50년대에 묘사했던 것처럼, 과학 활동은 개방성, 공명정대, 자기 비판 등의 원칙에 의거하리라 기대된다. 원칙적으로, 이같은 과학의 특성들은 불확실성을 폭넓게 인정하고 이에 대처하도록 고무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 이상을 상징하고 있을 뿐, 과학자들 스스로에 의해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는, 과학 연구의 모든 분야들은 특정한 기초적 방법, 모델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가정들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이들은 각 과학 분야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며, 그 자체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새로운 접근이나 주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즉 비판적 개방성과 도그마틱한 폐쇄성간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다. 때문에 "좋은 과학"으로 제도화되는 것은 지적 원칙의 결과물일 뿐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환경정책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쳐 온 지배적 과학 문화는 오직 관찰과 측정이 직접적으로 가능한 부분들이 중요하다는 확신 하에 대상을 가장 작은 구성요소들로 쪼개어 분석하는, 환원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는 종종 인과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요인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관점을 채택한다. 그 결과 몇몇 변수들 사이의 행동 상호관계(behavioural correlations)를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에 대한 고도의 통제를 갖춘 연구만이 "좋은 과학"으로 여겨진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환경정책에 대한 다른 접근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영국 고유의 과학정책 문화는 정책결정자들로 하여금 환경운동가들과 유럽의 정책결정자들에게 마치 자신들의 접근만이 "좋은"(실상은 환원주의적인) 과학에 근거하고 있으며 유일한 길인 양 위압적 태도를 보이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같은 태도는 영국에게 환경 후진국이라는 국제적 명성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수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청정기술 개발에서 뒤처지게끔 만들었다.

해양오염의 사례는 환원주의가 얼마나 한계를 갖는지를 잘 보여준다. 독일 해양학자 폴케르트 데트레브젠(Volkert Dethlevsen)의 북해 뱀장어 연구는 오염된 지역에서 잡힌 뱀장어의 혈액 시료 중 80%가 박테리아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 오염되지 않은 지역의 경우 시료의 4%만이 박테리아를 포함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당시 뱀장어에게서는 박테리아 수에 상응하는 종양 등의 기능 장애가 관측되지 않았다. 즉, 뱀장어의 건강상태와 해양오염간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높은 수의 박테리아는 손상된 면역체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이러한 손상은 장기적으로, 설사 최종 단계가 자연적 요인이나 기타 다른 요인에 의해 촉발된다 하더라도, 종양 형성이나 여타 기능 장애의 전조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간접적 혹은 다중적 인과관계는 이른바 "좋은 과학"의 환원주의적 관점으로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좋은 과학"은 생태계의 동화 능력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명확한 해답을 주려 할지는 몰라도, 마찬가지로 이용 가능한 증거에 기초하고 있는 보다 풍부한 형태의 추론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과학을 어떻게 파악하고 활용하는가에 있어 몇몇 국가들이 나타내는 차이점들은 머튼이 제시한 원칙들에 부응하는 다른 종류의 "좋은 과학"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독일 과학자들은 영국 과학자들에 비해 유기체 면역체계의 건강상태, 스트레스 및 질병과 같이 본질적으로 덜 명확하고 덜 환원주의적인 다중적 상호작용과 복합적 변수들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독일 생태학자 진데르만(Sinderman)은 독자적 또는 복합적으로 해양 생물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서로 다른 18 가지의 자연적 혹은 인위적 요인들을 확인한 바 있다. 그는 "따라서 질병은 [이와 같은] 모든 종류의 스트레스에 대한, 특별히 지시되지 않은 반응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의학 분야에서는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으로, 독일과 다른 나라에서는 환경과학 정책에도 적용되고 있다. 물론 이들 나라에서조차,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 문화는 구성 변수들의 효과를 가능한 한 분화하고 정량화하려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나 면역능력과 같은 복합 변수의 복잡성을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가능한 상호작용 등의 보다 넓은 차원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환원주의는 영국 과학 전반에도 널리 퍼져 있다. 1992년 수상 자문기구인 과학기술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Science and Technology)의 조사팀은 (청정생산을 제외한) 영국의 환경관련 연구개발에 대해 보고서를 출간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연구개발 중 물리학에 기반한 분야가 46%의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34%의 비중을 차지하는 생물과학 분야 연구개발 중에서 2/3 이상이 실험실에 기반을 둔 분자생물학 분야였다는 점이다.

분자생물학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분야로서 점차 많은 산업적 응용이 소개되고 있다. 생산물의 환경적 영향이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좋은 과학"의 문화에 의해 재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이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는 몰라도, 환경정책의 차원에서는 이의 통제력과 정확성이야말로 바로 치명적 문제점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형질을 갖는 유전자변형 유기체(GMOs)가 개발되는 이면에는, 이의 환경방출이 어떠한 효과를 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기초적 이해조차 확립되지 않고 있다. 유전학의 환원주의적 논거에서는 전체 유기체의 성질조차 무지의 블랙홀인 것이다.

예방적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s)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와는 다른, 좋은 과학의 "보다 환경친화적(greener)"인 문화이다. 새로운 과학 문화는 환경을 보다 넓은 맥락에서 파악하는 생태학 등의 분야에 더욱 가치를 부여할 뿐 아니라 관찰의 유용성을 높이 평가하며, 결정적으로 무지의 인정을 통합하는 폭넓은 책임을 구체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같은 문화는 자연 과정에의 개입의 안전성에 관한 그릇된 가정들 ― 무지의 암묵적인 경시에서 비롯되는 ― 을 드러낼 것이며, 예방적 원칙의 현명한 활용과 협상을 통해 환경보호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방적 원칙은 대처방안이 준비되기 전에 환경 위해가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거증책임(burden of proof, 증거를 들어 논증해야 할 책임 ― 역주)은 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오염자에게로 이전되어야만 한다. 일부에서는 예방적 원칙이 "비과학적"이며 실행 불가능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같은 비판이 동등한 타당성을 지닌 채 "동화 접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측정 가능한 성질들 중 왜 특정한 것이 선택되는가에 대한 이유가 때로 확실하지 않다; 간접적 인과관계 그리고 요소들간 상호작용의 중요성이 원칙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이들은 쉽게 간과되거나 배제되고 있다.

어떤 과학적 방법도 인간이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하여, 해답은 고사하고, 필요한 모든 질문들을 제기할 수는 없다. 과학은 절대적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유연(soft)"하며, 그 결과는 언제나 다른 해석 앞에 열려 있다. 이와 같은 점은 환원주의에 반대하여 애쓰고 있는 환경친화적 과학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숙되고 합리적인 정책은, 사회로 하여금 과학 지식이 모든 불확실성을 다룰 수 있으며 또 그러고 있다고 맹신하도록 하기보다는, 과학 지식에 내재한 한계를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환경친화적 과학은 스스로의 한계를 명백히 밝혀야 하며, 경제적 필요성의 미명 아래 진행되고 있는 자연에의 개입에 대해 보다 비판적인 대중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지는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무지가 [과학 전반이 아니라] 특정 과학 분야에서 어떠한 함의를 갖는가에 대한 논의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GMOs의 환경방출을 조사하기 위한 야외 실험이 계획됨에 있어, 오직 관찰되는 변수와 효과들만이 중요하리라는 가정이 채택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예이다. 이러한 과학적 무지는 연구 결과가 정책결정의 근거로 활용될 때 특히 상황을 오도할 수 있다. GMOs의 경우, 야외 환경에서의 실험은 과학적으로 충분히 평가되고 안전하다고 판단된 경우에만 허용될 것이다. 그러나 정의상 이는 실험의 허용을 담당하는 자문위원회의 과학자들이 입수할 수 있는 현존 과학 지식 체계의 한계 내에서만 안전한 것이다.

현존하는 과학과 정책 기구들은 이처럼 명백한 한계에 대해 별다른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문화적 근시안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경제적 이해관계 집단은 기존의 접근을 가능한 유일한 근거로 삼고자 할 것이다. 바다나 강을 폐기물 처리의 값싼 수단쯤으로 여기는 화학산업이나 GMOs의 환경방출을 꾀하는 새로운 생명공학산업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접근의 철저하게 독단적인 성격은 과학이 개방적이고 자기비판적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과학은 스스로 안전성에 대해 명백한 증거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환경친화적인 과학은 환경 개입 이전에 확실성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과학 지식의 불확실성을 명백하게 밝히며, 특정한 기술적 선택의 잠재적 위험과 이익에 관하여 폭넓은 대중적 토론을 ― 현재와 같이 차단하기보다는 오히려 ― 장려할 것이다. 과학은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요인들에 대한 공개적 고려를 포함하는 토론 과정에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특정한 선택으로부터 득을 보는 이들 뿐 아니라 피해를 입는 이들에게도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현재 농약이나 GMOs 환경방출에 관한 자문위원회는 과학자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으며, 그것만으로 안전성에 대한 이들의 결정이 마치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것 같은 그릇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환경친화적 과학은 이와 같은 위원회들에 사회 내 다양한 부문의 대표가 포함되도록 할 것이다.

영국에서 현재 지배적인 형태의 과학은 실재하는 정치적 영향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종종 심각한 환경 위해를 자초하고 있다. 예산을 통제하는 이들이 특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면, 증거의 비교검토는 환경보호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심하게 편향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영국에서 핵 이슈에 대해 독립적인 과학적 견해를 구하기란 매우 어렵다. 명목상 독립적임을 주장하는 많은 과학자와 기관들이 핵산업에 의해 지원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는 불확실성과 무지에 대한 이들의 견해를 제한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과학적 이해를 제시함에 있어 이를 환경에 해로운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거증책임, 측정 혹은 분류와 같은 과학적 원칙들 내에 정당한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점, 그리고 불확실성이나 무지와 같은 한계가 [나쁜 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좋은 과학의 문화에도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의 의제는 환경보호의 원칙을 보다 확고하게 염두에 두고 광범하며 비판적인 공개적 토론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그 결과 연구의 우선순위는 폐기물처리 기술로부터 폐기물 삭감으로 또는 핵발전에서 재생가능 에너지와 에너지 보존으로 변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영국에게 혁신을 자극하는 추가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환경보호에 보다 전진적 자세를 취하는 나라들에게 너무나도 자주 내맡겨져 버린 경제적 이익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히 덜 환원주의적인 과학에 보다 많은 영향력을 부여하는 것으로는 근본적 문제를 다루기에 충분하지 않다. 과학이 정의되고 실행되는 제도적 맥락 역시 보다 환경친화적으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환경친화적 과학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의 확대는 물리적 환경이 위협받고 있다는 믿음 이상의 것에 의해 고취되어 왔다. 정책 문화(policy culture)가 점차 과학주의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그 중 하나이다: 인간과 사회의 경험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할 수 있는, 과학적 언어로 규정된 견해에만 신뢰를 보냄으로써 많은 대중들은 그로부터 소외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의 잘못 때문은 아니다; 이는 사회과학을 포함, 지배적이 되도록 허용되었던 과학의 형식과 연관되어 있다. 이같은 점에서 볼 때, 비판적 성찰과 공개적 토론을 결여하고 있는 한 과학주의의 성장으로부터 결백한 과학자들조차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보다 환경친화적" 과학의 핵심 쟁점은 사회의 새롭고 보다 지속가능한 경제적, 문화적 및 기술적 차원과 건설적으로 상호 작용할 수 있는, 과학의 새로운 제도적 그리고 지적 형태라 할 수 있다. 과학을 보다 넓은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이같은 시도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이는 아직까지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폭넓은 도전에 직면하여 과학에게 필수적이고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그러나 새롭게 정의된 역할을 부여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 출전: Brian Wynne and Sue Mayer, "How science fails the environment," New Scientist (June 5, 1993) pp. 33-35.

** 브라이언 윈 교수는 과학지식사회학, 환경사회학 및 위험사회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재료과학자 출신 사회학자이다. 현재 영국 랭카스터 대학 환경변화연구센터(Centre for the Study of Environmental Change)의 연구 책임자로 재직하고 있다. 수 메이어 박사는 수의학과 약학을 전공했으며, 그린피스 영국 지부 과학담당 책임자를 지낸 바 있다. 현재 유전공학의 위험과 윤리적 문제를 활동 대상으로 하는 시민단체 GeneWatch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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