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 정책의 방향

보건의료는 국민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수단이다. 건강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인권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우리 나라 헌법에서도 건강에 대해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한편 보건의료는 사회적 안전망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질병의 발생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이로 인하여 가정경제가 파탄되는 일이 많다. 더욱이 당면한 어려운 경제환경에서는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하다. 낮아진 수입, 노동조건의 악화, 대량 실업 상태에서 불의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을 돌아볼 때, 이것을 사회적 과제의 중요 부분으로 꼽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보건의료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에 막중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의료보험의 개혁

해결의 실마리는 우선적으로 의료보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의료보험이라고 어려운 경제사정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의보재정 상황 역시 아주 악화되어 있다. 결국 한정된 의료보험 재정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에 정책의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의료보험의 통합일원화는 이러한 노력에 꼭 필요한 필수적인 부분이다. 작년 10월 지역의료보험은 하나의 재원으로 통합이 되어 있으나, 직장의료보험은 아직도 145개의 조합으로 분리되어 있다. 내년 1월 "국민건강보험법"의 발효로 모든 직장의보조합과 공교보험의 재원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예정되어 있으며, 결국 내년에는 의료보험의 재정이 지역가입자와 직장가입자의 두 개 부분으로 정리되게 되며, 그 후 2년 이내에 두 재정은 다시 통합되도록 의 된다. 최근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여러 가지 악선전을 하고 있으나, 이는 국민들의 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한 의료보험의 개혁조치로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한정된 의료보험 재원은 꼭 필요한 의료서비스의 제공에 가용자원이 최대한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의보에는 이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보건의료서비스의 제공자가 행동하도록 하는 구조적인 요인이 많다. 현행 의보수가제도는 행위별수가제(fee-for-service)의 한 형태이다. 이 제도는 진료서비스의 양을 늘이면 늘일수록 병의원의 수입이 증가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필연적으로 공급자 유발 수요(supplier-induced demand)를 촉발하게 된다. 더욱이 현재의 의보수가체계는 진료수가 항목간의 수가 수준이 잘못 책정되어 있고, 의보약가 책정이 너무 높아 의약품 사용으로 큰 폭의 이익을 볼 수 있는 등의 문제들이 복합되어 행위별 수가제의 약점을 크게 증폭시키고 있다. 이는 결국 진료의 양을 늘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진료행위가 일어나게 함으로써 의보진료비 앙등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료보험의 통합일원화에 맞추어 의료보험 수가와 약가제도를 전면 개정하는 작업이 시급히 필요하다. 진료비 지불제도를 포괄수가제 등의 새로운 방법으로 개편해야 해야 한다.

그러나, 의료보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급여가 불완전하여 보험으로서의 보장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현재 본인부담은 전체 진료비의 52% 수준이며, 외래진료의 경우 70%, 입원진료의 경우 47%에 이르고 있다. 더욱이 본인부담 총액에 상한선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 의보 적용을 받은 후에도 가정경제가 큰 타격을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의료보험 급여 수준의 향상은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에 관건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의보급여 제한이 가지는 또 한가지 부정적 측면은 의료보험 재정지출을 줄이기 위한 급여제한이 역설적으로 총 국민의료비를 앙등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병의원들이 자의적으로 진료수가를 책정할 수 있는 비급여 의료서비스(예를 들어, 초음파, MRI 검사 등)의 제공을 늘림으로써 의료보험 밖에서 큰 규모의 의료비의 증가가 일어나게 된다. 보험급여의 확충이 지체됨으로써 발생하게 된 또 하나의 부작용은 소위 '임의 비급여'라는 '불법아닌 불법의료'의 사각지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 개발된 의료기술, 즉 새로운 치료기법, 진료재료 등이 한국에 도입되어 시행될 때 정부의 인정절차가 늦어지고 의료보험에 적용을 받지 못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환자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그 과도기간 동안 이들 의료행위를 시술하는 일 자체를 불법행위로 방치됨으로서 병원은 경영자료와 진료내역을 공개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는 길은 의료보험 급여를 획기적으로 확충하는 것이다. 이럴 때 의보재정의 효율화 부분에서 그 재원의 상당부분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의료보험료의 인상이 불가피해진다. 급여의 적정화는 필연적으로 부담의 적정화를 필요로 하고 이점에 대해 의료서비스의 제공자, 이용자, 그리고 의료보험이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이 앞으로 큰 과제의 하나가 될 것이다. 우선은 무엇보다도 지역가입자에 대한 국고지원을 1989년의 약속대로 50% 선으로 복구하는 것이 시급하고, 그 동안 조합주의 상태에서 만연하였던 "부유층-저부담, 빈곤층-고부담"의 보험료 역진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

보건의료서비스 제공체계의 개혁

의료보험은 사회보장의 일부분이지만, 보건의료체계의 측면에서 보면 보건의료 재정기전의 일부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의료보험은 국민들에게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이다. 보건의료의 제공이 목표로 하는 것은 국민 건강의 유지와 향상이며, 모든 국민들이 포괄적(comprehensive)이고 질적(quality) 수준이 높은 보건의료서비스를 지속성(continuity)을 가지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 제공받을 수 있을 때, 그리고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가면서 이것이 가능할 때에 그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된다.

국민들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보건의료 요구(needs)는 성별, 연령별, 질병상태의 유무 등에 의해 변화하며, 이 변화하는 요구를 건강증진, 예방, 치료, 재활의 모든 차원에서 충족시킬 수 있을 때 보건의료서비스의 포괄성은 담보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보건의료서비스 구성은 '신체적' 증상에 대한 '치료적' 서비스의 제공에 치우쳐 있다.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미충족 요구(unmet needs)가 존재한다. 이것은 보건의료 제공자의 압도적 다수가 민간 부문에 속해 있고, 의보 급여의 내용이 치료서비스에 치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공공보건부문의 대폭적인 강화와 의보급여를 더욱 포괄적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후자는 '건강'보험의 실시로 돌파구를 열 수 있게 되었으며 급여확대의 노력에 포괄성 추구의 지향을 가짐으로써 가능해 질 것이다. 공공의 강화는 우선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흩어져 있는 공공보건의료 기능을 종합 조정하는 역할을 보건복지부에 부여하고 각 지방자치단체의 보건 기능이 활성화되도록 함으로써, 더 나가서는 공공 부문의 비중을 높여 나감으로써 가능해 질 수 있다. 공공부문의 강화 뿐 아니라 민간부문의 공공성이 강화되고 공공과 민간의 협조가 가능해짐으로써, '평생건강관리체계'가 구축되고 기관단위의 서비스(institutional care)와 방문보건을 통한 지역사회 단위의 서비스(community care)가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 만성질환자들을 위한 요양서비스도 증가해야 한다.

질적 수준의 제고는 첫째로 포괄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시스템에 의해, 둘째로 제공자 스스로의 질 관리 노력에 의해, 셋째로 의료소비자 운동을 통한 시민감시로 가능해 질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법에 규정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설립은 진료비 심사와 의료의 질 평가를 동시에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 기관으로서 보건의료의 질 향상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정부가 시행하는 병원 서비스평가에 시민소비자 단체가 적극 참여하고 그 결과가 공개된다면 큰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속성은 환자와 의료인이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어 '단골'관계로 안정될 때 가능해진다. 단골의사제도와 단골약사제도가 실시되고, 의료분쟁조정법이 제정되어 공정한 분쟁조정 절차와 충분한 보상/배상 기금이 준비될 때 환자-의료인 관계는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치료자 장보기(healer shopping)' 현상, 환자-의사간의 미시정치적(micro-political) 관계에서 열세에 있고 지식도 부족한 의료소비자의 억울한 피해, 이에 대한 반동으로 협박, 폭력 사태로 치닫기 일쑤인 의료분쟁 상태로는 한국 의료의 미래가 없다. 의료인 스스로의 질 향상 노력과 의료윤리의 제고, 자율정화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보건의료체계에서 낭비 요인을 제거하여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은 흔히 국가-자본의 부담을 줄이는 체제 순응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 상황은 효율화를 이렇게 단선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민중/소비자의 부담이 너무 커져 있는 상태이다. "부유층-저부담, 빈곤층-고부담"에서 "부유층-고부담, 빈곤층-저부담"의 구조로 보험료 부과체계를 변경하고 국가 책임을 강화하면서(지역가입자 국고 보조 증가), 이렇게 조성된 의보기금을 민중/소비자에게 돌리는 것이 개혁의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보건의료체계가 효율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면 이 재원이 낭비되어 민중/소비자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구멍 뚫린 물동이에 아무리 물을 쏟아 부어도 민중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까지 정부와 보험자가 택한 의보재정 '효율화'의 노력은 진료비 심사를 통해 잘못 청구된 진료비 지불을 감시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한계는 너무 뚜렷하다. 연간 3억건에 달하는 외래, 입원 진료비 청구의 행위별 내역을 일일이 감시할 수는 없다. 병의원이 의료원가 증가를 억제하고, 의료보험 스스로가 체제를 간소화해서 낭비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접근방식은 대중소 의료기관이 역할을 분화하여 1차 보건의료 단계에서 최대한 많은 외래 환자를 다루어 주고, 2차 단계로 중소병원이 대부분의 입원환자를 취급해 주는 것이 국가 전체로 보자면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이것이 의료전달체계의 확립과 주치의 등록제 등이 선차적인 정책과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의약분업은 '의약분업 실현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의 방안에 의사회와 약사회가 합의함으로써 돌파구를 열게 되었다. 의약분업은 병의원, 약국, 제약 및 의약품 유통산업에 폭발적인 개편의 바람을 몰고 올 것이며, 의약품 오남용과 불필요한 의약품 비용의 억제와 의약품의 품질 향상 등을 통해 국민 보건에 크게 이바지 할 것이다.

의약분업의 실시와 약가차액의 방지를 위한 제반 대책은 병의원의 재무구조를 현저히 변화시킬 것이다. 병의원은 재정의 투명성을 갖추는데 비상한 노력을 해야 한다. 보건의료기관의 운영 재원을 마련해 주는 것은 국민이고 국민들의 동의가 없이는 새로운 재원이 염출될 수 없다. 삶의 질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보건의료에 일정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비용이 병의원에서 적절하게 사용된다는 것이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된다면 그에 조응한 비용 부담의 증가를 국민들도 찬성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추가재원의 증가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도 된다. 국민들은 마땅히 병의원의 경영투명성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보건의료인력 분야도 지금까지와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할 분야이다. 조만간 인력의 과잉공급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고, 인력들 간의 균형은 이미 심하게 깨져 있는 상태이다. 늦었지만, 그래도 이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을 당장에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과잉공급되고 있는 치과의사, 약사 등의 공급을 감축하고, 조만간 의사들의 공급도 감축해야 한다. 의사 인력의 구성에서 가정의의 비중을 대폭 늘려야 하며, 현재 논의되고 있는 치과의사, 한의사의 전문의제도는 그들의 활동 영역이 병원 안에 국한된다는 일정한 틀 속에 진행되어야 한다.

국민들의 사고와 의료행태의 개혁

고쳐야 할 것은 의료보험과 보건의료체계에만 있지 않다. 전문의 선호, 대형종합병원 선호, 의약품 남용, 주사제 선호, 특효/비방의 선호 등 국민들이 고쳐야 할 개념과 의료행태는 아주 광범위하다. 흡연, 폭음, 안전의식의 부족 등 국민들이 건강을 해치는 행태도 아주 많다. 건강한 행태를 가지고, 불필요한 의료서비스 이용을 줄이는 것이 현명한 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의료보험 체계의 개편 등 사회보장 제도의 개혁에는 온 국민이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것이 절실하다. 건강문제를 공동체 방식이 아닌 개인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려 하면 단기적으로는 편리하고 이익이 되는 듯 하지만, 결국은 국민 개개인이 훨씬 더 큰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이 선진 여러 나라의 경험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김용익 / 서울의대 의료관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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