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여성복지 – 주요 흐름과 향후 과제

들어가는 말

90년대는 여성과 가족복지에 관한 법률 제정이 눈에 띄게 활발히 전개되었다. '영유아보육법',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 '가정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여성발전기본법 제정, '남녀 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등이 제·개정되었으며 여성정책을 전담하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와 6개 부처 여성정책담당관 제도가 신설되었다.

이처럼 여성과 가족복지 관련 법률 등 제도적인 성장이 이루어진 것은 1995년 북경에서 개최되었던 제4차 세계여성회의가 한국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변화를 초래하였고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여성과 가족복지를 위해 일해 온 여성운동단체의 대안적 정책제시에 힘입은 바 크다.

이 글에서는 90년대 여성과 가족복지 관련 법률 제정과정의 배경과 의미, 향후 전망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991년 1월 졸속으로 제정된 영유아보육법

1980년대 우리나라 산업구조가 중화학공업으로 재편되고 연소노동력의 학력 증가, 생계비 급증 등으로 기혼여성이 노동시장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일하는 어머니의 급증은 가정에서 육아를 전담하던 기존의 방식을 전환시켜 자녀들의 안전한 보호와 건강한 성장을 위한 보육욕구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차원에서는 1982년 이른바 교육과 탁아기능의 통합을 꾀하면서 유아교육진흥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새마을유아원'이 대거 확대되기 시작했으나 보육시간이 짧아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같은 시기에 도시 빈민지역과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또는 보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여성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탁아소를 설치, 운영하는 비영리민간탁아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탁아소들은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의 노동시간에 맞춰 아동을 보호·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였다.

당시 탁아소의 교사들은 1985년 '지역사회아동교사회'를 결성해 탁아소의 역할 등에 대해 함께 교류하다가 1987년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이하 '지탁연')로 재편하였다. 지탁연을 중심으로 당시 탁아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공청회를 열고 탁아정책의 방향을 아동의 보호받을 권리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아동복지정책을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자 정부는 1989년 아동복지법 시행령에 탁아소 관련 조항을 삽입했지만 이는 88시립탁아소와 새마을유아원의 탁아소 전환의 근거가 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탁연은 이 시행령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탁아입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탁아입법 제정활동은 여성계와 유아교육계·사회복지계 학자를 통해 사회적으로 여론화되었고 비영리 민간탁아소 부모들의 적극적인 서명운동을 통해 확산되었다. 당시 정부와 일부 보수적인 언론에서는 보육은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개별 가정의 책임이라고 강변했지만 1990년 3월 혜영, 용철남매 화재사건*은 보육의 사회적 필요성을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91년 1월 정부는 사회적인 여론이 밀려 마침내 영유아보육법을 졸속으로 날치기통과시켰다. 지탁연 등에서는 보육의 공공성을 강조했으나 법안에는 보육비용을 수혜자 부담으로 하고 국가의 책임은 생활보호대상자 자녀로 국한하였다. 오히려 자율적으로 운영하던 비영리 민간탁아소를 일정간 요건을 갖춰 신고하라고 하는 규제법적인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최현숙, 1998).

영유아보육법 제정 이후 지난 10년간 보육시설이 양적으로 증가하였고 보육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영유아보육법은 제정당시부터 보육의 질적 발전을 담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1999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보육교사회, 참여연대, 서울 YMCA, 공동육아연구원, 부스러기선교회 등이 법개정을 제안하였다.

주요 내용은 보육대상을 12세 미만으로 확대해 방과후 보육을 활성화하고 보육비용을 부모 소득수준에 따라 차등적용하고 보육과정과 아동의 건강·영양에 관한 내용강화, 보육교사 자격증제도 도입 등이다. 민간단체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민회의 이성재 의원과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이 의원발의를 해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심의를 마친 상황이다. 그러나 법심의 과정에서 보건복지부가 법실행의 난색을 표명해 방과후 아동보육과 차등보육료제도를 삭제하는 바람에 애초의 법 개정 취지가 퇴색된 채 통과되었다.

여성인권을 진전시킨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방지법

O 법제정 운동 3년 만에 성사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1990년대에 들어와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1991년 김부남 사건과 1992년 김보은·김진관 사건이었다. 두 사건은 모두 강간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했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충격을 주었다. 김부남 사건은 9살 때 이웃집 아저씨에게 강간당한 후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21년이 지난 후에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어린이에 대한 성폭력의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김보은·김진관 사건은 김보은의 의붓아버지가 12년간 지속적으로 근친강간을 해온 사실이 밝혀지고 어머니는 가정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김진관은 애인인 김보은을 위하여 성폭력 가해자를 살해했다는 점에서 범국민적 호응을 받은 사건이다(신혜수, 1998).

이러한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여성단체와 장애우단체, 시민단체 등이 연대해서 성폭력특별법안을 국회에 청원하고 법제정을 촉구하는 다양한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법제정 당시 주요쟁점은 성폭력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였다. 당시 강간죄는 형법에서 다루어졌는데 강간죄가 성립되려면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했는지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이처럼 형법 제32조 '정조에 관한 죄'에는 가부장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죄'로 개념을 재정립하고자 했으나 1993년 12월 제정된 법에는 형법의 관련법을 그대로 도입하고 그외에 새로운 형태의 성폭력, 즉 대중교통수단 내에서의 성폭력과 통신수단을 통한 성폭력 등을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성폭력범죄에 친고죄가 적용되어 피해자가 스스로 고소하지 않으면 범죄 성립이 어렵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성폭력피해자들이 범죄신고를 꺼리고 있다. 1997년 13세 이하에 대한 성폭력의 경우 친고죄를 폐지하고 친족 성폭력 범위를 확대하는 등 일부 개정하였다. 성폭력특별법 제정 이후 성폭력상담소가 1999년 현재 44개가 설치되어 있고 성폭력피해자 보호시설이 3개 운영되는 등 피해자 보호에 대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나 여전히 피해자의 시회복귀 지원과 의료적인 지원이 부족한 상태이다.

O 가정내 폭력을 범죄로 규정해 가정폭력 예방에 기여한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가정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가정폭력의 문제는 1983년에 한국 여성의 전화가 매맞는 아내에 대한 상담을 시작하면서 사회문제화하였다. 특히 1996년 가정의 달을 앞두고 발생한 이상희 할머니의 사위 살해사건은 딸을 상습적으로 구타해온 사위를 칠순의 할머니가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가정폭력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친정어머니를 대신해 살인자로 자처하고 나선 딸로 인해 이 사건은 더욱 극적인 요소를 구비하게 되었고 이 사건은 CNN으로 보도될 정도로 널리 여론화되었다(신혜수, 1998).

이 사건을 계기로 가정폭력을 신고했을 때 방치했던 경찰의 문제 등이 제기되면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범국민운동본부'(제 시민·사회·종교단체로 구성)에서는 가정폭력방지법 시안을 만들어 약 8만여명의 서명을 받아 1996년 10월 국회에 청원하였다.

범국민운동본부의 청원을 계기로 여·야당 모두 가정폭력방지법 시안을 내놓은 상태이고 당시 집권당인 신한국당에서는 가정폭력에 대한 처벌과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를 별도의 법으로 분리하자고 하였고 당시 야당과 가정폭력방지법제정범국민운동본부에서는 하나의 법으로 하자는 이견이 존재하였다.

어쨌든 1997년 11월 법안에 담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여당, 야당, 범국민운동본부가 합의하고 법형식에 대해서는 두 개의 법안으로 합의하여 마침내 국회에서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되었다.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가정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관한 법률'(통칭해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으로 가정폭력은 누구나 신고해야 할 범죄로 규정되었고 가정폭력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 출동하여 가정폭력 상황을 종식시키고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격리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가정폭력 피해자는 임시조치 청구를 통해 가해자 접근금지명령 등을 신청할 수 있고 가정폭력관련 상담소를 통해 상담과 법적, 의료적 지원조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법은 상해를 동반한 가정폭력의 경우 형법에 의해 처분을 받게 되지만 그 외의 가정폭력은 가해자에게 가정보호처분을 내리게 되어 있어 이 조치가 종료되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자가 법원에 직접 가정보호 사건을 신청할 수 없게 함으로써 가정보호처분을 신청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일단 가정보호처분의 종류로는 접근금지명령, 자원봉사명령, 배상명령, 유치명령 등 다양하게 되어 있어 가해자의 처벌보다는 교정에 맞추어 가정폭력방지법의 취지가 가정의 유지와 평화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및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우리나라 사회보장체계는 소득기여도에 따라 그 수급의 질이 차별화되어 있다. 여성의 경우 노동시장에서 차별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각종 사회보험 수급을 안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즉, 평등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사회보장의 기초인 셈이다. 그러나 여성노동자의 노동생애주기를 보면 미혼시기에 높아졌다가 결혼, 임신으로 낮아지고 다시 자녀양육에서 벗어난 기혼시기에 높아져 전형적인 M자형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평등고용, 모성보호, 육아 등은 여성노동자가 지속적으로 일하는 데 중요한 요건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것이 남녀고용평등법이다. 이 법률은 1988년 제정되어 1989년 1차 개정, 1995년 2차 개정, 1999년 3차 개정하였다. 올해 개정한 주요골자는 사업주에게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화하고 성희롱 가해자에게 인사조치할 수 있는 내용으로 여성노동자의 고용환경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법률이 개정되기까지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민사소송을 통해 성희롱이 일하는 여성의 고용환경을 악화시킨다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1심, 3심 재판

에서 우조교의 부분적 승소가 뒷받침이 되었다.

1999년 1월에 제정된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은 고용분야뿐 아니라 교육, 법과 정책의 집행, 재화·시설·용역 등의 제공 등에서 성차별을 금지하고 이로 인한 피해자의 권익을 구제함으로써 사회 모든 영역에서 남녀평등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법제정으로 남녀차별을 당한 피해자는 차별시정 신청을 내고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조사하여 차별이 있는 경우 시정을 권고하게 된다. 또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시정받은 기관은 시정조치를 취해야 한다. 시정조치의 권고내용은 차별행위 중지, 원상회복, 손해배상 등 구제조치, 일간신문 광고란 등을 통한 공표 등이다.

이외에도 1993년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법'을 제정하여 정신대 할머니에게 생활보호, 의료보호, 공공임대주택 우선 입주지원, 생활안정 지원금으로 일시금(4,300만원)과 월지원금(50만원) 지급 등을 하고 있다(《북경행동강령이행보고서》,1999). 아울러 1995년에는 여성발전기본법을 제정하여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여성정책기본계획을 세우도록 하였고 여성정책의 범주를 12개 분야로 정립하였다.

마 치 며

지난 1990년대 여성 및 가정복지 관련 법률 제정과정을 보면 매우 역동적임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삶에 깊이 결합되어 있는 여성단체 등이 법과 제도가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지서비스를 민간차원에서 제공하고 있다가 현실의 모순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면서 법제정의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냈다.

또한 여성복지 관련 법률의 제정과정을 보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가 법제정의 걸림돌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성역할 분담론, 성폭력 피해는 본인이 유발한 것이라는 정조관, 가정폭력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린다는 남성우월주의 등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법 제정 당시 사회적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다양한 캠페인과 토론회, 국회 교섭활동 등을 통해 법 제정이 성공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최현숙, 1998,《보육운동, 열린 희망》, 한국여성단체연합.

신혜수, 1998,《여성인권운동. 열린 희망》,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 1999,《북경행동강령이행보고서》, 제2장.

남인순 /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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