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2 2022-09-01   26171

[기획1] 인간 의존성과 돌봄민주주의

나상원1)

들어가며

이 글은 돌봄민주주의를 소개하는 글이다. 저명한 돌봄학자 트론토(Joan Tronto)는 돌봄민주주의를 민주적 페미니스트 돌봄윤리(democratic feminist ethics of care)로 소개한다.2) 여기서 돌봄윤리란 인간 의존의 필연성과 긍정 그리고 돌봄의 필요성을 화두로 하는 윤리론을 의미하며, 돌봄을 담당해온 사람들이 위치하게 되는 더 큰 사회적 맥락과 파워를 비판적으로 주목한다는 면에서 페미니스트 이론의 특징을 일면 공유한다. 나아가, 궁극적인 대안으로 돌봄책임의 민주화를 강조하는 민주주의 이론이다. 

인간의 취약함, 의존성, 돌봄

취약성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엄마의 다리 사이에서 나왔다. 우리는 누군가가 탯줄을 끊어주지 않으면 분리된 개체가 되지 못하며, 신생아가 머금고 있는 입안의 양수와 이물질을 제거해 주지 않는다면 숨통조차 혼자 힘으로 열 수 없는 취약한 존재였다. 인간은 갓 태어난 사슴처럼 몇 분만 있으면 제 힘으로 벌떡 일어나 부모를 따라다니며 자력으로 먹이를 구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우리의 취약성은 인류(人類)라는 인간 종(種)의 공통되고 보편적인 생물학적 특성이다. 인간의 취약성은 비단 영유아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건장한 성인이 되더라도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으며, 사고의 경중과 회복의 차도에 따라 취약성은 높아진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접어들면 기력이 떨어지는 정도만큼 혼자 힘으로 하는 자생력은 줄어들고 취약성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모두가 취약성에 기반한 생로병사에서 예외이고 불운에서 안전하고 싶지만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취약성은 인간 보편의 특성이자 객관적인 생명의 조건이다.

의존성

취약한 인간은 사(死)가 아닌 생(生)으로 가기 위해 누군가에게 의존(dependent)해야 한다. 영양을 섭취하고 각종 위험에서 안전하기 위해, 나아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되기 위해 나 아닌 남의 손길이 있어야 하며 이에 의존해야 한다.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 막힘없이 목 넘김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빚어주는 이유식이 있어야 안전하게 자신을 살릴 수 있으며, 혹시나 있을 낙상을 호위해 줄 누군가가 지척에서 부축해 주어야 걸어볼 엄두라도 낼 수 있고, 식자재가 바로 옆에 있어도 냉장고가 바로 옆에 있어도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유약한 독거노인은 누군가의 관심과 정성 그리고 수발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에서 멀어진다. 인간이 특정 기간 중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생물학적 사실이며 당연한 인생의 일부이다. 의존성은 이제 어엿한 성체가 된 모든 성인이 성찰하고 반추하지 않으면 잊고 지내기 쉽고 무지해지기 쉬운 개개인에게 이미 체득되고 체화된 사실적 삶의 일부이다. 의존성은 수치스럽거나 남 부끄러워 해야 할 근거가 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비하하거나 낙인찍을 수 있는 근거도 아니다.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은 개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비선택적이고 우연적이지만 인간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돌봄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불가피한 인간의 한계로 취약한 삶의 구간을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 우리는 타인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이 같은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에 대한 응답(또는 대응response)이 돌봄(care)이다.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돌봄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돌봄의 윤리적 의미는 취약한 생명을 외면할 수 없는 일종의 인간애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즉, 인간은 취약한 인간의 의존성을 조우(遭遇)했을 때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아야 비로소 윤리적 인간이 된다. 이를 외면한다면 마치 윤리적 존재가 아닌 금수나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취약한 생명을 조우했을 때 물이 얼음이 되듯 실천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윤리적 인간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질적 전화(轉化)되고 거듭난다.3)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돌봄의 특징이 있다. 돌봄은, 트론토의 표현으로 하자면, 두뇌 속 생각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몸소 해야 하는 실천의 일종이다.4) 아이를 보고 살핀다는 것은 TV나 스크린 앞에서 착석해 좌시(坐視)하듯 그냥 보고 생각하면 되는 게 아니다. 돌봄은 소위 노고라고 하는, 누군가의 정성과 손길로 공을 들여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부담이자 책임이다. 강도와 연속성에서 차이가 있지만, 이런 부담과 책임을 마다하지 않은 인격체를 우리는 그간, 남녀를 막론하고, 엄마라 불렀다. 우리는 이러한 노고에 의존하고 힘입어 생을 이어왔으며 누군가의 삶을 살리고 있다. 이러한 동고동락은 생애사적으로 의미있는 희로애락이자 실천적 가치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돌봄에 힘입은 ‘어느 엄마의 자식들’이다.5)

돌봄 위상과 사회적 책임

불리해지는 돌봄 위상

문제는 인간이라는 취약한 생명체를 살리는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항상 불리해진다는 점이다. 돌봄경제학자 폴브레(Nancy Folbre)는 이를 착한 사람의 딜레마로 설명한다.6) 타인의 돌봄필요에 응답하는 좋은 사람들이 그 필요와 요구를 사양하면 더는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한 지점까지 약자의 요구에 대응하는 딜레마에 처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돌봄철학자 커테이(Eva Kittay)는 본인보다 취약한 의존인의 불가피한 의존성을 자신보다 우선시하는 돌봄담당자의 특징을 설명한다. 즉, 취약한 의존인의 돌봄필요와 돌봄담당자의 자아가 충돌할 경우 돌봄을 담임한 사람은 본인의 이해관계를 내세우지 못하고 양보하게 되는 일종의 투명자아(transparent self)라고 보았다. 돌봄담당으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기회비용은 차치하더라도, 커테이에 따르면, 돌봄인은 돌봄을 담당하는 와중에 돌봄에 필수적인 자원들을 자구(自求)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돌봄관계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돌봄 자원을 지원해주는 조달자에게 서서히 의존하게 되는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정리하면, 인간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윤리적 가치와 실천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돌봄관계를 둘러싼 환경에서 돌봄담당자의 상대적 위치인 돌봄 위상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불리하거나 눌려있게 된다.

돌봄담당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

이 같은 소위 ‘돌봄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역학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게 되는’ 돌봄 위상(care position)의 열세는 돌봄담당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필요로 한다. 커테이는 돌봄인이 돌봄을 담당함으로써 다른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취약해지지 않도록 사회가 이들을 돌봐야 할 공적 의무와 책임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어느 엄마의 아이인 이상, 우리 모두는 우리 모두가 돌봄을 받을 수 있고 돌봄을 줄 수 있는 조건을 만들 돌봄의 공적 윤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강조한다.7)

돌봄민주주의

돌봄책임의 민주화

트론토는 『돌봄민주주의』에서 전격적으로 돌봄을 중심으로 돌봄과 인간, 돌봄과 정치 그리고 돌봄과 민주주의를 직결시킨다.8) 트론토에게 인간은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태어나 돌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돌봄을 통해 인격체로 성장하고 돌봄을 통해 삶의 의미를 만들고 돌봄을 통해 삶을 마감하는 존재다. 인간은 모두가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실에 근거한 ‘평등’ 아래, 누군가는 몸소 해야하는 돌봄을 주고받는 상호의존적인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트론토에 따르면, 돌봄은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비록 정치에는 필연적으로 이해관계와 파워가 없을 수 없지만, 불가피하게 누군가가 해야 하는 부담일 수밖에 없는 돌봄책임은 모든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돌봄을 정치(학)의 중심주제로 다루지 않았는지 트론토는 반문한다. 그녀가 돌봄을 정치의 중심 주제로 직결시키는 이유는 돌봄이라는 책임을 정치가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누구는 평생 돌봄책임을 외면하고 무시하며 살 수 있고, 누구는 평생 돌봄부담에 메어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결국 돌봄책임을 부담시키는 정치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트론토의 돌봄

돌봄은 트론토에게 ‘잘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세상을 바로잡고 지속시키고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이며, 그 대상은 자신의 몸, 자아, 주변환경을 포함하며 생명유지의 복합적 그물망으로 엮을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정의된다.9) 돌봄은 취약한 의존인의 돌봄필요를 누군가가 감지(care about)하면서 시작되며, 이러한 돌봄필요의 감지를 외면하지 않고 담임하는 일종의 돌봄책임(care for)의 단계를 거쳐, 직접적인 돌봄제공(care-giving)과 돌봄수혜(care-receiving)로 이어진다. 돌봄수혜의 단계에서는 기존의 돌봄필요가 충족됨과 동시에 새로운 돌봄필요의 감지가 요구되는 순환적인 과정이다. 이에 더해 돌봄은 궁극적으로 누군가는 해야 하는 부담이기에, 우리 모두가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고려할 때, 모두가 이러한 돌봄의 과정을 평등하게 분담하는 돌봄의 마지막 과정인 ‘함께 돌봄(care with)’이 요구된다.10)

돌봄민주화

따라서 트론토에게 돌봄의 평등한 분담, 즉 ‘함께 돌봄’이 돌봄의 민주화다. 돌봄은 전술했듯 기쁨이기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해야 하는 부담이다. 그렇기 때문에, 돌봄 과정의 부담이 분배되는 방식이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결과적으로 누구는 돌봄에서 열외되고 누구는 돌봄을 부당하게 전담하게 된다. 우리는 돌봄이라는 선한 의도가 돌봄책임의 배속이 결정되는 비민주적이고 부정의한 방식―가부장제나 성별분업 같은―에 복무하고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돌봄이란 이름으로 횡행할 수 있는 억압에 눌려있는 사람들은 없는지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들을 민주적으로 돌봐야 하는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돌봄이 민주적이기 위해서는 ‘돌봄불평등의 악순환구조’를 끊어야 한다고 트론토는 주장한다.11)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이 돌봄을 주로 담당하게 되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열세인 자신들의 돌봄 위상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시정할 기회 즉 정치적 평등을 갖지 못하게 되면서,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더욱 악화되는 구조를 혁파해야 돌봄을 민주적으로 분담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고 트론토는 보았다. 트론토는 이러한 돌봄 책임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편견과 돌봄의 무임승차를 설명하지만, 이에 대한 처방은 각국의 맥락에 맞게 민주적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위계구조의 혁파로서 돌봄민주주의

트론토의 돌봄민주주의가 인간 취약성과 의존성 나아가 돌봄가치의 인정을 제기하고 돌봄책임의 분담을 정치와 민주주의의 중심 주제로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면, 김희강의 돌봄민주주의는 거시 정치사적 맥락에서 자유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와 동렬에서 한국적 돌봄민주주의를 향한 제도 처방까지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12) 우선 김희강에게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이자 정의의 조건이다. 정치적 평등은 돌봄책임이 부담되는 의사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결정에 참여하여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의미한 기회를 의미한다. 김희강에 따르면, 시대에 따라 개개인이 속한 집단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지위가 공고화된 위계질서는 정치적 평등 즉 민주주의의 장벽이 된다. 봉건제 신분질서라는 위계를 자유인이라는 시민이 자유를 기치로 도전하고 혁파했으며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시장제도를 확립했듯,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가 배제된 자본주의 시장질서라는 위계를 노동자로서의 시민이 노동을 기치로 도전하고 혁파했으며 노동중심의 사회권과 복지제도를 확립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의 적자(嫡子) 자유인으로서의 시민과 사회민주주의의 적자 노동자로서의 시민의 ‘정치적 동맹’에서 돌봄은 배제되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제도적으로 일궈왔듯, 돌봄민주주의의 목적은 노동=남성=일등시민 대 돌봄=여성=이등시민이라는 위계적 사회경제질서를, 돌봄을 기치로 도전하고 혁파해 돌봄책임을 민주적으로 분담할 수 있는 ‘함께돌봄책임제도’를 안착시키는 것이다.13) 이러한 제도하에서 돌봄인은 돌봄을 당당하게 주고 받는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단언한다.

혁명적 보수로서 돌봄민주주의

돌봄민주주의는 혁명적 보수라 할 수 있다. 돌봄민주주의는 그간 공적 영역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등한시되고 배제된 주제인 돌봄을 민주적으로 배합하기에 혁명적이다. 이러한 민주적 배합은 더 많은 민주적 대화와 제도로 앞당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점진적이며, 동시에 군인과 젠틀맨 중심의 계약적 사고로 질서잡힌 기존 발상부터 뒤집어 본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사회적 차이가 새로운 정치적 원동력이 되듯, 기존의 질서에서 배제된 돌봄의 민주적 결합은 사회적 혁신이자 정치적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14)

돌봄민주주의는 돌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가장 오래 존속되고 변치 않을 주제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돌봄관계는 가장 근원적인 관계이며, 어떠한 사회적 변동 심지어 혁명이 있더라도 변치 않을 관계이다. 개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혹은 계약주의적 사고는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계약의 주체로 세상에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돌봄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은 우리 모두가 어느 엄마의 자식이듯 돌봄에 필연적으로 관계된 존재들을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단절하기보다는 관계를 유지할 것을 권장한다. 하지만, 돌봄민주주의는 그것이 가부장적이거나 위계적인 관계일 경우 단호히 배격하며 도전한다. 돌봄관계에 어떠한 지배나 억압도 없어야 하며 언제나 민주적으로 점검되어야 하는 대상이라고 본다.


1) 돌봄 관련 여러 권의 번역서를 냈다. 한 때는 병원에서 주말간병을 했으며, 요양보호사와 장애인활동보조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돌봄을 공화주의와 접목하려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2) 조안 트론토(2021), 『돌봄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역(서울: 박영사).

3) 버지니아 헬드(2017), 『돌봄: 돌봄윤리』, 김희강·나상원 역(서울: 박영사).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care에 대한 번역어로 ‘돌봄’이 적정해 보인다. 취약한 생명을 못 본 척하고 지나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돌아보는’ 인간이 윤리적인 인간인 것이다. ‘보살핌’ 역시 ‘보고 살핀다’는 의미로 Care의 유사한 외연이지만, 돌봄이 두뇌로 하는 것이 아닌 몸소 해야 하는 실천의 종류임을 상기한다면, 돌아본다는 행동의 변화까지 함의할 수 있는 ‘돌봄’이 윤리적 가치와 실천을 적정하게 담아낸다고 본다.

4) 조안 트론토(2021), 『돌봄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역(서울: 박영사). 

5) 에바 커테이(2016), 『돌봄: 사랑의 노동』, 김희강·나상원 역(서울: 박영사).

6) 낸시 폴브레(2007), 『보이지 않는 가슴: 돌봄경제학』, (서울: 또하나의문화).

7) 김희강(2021), “시장에서 돌봄으로,” 『돌봄민주주의』, 역자 해제.

8) 조안 트론토(2021), 『돌봄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역(서울: 박영사).

9) 조안 트론토(2021), 『돌봄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역(서울: 박영사) 67쪽.

10) 조안 트론토(2021), 『돌봄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역(서울: 박영사) 72~73쪽.

11) 조안 트론토(2021), 『돌봄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역(서울: 박영사) 제4장.

12) 김희강(2022), 『돌봄민주국가』, (서울: 박영사).

13) 위의 책, 12장. 김희강은 ‘함께돌봄책임제도’의 다섯 제도로 돌봄헌법, 돌봄부, 돌봄책임복무제, 돌봄교육, 돌봄연금을 제안한다. 

14) 그렇다고 돌봄민주주의가 기존 민주주의를 대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법과 통치에 관련된 민주주의가 대문자 D의 Democracy라면, 돌봄민주주의는 그간 배제된 돌봄책임이라는 인간 필연의 주제를 정치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돌봄민주주의는 전체 민주주의의 절반에 해당하는 소문자 d의 민주주의이다. 이에 대해서는 트론토(2021). 『돌봄민주주의』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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