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2 2022-12-01   1534

[기획3] 합리적 이타주의, 교설(敎說)이 아니라 제도의 원칙이 될 수 있을까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타주의가 합리적이어야 하는 시대

명사가 뜻하는 바의 현재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앞에 형용사를 붙여 의미를 한정할 때가 있다. ‘창조적 경제’라는 말은 경제가 ‘창조적’이지 않아서, ‘사회적 경제’라는 말은 경제가 ‘사회적’이지 않아서 등장했을 테다. 합리적 이타주의라는 말도 이타주의라는 게 합리적이지 않아서 불만인 누군가가 쓰기 시작한 것일까? 

‘합리적 이타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은 ‘합리’를 좋은 것, 추구해야 할 어떤 것으로 바라보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근년에 적잖이 읽혔을 책,《자크 아탈리의 긍정경제학》에서 저자는 이렇게 썼다. “긍정 경제는 이타주의의 합리성에 기반을 둔다. 긍정 경제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타자’를 고려한다. 사람들은 타자의 행복에 관심이 있다고 본다. 그 타자는 현재의 타자뿐만 아니라 과거의 타자, 그리고 (특히) 미래의 타자다. 이타적인 것이 온전히 합리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1)

이타주의는 비합리적이어서 보편적인 도덕 원칙이 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에 동의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합리성이 인간 행위의 유일한 준칙이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비합리적인 논리에 바탕을 두고 국가의 제도나 정책을 설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현대 사회에 지배적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기적 행동은, 그 선악 여부를 떠나서,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이타적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겨난다.

‘이기주의는 합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야말로 제도의 원칙이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이기적 행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즉 당연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지만 이 전제는 근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폴라니(K. Polanyi)가 시장 심성2)(market mentality)이라고 언급한 경향이 제도, 문화, 학술, 정책 등등의 거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자연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정부 부처의 고위직 관료들의 배경을 살펴보라. 경제학과 출신이 기획재정부뿐만 아니라 보건복지부에도 국토교통부에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정부의 재정 정책을 운용하는 원칙은 경제학적 합리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현대 경제학의 태생과 그 영향력 자체가 지고불변의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이 인간을 ‘합리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자’로 간주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경제학은 그 언어와 장비를 통하여 그것이 이론화하기로 되어 있는 행위자, 즉 자기 이익에 충실하고 계산적이며 심지어 거짓말까지 하는 인간을 창조해 낸다. 우리는 이러한 성질들이 인류의 자연적인 측면이라고 믿기도 한다”3)

자크 아탈리(J. Attali)로 대표되는 합리적 이타주의 주장을, 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성선설이 옳으냐 성악설이 옳으냐’따위의 논쟁은 그리 실용적이지도 않거니와, 자크 아탈리의 논점과도 멀리 떨어진 것이리라. 그보다는 제도나 정책의 규범적 토대로서 이타주의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타주의가 반드시 합리적일 필요는 당연히 없다. 합리적인 이타주의도 존재하며 그것을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중요하지만, 그런 주장이 나오는 이 시대의 풍경은 우울하다. 

합리적 이타주의, 인간 본성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실천을 촉구하는 주장

지난 2021년 초, ‘코로나 19 감염병 사태’가 언제 진정될지 가늠할 수 없었던 무렵에 한 일간지에 신년 특집으로 자크 아탈리와의 대담을 실었다.4)‘합리적 이타주의’의 뜻 못지않게 그 주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보면, 그 일문일답에는 자못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자크 아탈리와 질문자의 대화가 엇갈리는데, 눈여겨볼 부분이 있어 일부분을 인용한다. 

자크 아탈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이타적인 행위자라고 주장한 게 아니다.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질문자는 인간은 이기적인 행위자라고 단정하고 있어서, 자크 아탈리의 주장이 ‘선뜻 와 닿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어쩌면 자크 아탈리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를 따지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초과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그렇게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단기적으로 이기적인 전망하에 행동할 때 장기적으로 결정적인 실패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면 ‘모두의 미래를 생각해서 이타적으로 행동하자’는 주장이 합리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맥락에서는 합리적 이타주의와 합리적 이기주의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모두의 미래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려고 지금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이기주의’의 발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득 논리로서 합리적 이타주의

인구 3,000명도 안 되는데 면적은 서울시 광진구의 두 배쯤 되는 어느 농촌 면(面에) 지역사회에서 경험한 일을 잠깐 소개한다.5) 삼십 년 전에는 1만 4,000명도 넘었던 이 농촌 지역의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고령화되어 지금은 주민의 생활 여건이 아주 척박하게 되었다. 학교라고는 전교생 40명쯤인 초등학교가 남았고, 지역 전체를 통틀어 음식점과 상점이 각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병원이나 약국은 없고, 사회복지기관도 없다. 이런 풍경은 한국 농촌에서는 흔히 마주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현안은 ‘노인 돌봄’이다. 현재 이곳에 사는 주민의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자인데,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돌봄 서비스는 노인장기요양제도에 따라 일주일에 몇 차례 집을 찾아오는 요양보호사의 활동이 거의 유일한 형편이다. 어르신들 중에 끼니를 굶는 이도 적지 않고, 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게 되는데, 시골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이 지면(紙面)에서 상설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집에서 죽고 싶다’는 시골 어르신들의 소망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근거가 있다. 이 지역에는 소위 ‘노인 고독사’도 가끔 발생한 적이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몇 년 전부터 몇몇 주민들이 궁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아직 노인이 아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토론이 이루어졌고, 면에 속한 32개 마을의 현황을, 즉 어떤 돌봄이 필요하고 그런 활동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나 자산이 얼마나 있는지를 조사하고 확인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이곳에서 노인 돌봄 문제는 결국 주민자치회가 공적(公的)으로 다루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의제(agenda)가 되었다. 아직 현재진행형이지만, 주민들의 이 같은 활동이 지금까지 거둔 결론을 말하자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관심이 소홀한 이곳에서는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노인들에게 적절한 돌봄을 제공할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4월에는 ‘함께하는○○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의 주민 조직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회적 협동조합은 장기적으로는 어르신들의 생활 터전 가까운 곳에 주야간보호센터와 요양원을 설립하고 지역사회가 스스로 노인을 돌보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단기적으로 지금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도 이미 시작했다. 마을마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평소에 노인들의 건강 상태와 안부를 확인하고,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지방자치단체나 보건소 등에 연락하는 체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치매가 시작된 어르신들이 모인 마을 경로당을 방문해 이러저러한 놀이 활동(흔히, 치매 관련 인지치료 프로그램이라고 한다)을 진행하는 봉사자 팀도 있다. 쓰레기 분리수거 시스템도 미흡한데다가 신체적 능력이 떨어져 집 안팎에 쌓아두거나 밭에서 그냥 태워버릴 수밖에 없는 영농폐기물6)을 방문 수거하는 팀도 있다. 빈곤한 형편에 가옥도 쇠락해 감당할 수 없는 이불이나 담요 빨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참여예산으로 ‘마을빨래방’을 설치하고 주민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한다. 당연히 밥을 굶는 어르신을 위한 이른바 ‘반찬나눔’ 팀도 조직되어 활동한다. 이런 활동에 대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작은 지역사회 주민들이 충분한 대가도 없이 ‘이타주의’에 근거한 자원봉사 덕택에 가능한 일이다.

이 사례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까닭은 그 같은 활동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합리적 이타주의’가 설득의 논리로 작동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 돌봄 활동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토론 과정 중에 50대 연령의 어느 주민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들이 다 좋은 것이고 필요한 일인데, 정부나 군청이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나는 지금 돌봄을 받아야 할 처지도 아닌데, 돈을 버는 일도 아닌 봉사 성격의 일을 하는 건 손해 아닙니까?” 의논에 참여했던 주민 대다수가 이와 같은 생각이었다면, ‘함께하는○○사회적협동조합’은 결코 설립되지 못했을 것이고, 앞에 묘사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질문에 다른 누군가의 답변이 다수의 공감을 얻었고 주민의 뜻을 모으는 데 기여했는데, 이런 것이다. “이 노인 돌봄 활동들이 지금 내게는 당장 이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길게 보아 내가 늙었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지역사회의 어르신을 지역사회가 돌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그런 활동의 경험과 활동 조직이 앞으로 수십 년 뒤에도 이어진다면 내가 늙었을 때 혜택을 볼 것입니다. 또 나를 돌본 그 주민이 늙었을 때 그도 혜택을 볼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일까, 이타주의일까?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합리적 이타주의란 바로 그런 설득의 논리다.

합리적 이타주의에 바탕을 둔 제도 논의의 출발점

앞에서 언급한 주민 조직의 사례는 어쩌면 ‘제도의 빈 공간’7)(institutional void)에 놓인 작은 지역사회라는 상황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뜻밖에도 “제도의 빈 공간은 여전히 열려 있어서 참신한 해법의 설계, 시도, 펼침 등을 허용”8) 하기도 한다. 게다가 농촌 지역사회에서는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면(face-to-face) 인간관계가 비중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이어서, 주민들이 뜻을 모으기가 도시보다는 쉬울 수도 있다. 합리적 이타주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에 상대적으로 쉬운 여건이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국가의 제도나 큰 정책 수준으로 합리적 이타주의의 논리를 끌어올려 적용할 수는 없을까? 복지를 위한 증세, 미래 세대까지 염두에 둔 기후변화 대응,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 투자를 촉진하고 유도할 정책, 금융 소외자들에게 접근할 마이크로파이낸싱 등 제도나 정책의 형성 과정에서 단기적 이기주의 논리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굵직한 사안들이 눈앞에 쌓여 있다.

인간이 본성상 전적으로 이타적이라면 굳이 ‘합리적 이타주의’를 주장할 필요도 없다. 자크 아탈리를 비롯한 합리적 이타주의자들이 제출한 제안들은 이미 실현되었을 테니까. 인간이 본성상 이기적이라면 ‘합리적 이타주의’를 주장해봐야 소용없다. 그런 제안들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고, 지금 우리는 주류의 ‘단기적 이기주의’에 기초한 제도나 정책의 유통기한 상실을 목격하고 있다. 합리적 이타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관심을 기울일 이유는 충분한 듯하다. 


1) 자크 아탈리+긍정경제싱크탱크, 《자크 아탈리의 긍정 경제학》, 권지현 옮김, 청림출판, 2017.

2) 칼 폴라니, 《인간의 살림살이》, 이병천·나익주 옮김, 후마니타스, 2017, 68쪽. 

3) 필립 로스코, 《차가운 계산기 – 경제학이 만드는 디스토피아》, 홍기빈 옮김, 열린책들, 2017, 24쪽.

4) “이타주의가 코로나 퇴치의 길 … 타인과 타국을 먼저 생각하라”(동아일보, 2021년 1월 1일자)

5) 행정구역상 읍 또는 면인 곳을 흔히 ‘농촌’이라고 한다. 2022년 현재 한국에 면은 1169개가 있다. 주민 3000명이라는 인구 규모는 면 지역들 사이에서는 중간 수준이다.

6) 주로 농사일에 썼던 폐비닐이다.

7) “국가의 약화에 뒤이어 시민사회의 국제적 성장, 새로운 시민-행위자의 등장, 새로운 형태의 자원 동원 등이 나타난다. 그런 경우에 활동은 ‘제도의 빈 공간’에서 발생한다. ‘제도의 빈 공간’에서는 정치가 수행해야 할 그리고 정책 수단이 바탕을 두어야 할 명료한 규칙이나 규범이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책 입안과 정치가 이루어질 때 맞춰 따라야 할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규칙과 규범이 없다.” – Hajer, M.(2003), “Policy without polity? Policy analysis and the institutional void”, Policy Sciences, 36: 175-195, 175쪽. 

8) 얀 다우 판 더르 플루흐, 《새로운 농민 – 세계화 시대의 농촌 발전》, 김정섭 옮김, 새로운 농민, 2019,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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