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14-08-18   5768

[연속기고_기초생활보장 뒤집어보기③] 부모 부양 거절한 아들, 욕할 수만은 없다

참여연대가 함께하고 있는’기초생활보장제도지키기연석회의’에서는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안정망으로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실태와 정부 개편안의 문제점을 다양한 복지 현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기획 ‘기초생활보장 뒤집어보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기초생활보장제도 뒤집어보기] 오마이뉴스에서 보기

① ‘참 좋은’ 개별급여? 당신이 오해하고 있는 세 가지

② 정부의 야심찬 맞춤형 개별급여, 정말 좀 별로다

③ 부모 부양 거절한 아들, 욕할 수만은 없다

④ 고혈압·당뇨 환자에게 일하라는 정부, 참 야박하네

⑤ 최저생계비 받는데, 왜 무료급식소 전전하냐고?

⑥ 고시원비 25만원인데 주거급여 10만원…막막하다

⑦ 기저귀 찬 8살 딸아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부모 부양 거절한 아들, 욕할 수만은 없다

[기초생활보장 뒤집어보기③] 국가가 휘두르는 흉기, 부양의무자 기준

 

 

“사람이 법을 만드는데 이럴 수 있소?”

2012년 여름, 거제시청 앞에서 독극물을 들이켠 이씨 할머니의 소식이 전해졌다. 할머니의 유서에는 “살아가기 힘든데 기초생활지원금 지급이 중단된 게 원망스럽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법이 할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까.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였으나 사위의 소득증가로 수급에서 떨어졌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부양의무자가 있을 때에는 부양의무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할머니는 사위에게 부양받을 수 없음을 수차례 읍소했지만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어요’라는 완곡한 거절을 들었을 것이다. 수급에서 탈락한 뒤 혼자 사는 셋방 월세조차 밀렸던 할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현행 부양의무자 기준은 1촌 내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까지를 지칭하고 있다. 부양의무자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수급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부양의무자가 ‘부양능력’이 있을 때만 그렇다. 부양능력이 있는 부양의무자가 있을 때 정부는 그 가족에게 복지의 1차 책임을 지운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어요”… 죽음으로 이어진 빈곤

 

첫째, 당신은 부양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안산에 사는 한 청년의 어머니가 서울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해보자. 청년의 월급이 78만 원 이하일 때는 청년은 어머니에 대한 부양능력이 없다. 그러나 그 이상을 벌게 되면 ‘미약한 부양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어머니의 수급비가 깎인다. 깎이는 금액은 78만 원 이상의 소득 중 30%, 대략 90만 원의 월급을 받을 때 어머니의 수급비가 3만 원 깎인다고 볼 수 있겠다.

 

아들의 월급이 100만 원이 되면 어머니의 수급비는 6만 원 깎인다. 이렇게 수급권을 유지하던 어머니는 언제 완전히 탈락할까? 어머니에게 아무런 소득이 없을 때, 아들에게 157만원 정도의 소득이 생기면 수급에서 완전히 탈락한다. 정부의 입장에서 아들은 ‘부양능력이 있는 부양의무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안산에 사는 아들이라고 생각해보자. 갓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떠나 부양의무를 진 청년, 157만 원의 돈을 벌어 아무런 소득이 없는 어머니와 나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미래를 꿈꿀 수 있는가? 서울과 안산 집의 월세를 내고 나면 얼마가 손에 남을지 상상해보라.

 

어머니나 내가 아파서 병원비라도 든다면? 해고로 단 한 달이라도 일할 수 없다면? 1년을 빠듯이 일하면 얼마의 목돈을 모을 수 있을까? 몇 년을 모아야 전세값이 될까? 참고로 157만 원은 ‘세금을 제하기 전’을 기준으로 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가구를 단위로 최저생계비가 책정되어 있기 때문에 위 사례는 가구 수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수준이 매우 낮다.

 

남윤인순 의원에 따르면 2011년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기초생활수급에서 탈락한 가구의 부양의무자 가구 평균 소득은 233만 원으로, 전국가구 평균소득 345만 원의 67% 수준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의 평균보다 더 가난한 가족들에게 복지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둘째, 당신은 부양받고 싶은가?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비극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2011년 4월,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권을 받지 못하던 김씨 할머니는 폐결핵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원을 오가다 거리에서 객사했다. 같은 해 7월, 남해 노인요양시설에서 생활하던 70대 노인과 청주의 70대 노인은 부양의무자의 소득으로 인해 수급탈락을 통보받고 자녀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고민하다 투신했다.

 

2012년 2월엔 양산의 지체장애 남성이 자녀의 소득으로 수급에서 탈락하자 집에 불을 내 자살했고, 9월엔 치매 부인의 기초생활수급 탈락을 염려한 서울의 한 노인이 요양병원에서 투신했다. 11월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수급권조차 없던 할머니와 손주는 촛불로 추위를 녹이다 화재로 사망했다. 2013년 9월, 신장투석 환자였던 부산의 한 아버지는 딸의 취업으로 인한 수급탈락 통보를 받고 딸에게 병원비를 부담시킬 수 없어 자살했다.

 

이들은 모두 가족이 있었으나 가족에게 부양받지 못했거나, 부양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가난에 빠져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당신은 국가와 사회의 복지제도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은가, 가족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의 복지제도로부터 도움을 받는 편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현재 가난한 이들에게는 가족에게 부양받는 모욕을 감수하라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에게는 있지만 국가에는 없는 것? ‘부양의무’

 

우리나라의 부양의무자 기준은 생계를 달리하거나 실제 부양하지 않는 경우에도 적용된다. 부양의무자가 실제로 부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급자의 수급비를 삭감하거나 수급권을 박탈할 수 있다. 매우 강력하게 수급자와 그 가족들을 추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수급자의 몫이며, 소명 책임도 수급자 본인에게 있다. 기초생활수급비를 제외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거나 미약한 경우가 절대 다수인 기초생활수급자들에게 이는 큰 충격이다.

 

사실 ‘기초생활보장법’ 자체는 부양의무자가 있으나 부양받을 수 없는 경우를 폭넓게 보장하고 있다. ‘지방생활보장위원회’를 통해 수급자를 우선 보호하도록 하거나, ‘구상권 청구’를 통해 수급자에게 보장된 비용을 부양의무자 가구에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생활보장위원회나 행정력은 수급(신청)자들을 우선 구제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 “실제 부양받지 못하고 있더라도 삭감·탈락될 수 있어요. 이에 이의가 있을 때는 이의신청을 할 수 있지만 이의신청 기간 동안은 여전히 삭감·탈락 상태입니다.”

– “부양의무자에게 실제 그만큼의 소득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부양의무자에게 고용주를 신고하라고 하세요. 그 뒤에 조정할 수 있습니다.”

– “부양의무자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요? 아직 연락이 안 된 지 3년밖에 안 됐네요. 이 정도로 가족관계 단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부양의무자가 재산이 있지만 부채가 많군요. 그러면 왜 돈을 빌렸고 어디에 썼는지 정확히 증명하셔야 합니다. 생활비는 인정되지 않아요. 교육비나 의료기록만 가져오세요. 아, 의료비에서도 간병비나 식비는 안 됩니다.”

– “아드님이 부양을 거절하셨어요. 실제 친아들이 아니라구요? 어쨌든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나오네요.”

 

강력하게 적용되는 부양의무자 기준은 가족을 도리어 해체하거나 탈빈곤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미약한 수준의 가족관계마저 ‘부양의무자’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거부하거나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가난해져야 합니까”

 

부양의무자 기준은 지속적으로 완화되어 왔다. 2006년 부양의무자 중 2촌(형제, 자매)이 제외되었고, 2012년 취약가구의 부양의무자가구 소득기준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기초생활수급자는 2007년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기준을 완화하는 대신 ‘공적자료 확보’를 중시했고, 공적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빈곤층과 그 가족들에게 더 많은 ‘모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제가 이혼한 지 15년이 되었어요. 아이랑 둘이 사는데 아이 아빠가 부양의무자라고 수급권을 탈락시킨다는 거예요.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주소를 주면서 ‘관계단절사유서’를 받아오래요. 그때 정말 얼마나 모욕적이고….”(기초생활수급자 장애여성. 이혼 후 아이와 둘이 살고 있다.)

 

만약 내가 가난해졌을 때 가족에게 부양받고 싶지 않다면, 지금 우리 사회 누구의 부양도 가족에게 맡기지 말자. 누구나 가족에게 부양받지 않고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가난은 조금 덜 두려운 것이 되지 않을까.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자가 될 수 없는 40대 장애인은 대통령께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요구하며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제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부모님은 평생 모아 마련한 집 한 채까지 팔아 저를 부양해야 합니까? 저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가난해져야 합니까? 저는 누구의 삶도 억압하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거제의 이씨 할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낡고 작은 셋방에 몸을 누일지언정 살기 바쁜 자식들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기 싫었을 것이다. 낮에 도착한 거제시청 앞마당을 해질녘까지 서성이며 고민하다가 결국 제초제를 들이킬지언정 누구의 삶도 억압하지 않는 당당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소망조차 이루지 못하는 사회여도 정말 괜찮은가. 부양의무자 기준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가난은 언제나 재난이다.

 

* 기글은 김윤영 사무국장(빈곤사회연대)의  기고입니다. 원문기사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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