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1월 1999-11-01   1162

거대 문화인프라의 교두보

파주출판단지 정보센터

1999년 9월 9일. 자유로를 끼고 있는 텅 빈 공터에 건물 하나가 세워졌다. 이날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건물 완공을 축하하는 이색 이벤트가 벌어져 눈길을 끌었다.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정보센터’. 뜻 있는 출판계 인사들이 10년 넘게 끌어온 오랜 숙원 사업이 우여곡절 끝에 구체적인 사업시행의 실마리가 잡히면서 앞으로 이곳에 50만여 평의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가 들어설 것임을 알리며 정보센터가 들어선 것이다. 대강만 땅을 골라놓았을 뿐 파주시 교하면 문발리 주위는 아직 허허벌판이다.

외롭게 홀로 서있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지만 새로운 출판문화도시 태동의 이정표이자 교두보인 정보센터(설계 : 민현식,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으로 점잖게 서있다. 단지의 미확정성을 반영하듯 건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한 층 정도 띄워져 있다. 아직 정착되어 있지 않은 출판단지의 환경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출판단지의 남쪽 진입부에 위치한 이 정보센터는 철골 구조재로 단순성을 살렸고, 외부를 메탈로 둘러 수평성을 강조함으로써 주변의 드넓은 대지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물 안으로 안내하는 긴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건물이 ㄷ자로 감싸고 있는 인공 마당(중정)을 만난다. 이 마당은 서로 다른 모양과 기능을 갖춘 내부의 방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주는 공동의 공간이다. 마당에 면한 건물의 벽은 모두 유리를 씌워 투명성을 강조했다. 건물의 뒤끝에는 출판단지의 이정표 구실을 하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주변의 단지 환경을 조망할 수 있게 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기하학적 형태와 재료의 솔직함이 돋보이는 이 건물은 전체적인 수평적 이미지와 전망대의 수직성이 조화를 이루며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비되는 역동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의 이 같은 형태와 기능 그리고 안에 담긴 성격은 앞으로 파주출판문화단지가 어떤 모습으로 들어서게 될지를 짐작하게 한다.

출판문화단지의 조성계획은, 1988년 출판계 인사들의 논의로부터 시작되어 89년 ‘출판문화산업단지 건설추진위’가 만들어지면서 출판공동체 마을 조성에 착수했다. 1990년 366개 출판사가 참여한 추진위가 발족되고, 94년 파주지역으로 입지가 결정되었으며, 이후 문화부 건교부 통상부 등의 참가한 추진단이 만들어졌다. 1997년에는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되어 파주출판문화산업단지는 출판조합 회원사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국가의 지식, 정보산업단지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단지 전체 규모가 50만여 평에 달하고 총 투자 소요비용이 1조 원이나 들어가는 이 사업은 책 만들어 돈번다는 말은 거짓’이라는 통념에 비추어 볼 때 ‘모험’에 가까운 일이지만 이는 10년 넘게 의지를 다져온 출판인들의 진지한 준비와 정부의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사업은 두 단계로 나뉘어 추진된다. 우선 전체 면적의 절반 가량의 땅에 조합에 가입한 출판사와 인쇄소, 유통회사, 인쇄지원시설, 문화공간 등 커뮤니티시설들이 들어서는 시범단지가 1차로 조성되고 이후 나머지 영역의 개발이 이뤄진다. 모든 사업이 완성되면 거대한 문화 인프라가 구축되는 셈이다. 출판단지는 1995년말 단지 명명식을 갖고 올해 말 1차 사업 단계의 완공을 목표로 했으나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아 이제 시범단지인 1차 사업지구의 건물 배치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바탕으로 한 각 건물의 매뉴얼이 완성되었을 뿐이다.

단지 안에 지어질 시설의 건축설계 지침, 일종의 건축 디자인의 매뉴얼 작업(계획 단계에서 단지 안의 전체 건축물의 형태와 재료 등을 한정하는 작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을 맡은 건축가들(민현식 정보센터 설계자, 승효상 이로재건축)은 50여만 평에 달하는 완전히 비어 있는 ‘광활한’ 대지에 이 지역의 성격을 살리면서도 출판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땅과 건축과 자연이 담아낼 수 있는 제안을 마련했다. 건축가들이 제안한 이 출판단지의 성격은 가능한 한 비워두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비움이 가득한 지혜의 도시. 저밀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지를 많이 남겨야 하고, 파주출판단지의 경우 계획 대지를 구입해서 회원사들이 분양을 받아 입주하게 되는 형식이니 경제성이 떨어지는 낭비적 제안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조합 회원사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면적만큼을 공용 토지로 공동 부담하고 입주하게 되어 있다.

출판단지의 조성이 입주자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인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을 모아 산업과 문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공동체의 단지를 마련하고 있는 이들의 의지와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단지 조성을 추진하는 조합의 활동은, 영국에서 출발해 세계로 퍼져 이제서야 우리에게 관심을 끌고 있는 “내셔널 트러스트(국민신탁: national trust) 운동”과 닮아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가 무엇보다 공익을 바탕으로 한 공동성의 실현이 주요한 관심인 점을 감안하면 황폐해 가는 이 땅의 흔적을 지킨다는 배경을 안고 있는 출판단지의 조성은 여타의 다른 직능의 사업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던지고 있다.

지구 환경 보전의 실천적 운동이 이 시대의 주요한 화두인 만큼 자유로를 따라 선형으로 샛강을 끼고 조성되는 단지의 입지 여건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파주의 출판단지에 인접한 야산에는 이 지역 유지라는 사람이 운영 하는 러브호텔과 음식점이 국적불명의 모습을 뽐내며 들어서 있어 앞으로 단지가 완성되었을 때 예견되는 부조화가 벌써 우려를 낳고 있다. 출판단지 조합원들이 단지를 감싸고 흐르는 갈대샛강을 살리는 환경운동을 벌여온 것도 이 땅이 지닌 정체성을 지키면서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문화를 건립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런 제반 환경을 끌어안고 출판단지의 출발을 널리 알리는 정보센터가 세워짐으로써 이제 본격적인 단지조성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높게 서 있는 전망대는 속도 빠른 자유로와 그 주변 환경을 지키는 파수꾼이면서 동시에 단지가 조성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또한 이는 단지 조성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의지를 가다듬는 지표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사업을 추진해 가면서 그 주체들이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그들만의 공동체로 울타리를 두르지 않고 넓게 끌어안는 열린 의식이라 하겠다. 우리네 사회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의 병폐를 그들이 누구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을 터이므로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벌이는 지식산업이니 출판문화니 하는 명분이 실질적인 문화 인프라로 작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화 프로그램으로 드러날 수 있는 참신한 기획 또한 단지 조성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보듬어야 할 짐이다.

이주연 건축비평가, 월간 『건축인POAR』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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