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3월 2001-03-01   1102

무너진 종신고용제, 신노동운동으로 활로 모색-박영삼

일본의 비정규직 운동

지난 호에서 우리의 노동시장이 점점 더 미국화 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기업주들은 사실 더 오랜 세월을 일본(See Japan!)으로부터 배워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이다.

1995년 5월에 발표된 일경련(日經聯)의 ‘신 일본적 경영시스템 연구 프로젝트 보고’는 그런 측면에서 비정규직의 대거 양산을 통해 종신고용 관행과 노동조합을 동시에 무너뜨리려는 한국의 사용자들에게는 하나의 ‘모범 교과서’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일경련은 과거 일본 기업의 노사관계를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종신고용-연공임금 체제를 파괴하는 대신, 기업의 노동력을 핵심간부 중심의 ‘장기축적능력 활용형’과 전문분야를 담당시키는 ‘고도전문능력 활용형’ 그리고 ‘고용유연형’ 등 3개 그룹으로 분리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고도전문능력 활용형’은 임시직이나 계약직으로 채용하고 ‘고용유연형’은 파트타임이나 파견노동자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 즉, 기존의 기업인력 가운데 핵심부문을 담당하는 극히 일부만을 정규직으로 유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새로운 노동력 관리전략의 기조로 제시했던 것이다.

일본 여성 노동자의 53.8% 비정규직

그후 5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고용 상황은 불황의 장기화, 기업의 구조조정 인원삭감이 강행되면서 고용의 불안정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완전실업률은 5% 수준으로 계속 악화되고 있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층과 여성, 노령 노동자들이 점점 더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있다. 총무청의 노동력 특별조사에 의하면 비정규 노동자의 전체적인 규모는 2000년 2월 현재 파트타임이 719만 명, 아르바이트가 359만 명(일본에서는 직업적으로 아르바이트에 종사하는 사람을 ‘프리터’라고 부른다), 파견/촉탁 등은 195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26%가 비정규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10년 전인 1991년의 수치와 비교해보면, 427만 명의 신규 취업자 가운데 정규직은 9만 명에 그친 반면, 나머지 418만 명이 모두 비정규직으로 채워졌음을 의미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층의 비정규화가 두드러져 여성 노동자의 53.8%, 약 1,000만 명이 비정규직으로 고용돼 있는 상황이며, 청년층의 프리터는 150만 명을 넘고 있다. 신규 대졸자 가운데 20%가 파트타임으로 채용되고 있으며, 파견 노동자도 25세부터 29세까지의 연령대가 28%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흐름에 대한 노동조합이나 사회운동의 대응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오랜 노사협조주의 관행과 대기업의 정규직 중심 노조운동 전통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관한 각성을 둔화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류코쿠대학의 와키타 시게루(脇田 子) 교수 같은 개인의 선구적인 노력들이 조금씩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지역노조와 일반노조를 중심으로 파트타임, 유기고용, 파견노동 등 각각의 고용형태별로 네트워크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전국적인 ‘신노동운동’으로 발전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60년대 학생운동 세대인 와키타 시게루 교수의 활동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는 1996년에 ‘파견노동자 110번’(http://www.asahi-net.or.jp/~RB1S-WKT)이라는 인터넷 상담사이트를 개설하고 직접 3,000건에 달하는 노동자들의 상담에 일일이 답신을 보내면서 비정규 고용에 관한 노동조합의 관심과 조직화 노력을 촉구해왔다. 그는 법률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나태한 미네르바의 올빼미’로 남기보다는 비정규 노동자의 인권침해에 온몸으로 맞서는 ‘벌레’가 되기를 자처한 사람이었다. 그는 파견문제 이외에도 ‘유기고용 네트워크’와 ‘직장의 인권 연구회’, ‘사회보장법 학습회’ 활동 등을 이끌고 있다.

전국적 신노동운동으로 발전하는 일본 비정규직 운동

노동조합 차원의 활동으로는, 전노련(全勞連) 산하의 ‘파트임시노동조합연락회’와 사회당 계열의 전노협(全勞協) 산하 조직으로는 전국일반노동조합(全國一般勞動組合)의 활동이 돋보인다. 파트임시노동조합연락회는 기업 및 산업 차원의 비정규노동자 조직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세우는 작업과 함께 파트타임노동법에 ‘균등대우’ 조항의 명시, 이와 관련한 ILO 조약의 국회비준, 그리고 전국일률최저임금제의 확립 등을 주된 요구로 내걸고 있다. 올해 5월에는 ‘전국파트임시노조 전국교류집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전노협의 전국일반노조의 경우에는 중소기업, 외국인, 실업자 등 여러 형태의 주변부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벌이면서 다양한 네트워크 형성 운동 등을 통해 다른 노동조합 및 시민단체들과의 연대활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최대 노총인 렝고(連合)는 아직 비정규 문제에 관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균등대우 2000 캠페인 본격화

이밖에 지난해 여성단체와 ‘균등법네트’, ‘일하는여성을위한변호단’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균등대우2000 캠페인’이 비정규 노동자 문제에 관한 여론 환기와 범사회적 연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 역시 지난해 3월 11일에 개최된 대규모 집회를 계기로 노동조합 조직들과 함께 동일노동ㆍ동일임금, 차별금지 등의 원칙을 일본의 노동법제에 명시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가고 있다.

한편 단위노조로는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고 파트타임이나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는 ‘프리터’ 젊은이들이 결성한 노조인 ‘수도권 청년 유니온’이 눈에 띈다. 30세 미만의 젊은이라면 직종이나 고용형태를 불문하고 누구나 이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데, 이 조합의 조합원 평균 연령은 25세 정도로 패스트푸드점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파트타임직이 대부분이다.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토리 위원장은 “작년 봄 대학을 졸업한 후,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부당한 차별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없었다”면서 젊은이들만의 노조결성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노동운동의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은 “노동법이나 조합 활동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초보자”라면서도 “일반노조의 지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학습도 꾸준히 해서 잘못된 일본 사회를 바로잡고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되돌려 주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이들의 작은 노력이 모이고 모여 과로와 무력감에 짓눌려 있는 일본 사회의 어둡고 무거운 빗장을 걷어낼 수 있을지 주목할 일이다. 그리고 일본의 예가 여전히 한국 사회 보수주의자들의 참고서로 쓰이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그들의 활동에 연대와 지지를 보내는 일도 우리가 해야 할 귀중한 운동이 될 것이다.

박영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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