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3월 2001-03-01   1079

네팔공동체에서 뻗어나간 사랑의 학교

네팔로 돌아가 "배움의 공동체" 설립한 이주노동자 모노즈

지난 8년 간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만나왔다. 필자가 처음 임금 체불 건을 접수받아 도움을 주기 시작한 사람들이 네팔인들이었다. 림부, 채트리, 타망. 그들은 10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두 사람은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경찰관의 거짓말 때문에 강제추방당하고 말았다. 나의 실수였다.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복지관장 일을 맡아야 했다. 30년 전 독일과 오스트리아 선교사들은 한국 근로청소년들의 학업과 복지를 돕는 일을 했다. 그 혜택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또 이향 근로청소년의 보금자리였던 복지관을 운영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도와야 할 때라는 의무감에 시달리게 됐다. 더 가난한 나라를 돕는 것이 오랜 세월 우리를 도와준 독일 ‘은인’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2001년 1월 나는 그 의무감에서 약간은 해방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학교로 가는 길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진흙을 그대로 구워 만든 붉은 벽돌집들이 대부분이다. 낡은 건물이긴 하지만 언덕 위에 올라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면 자연의 색깔 그대로인 건물 벽이 강한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난다. 높은 빌딩이 많지 않으며, 넉넉한 공간에 배치된 집과 집 사이로 나무들이 우거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높이 솟은 것이라곤 기도의 상징인 탑들뿐이다. 힌두탑과 불탑이 나란히 키를 재고 있으며 동이 트기도 전 이른 새벽부터 그 탑 아래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네팔인들이 보인다.

카트만두 외곽에 자리한 달루(Dallu)는 불교사원들이 마을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을 만큼 사원과 사원으로 길이 이어진다. 한낮의 예불은 경 읽는 목소리와 북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우뚝 솟은 탑에 그려진 진리의 상징 붓다의 눈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본다. 진리의 눈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 걷다보면 거룩한 사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동네가 들어온다. 여긴 푸줏간 거리.

늘어선 고깃간에 닭과 양 그리고 염소들이 희생당할 준비를 하며 목을 축 늘어뜨리고 있고, 이미 저승으로 간 짐승들은 빨간 살을 드러내놓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상점 사이사이 골목을 누비며 맨발의 아이들이 뛰어논다. 아이가 아기를 업고 돌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오빠나 언니의 등에 착 붙은 아기들은 보챌 줄을 모른다. 네팔의 아이들은 순하고 조용하다. 몸집은 작지만 눈은 크고 깊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몇몇 푸줏간을 지나면 학교 현판이 나온다. ‘Future Star English School’. 도저히 학교가 있을 자리는 아닐 듯한데 이름이 있으니 학교라고 인정해야 한다. 허름한 건물의 학교 옆과 뒤에는 비슷한 사정의 사립학교들이 자리하고 있다. 네팔 제도교육의 불안정을 말해주는 예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네팔사람들은 뭐라 할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충실하다는 항변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문으로 들어서니 마당 한 귀퉁이에 서 있는 나무가 그나마 위안이 될 매우 초라한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낡은 학교를 지키고 선 교장선생님, 모노즈 쉬레스타 씨는 환하게 웃으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교장선생님이 된 이주노동자

지난해 여름 허물어져 가는 학교를 인수하여 새롭게 단장하고 있는 모노즈 씨는 한국에서 7년 이상을 일하다 귀국한 이주노동자였다. 80년대 초반 네팔의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 트리부반 대학교의 경제학도였던 그는 이른바 학생운동으로 2년 간 다닐 과정을 4년 만에 마치고 일단 학교를 쉰 다음, 다시 시작했다. 결국 85년 이후 2년을 더 공부해 4년 과정의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학생운동 전과(?)때문에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은행과 학교를 전전하며 일하던 중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에 가담하느라 직업생활을 안정적으로 할 수 없었다. 민주화를 위한 발걸음이 막 시작되던 1992년 1월.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한국에 왔다. 그리고 그 당시 시위에 가담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제각각 들어와 만나게 되면서 이들은 네팔 공동체를 조직하는 주축이 되었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된 모노즈 씨는 초기에는 공장에서 일하였고, 한국말을 익힌 후부터는 공사판에서 일했다. 장시간의 노동과 휴일의 불규칙함, 그리고 공장에서 요구하면 언제든 해야 하는 야근과 연장근무 등 공장노동은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희생하게끔 했다. 희생의 대가는 너무 적었다. 임금체불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부도’란 말에도 익숙해져 문 닫은 공장에서 기대할 것이라곤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이 전부였다. 공사현장에서 일하기에 큰 무리가 없을 만큼 한국인처럼 생겼고 점차 한국말에 익숙해진 모노즈 씨. 그가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씨에 따라 혹은 일감에 따라 쉴 수 있었고, 일당도 제법 높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그런 이유로 고난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공사현장 인부로 업종을 전환했던 것이다.

한국에 이주노동자들이 급속히 늘어나던 때, 네팔 노동자들도 많아지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도 커졌다.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과 해외에 있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자신들이 미약하나마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회보를 발행했다. 그리고 1993년 1월, 네팔공동체를 결성했다.

1년을 임기로 제5대 회장이 된 모노즈 씨는 1996년부터 1998년 8월 귀국하기 전까지 이 조직체의 중심 역할을 했다. 문화행사 주최, 회보발행, 환자방문과 연대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어느 해, 삼복더위에 만난 그와 삼계탕 한 그릇 하자고 음식점에 갔으나 그는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움직이는 사회복지센터’였다. 수많은 네팔인들이 제각각의 이유로 전화를 하는 통에 언제나 이동전화는 손 안에 들려 있었다. 전화의 방해 없이 대화가 가능한 시간은 늦은 밤부터 새벽녘 사이. 자연히 그와의 약속은 늦은 시간으로 잡혔고 대화는 밤 깊은 줄 모르고 이어져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때도 더러 있었다.

조금 여유 있게 만날 수 있을 때마다 물었다.

“돌아가면 뭘 하고 싶소?”

“사회복지요. 안양전진상복지관 같은 게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그의 사심 없는 인품과 활동에 감동받곤 했던 나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할 일이 꼭 있다는 것과 필요한 건 하늘에서 꼭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나누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상상의 프로젝트를 하나 근사하게 그려낸 다음 끝나곤 했다. 어느 날, 속 깊은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고백을 했다. 자신은 지금 돈이 한푼도 없노라고. 땀이 밴 돈을 고스란히 고향으로 송금했는데 그 돈은 철없는 남동생의 허영을 채우는 데 모두 사용됐다는 것이다. 유럽으로 가고 싶어하는 동생이 정확한 정보도 없이 형이 보낸 돈의 통장을 관리하며 독일로 가기 위한 온갖 비용으로 써버린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학교도 포기한 동생의 방황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조차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5년 간 보낸 돈은 그렇게 사라졌고, 그 이후부터는 돈을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었다. 돈을 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IMF 시기에 갑자기 내려간 일당으로는 활동비를 조달하기에도 부족했다. 일거리 자체도 갑자기 줄어 외국인들은 일할 기회조차 갖기 힘들었다. 네팔공동체 회장뿐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코당지역 사람들이 만든 단체의 일에도 관여하던 그는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왔음을 인정해야 했다.

7년 간의 한국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남은 것은 한 권의 수첩뿐이었다.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의 연락처와 일기를 기록한 노트. 이것이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다. 그러나 보배단지, 그 노트는 귀국하던 중 홍콩에서 분실됐다. 결국 거의 빈손인 나그네로 귀향해야 했다.

네팔을 사랑하는 사람들

김옥규 씨는 사회사업을 공부했다. 그러나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바로 결혼하여 대가족의 맏며느리가 됐다. 자신의 가정 일 외의 활동이라면 집 가까이, 시장 가는 길에 자리한 안양전진상복지관에서 봉사하는 것이었다. 한글학교 자원교사로 일하면서 복지관의 직원들과 한 식구가 되어 복지관의 이런 저런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으로 받아들인 그. 학비 없는 여학생의 장학금 몰래 대주기,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행사 때 부식 사주기, 운동하느라고 소홀한 아이들의 공부지도, 뒤늦게 한글을 배우러 온 정신장애 여성에게 개별학습 해주기 등 조용하게 빛을 발했다.

네팔 코당지역 노동자들이 큰 문화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복지관에서 진을 치고 있을 무렵, 그는 외국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특히 네팔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김씨는 네팔의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보낼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당연히 모노즈 씨를 소개했고, 두 사람은 마치 오누이가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모든 이야기를 막힘 없이 이어갔다. 네팔의 어린이들이 1년 공부하는데 드는 학비가 원화로 8만 원이면 된다는 말에 단 몇 명에게라도 장학금을 지원하겠다는 소박한 약속을 하면서 학교의 밑그림이 시작됐다.

네팔 어린이 1년 학비 원화 8만 원

네팔에 대한 사랑은 아들과 딸 그리고 오빠와 동생 등 가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어느새 그들 또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를 찾게 되었다. 합동의 기도는 장학금에서 학교를 만드는 것으로 커져갔다. 친구들도 가세했고, 하숙하는 학생들조차 용돈을 절약하기 시작했다. 김옥규 씨에게 영어를 배우는 복지관 성인학교의 아줌마 학생들도 네팔의 어린이들을 위해 학용품을 모으고 옷가지를 챙기는 등 주변에서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아진 돈이 모노즈 씨에게 전해져 학교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교육으로 접근해 성인 교육까지 할 수 있는 사회복지관 설립을 계획하며 빈손으로 돌아간 모노즈 씨의 고향은 에베레스트 근처이다. 그는 네팔사람들은 히말라야의 흰눈이 녹아 내려오는 차고 맑은 물을 마시며 살기 때문에 모두들 마음이 깨끗하고 바르다고 말하곤 했다. 언덕에서 만년설이 덮인 에베레스트 거울처럼 자신을 비춰주는 그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저절로 명상하게 된다고 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좋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일이다. 그래서 학교사업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고향인 코당지역을 비롯, 여러 지역의 동창생과 친척들로부터 추천받은 고아, 천민의 자식들 혹은 부모가 감옥에 있어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현재 37명의 어린이들이 무상으로, 110명의 어린이들이 약간의 학비를 내고 있단다. 무상으로 공부하고 있는 어린이 중 22명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물론 기숙사비도 무료다. 돌볼 사람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며 공부시키는 것은 보통의 아이들보다 몇 배의 비용이 드는 일이다.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병원비는 물론, 마음의 위로와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고 필요한 것들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감기와 피부병, 동상에 걸려 손과 발의 가려움증으로 고생하고 있어 피부약과 감기약 그리고 항생제 등이 많이 필요하다. 심하게 아픈 아이들은 병원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 모노즈 씨도 학생들과 같이 식사하고 방과후에도 가끔 학습지도를 하면서 기숙사에서 같이 밤을 지내기도 한다.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이야 학교 이외에 갈 곳이 많지 않으니 괜찮은데 집에서 다니는 학생들은 결석이 잦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해서 가정방문해 보면 하는 일 없이 그저 놀고 있는데도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를 왜 매일 가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이 학교에 오도록 하는 것도 교장선생님이 할 일 중의 하나이다.

모노즈 씨가 문 닫기 직전의 학교를 다시 일으켜세우면서 마음을 가장 크게 쓴 부분은, 무엇보다도 동료교사들이 학생들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우선 잘 가르치고 수업준비를 철저히 할 것,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대할 것 그리고 적은 수입으로도 기쁘게 일할 것을 당부했다. 학교의 운영자가 바뀐 이후 그대로 남은 교사들과의 관계맺기도 쉽지는 않았다. 지난 학기에 시험 준비를 위해 자신이 먼저 치밀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 교사들이 본받도록 솔선수범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현재 고민은 교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작업이다. 또한 운영위원들과 학교발전 전망을 세우는 사업과 지역사회에 학교를 알리는 것도 그의 일이다.

한국에서 같이 일하고 활동한 친구들이 운영하는 학교들과의 교류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카트만두의 교외에서 제법 탄탄하게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그들과 경험을 나누고 교사 교육을 같이 계획하는 것도 앞으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다. 한국에서의 체험이 가르쳐준 ‘빨리 빨리’가 아니라 천천히 가는 것, 그래서 교사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걷는 것을 그는 원한다.

줄수록 깊어지고 커지는 사랑

한국생활 7년을 통해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그는 일단 열심히 일하는 것은 분명히 배웠다고 한다. 나이든 이들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하면 된다는 것,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일을 하되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의미 있음을 깨달은 게 한국생활 7년이 준 소득이라고 한다.

방학이 되었지만 집으로 갈 수 없는 학생을 데려와 같이 살면서 돌보는 그의 부인 또한 가장 훌륭한 협조자이다. 천민 계급이 엄존하는 그 사회에서 차별의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분명 아닐진대 그의 아내 비니타는 짜증 한번 안 내고 학생들을 대한다. 비록 낡은 교실에 허름한 책걸상, 거칠고 작은 칠판, 좁은 마당 등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지만 날마다 조금씩 변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사랑이 커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줄수록 깊어지고 커지는 사랑. 몸소 실천할 수 있는 장이 있음을 감사하면서 오늘도 그는 아침마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 있을 것이다. 네팔에는 할 일이 아주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과 함께….

이금연 |국제카톨릭형제회 A.F|·안양 전진상복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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