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7월 2004-07-01   824

과거사 청산 통해 용서와 화해의 길로

친일진상규명법, 문제점과 개정 방향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특별법’(이하 친일진상법)이 진통 끝에 지난 3월 2일 16대 국회를 힘겹게 통과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언론들이 보도한대로 이 법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태어났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첫째, 조사대상을 대폭 축소 또는 제한함으로써 사실상 진상규명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둘째, 조사 대상자와 가족 등 이해관계인들의 이의신청 권한과 보호받을 권리, 의견진술권, 증거자료 열람 청구권 등은 대거 신설하거나 강화시킨 반면, 위원회의 조사권한은 각양의 단서를 달아 규제함으로써 적극적인 조사활동을 사전에 위축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해 보인다. 셋째, 위원회 조직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원 추천권을 국회가 행사하게 해 놓아 그간 입법을 방해해온 다수당의 의중이 반영될 소지가 짙어졌다. 넷째,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위헌적 요소(연좌제 부활, 언론출판의 자유 침해)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법은, 본 취지인 친일진상규명은 뒷전이며 오히려 그 조사 대상자들에게 합법적으로 책임을 회피시켜줄 수 있는 친일진상규명저지법이 되고 말았다. 물론 17대 국회의 제1당인 열린우리당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법개정에 의지가 확연하고, 지난 5월 관련 학계, 법조계, 사회단체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시민연대(공동대표 강만길 함세웅 최병모, 이하 시민연대)’측 안을 그대로 받아 제출키로 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러면 시민연대가 제출한 개정안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아닌 과거청산이 목적’

개정안의 가장 큰 특징은 부일협력행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기초로 하여 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하게 했다는 점이다. 구법이 조사대상자를 먼저 결정한 후 진상규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사영역을 크게 제한한 반면, 개정안은 선 조사 후 반민족행위자 판정의 원칙을 관철시키고 있다.

개정된 주요내용을 보면 첫째, 반민족행위자 규정의 범주를 확대시켰다. 고등관(예: 군수, 경시, 소위) 이상을 모두 지위에 따른 당연범으로 포함시켰으며, 전국 차원.중앙 등 단서조항을 삭제하여 지역의 극악한 반민족행위자가 빠져나갈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또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도 병기하여 반민족행위의 범주를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우리 민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제3국(연합국, 일제 식민지피해국.피침략국) 또는 제3국인의 항일에 대한 방해나 탄압도 일제에 복무했다는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반민족행위로 간주된다는 논리이다. 당연히 사회주의 계열과 연합군에 대한 적대 행동도 조사 범위와 심사대상에 들어가게 됐다.

한편 개정안에서는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학술.문화.예술.언론.교육.종교 등 사회 각 부문의 반민족행위자를 포괄적으로 적시하여 이에 대한 엄중한 조사를 예고하고 있다. 민족문화의 파괴.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반출에 관한 조항이 신설되는 등 전체적으로 보아 정신세계에 악영향을 끼친 부문에 더욱 강도 높은 책임을 물은 것으로 분석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자를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국제법의 흐름을 반영하여 고문.학살.강간 등 보편적 인권에 대한 범죄를 중시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 반민족행위자 판정과정과 절차를 대폭 강화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진상조사, 심의, 의결의 3단계를 두고 심사위원회를 신설했다. 구법이 위원회에 전권을 부여하고 있었던 데 비해, 학계와 법조계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심사위원회의 심의과정을 추가함으로써 최종 판정에 앞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검증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또 반민족행위자 선정에 있어 특위의 의결정족수를 재적위원 2/3로 함으로써 결정의 무게를 더했다. 친일반민족행위의 전력이 있다 하더라도 뒤에 반일행적이 뚜렷한 자는 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구제할 수 있게 하여, 정상참작의 여지를 둔 점도 구법과 달라진 내용이다.

셋째, 위원회의 권위와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각종의 방안을 강구했다. 우선 부실조사를 피하기 위해 조사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렸다. 국회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어 있던 특위 위원은 대통령 직속기구의 취지를 살려 국회 추천과정을 삭제했고, 위원장과 상임위원 2인은 정무급으로 보임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위원회를 관장할 수 있도록 했으며, 사무국은 조사범위에 따른 요원 수의 확대를 감안하여 사무처로 격상시켰다.

한편 위원회 업무의 특성상 빚어질 수 있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변보장과 보호에 관한 조항과 위반시의 처벌규정이 대폭 강화되었다.

넷째, 효과적인 조사가 가능하도록 강제조항과 처벌규정을 마련했다. 소환에 불응하는 조사대상자에게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게 했으며, 관련기관의 자료협조 의무를 명시했다. 특히 해외조사와 외국 소재 자료 확보가 필요할 경우에 대비하여 관계부처와 해외공관의 협력 규정을 신설했고, 이를 위반할 때의 처벌도 강화되었다.

다섯째, 진상조사 신청과 피해신고를 받도록 했다. 1948년의 반민특위도 조사의 단서를 상당 부분 제보에 의존하였던 바, 반세기가 넘은 지금 증언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사신청과 피해신고, 이에 따르는 보상 실시는 진상규명에 결정적인 촉진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위원회의 임무가 끝난 후 성과의 활용 방안을 구체화했다. 조사결과 얻은 성과물과 자료 물품 등을 보존하고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역사사료관의 건립과 과거사연구재단의 설립이 그것이다.

다시 쓰게 될 역사의 한 장이 될터

시민연대의 개정안 기초소위는 해방공간의 친일파 처벌 규정안에서부터 최근의 각종 법령과 학계의 연구성과를 세밀히 검토하고 여러 차례의 토론을 거쳐 개정안 초안을 작성했다고 한다. 기초소위는 무엇보다도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췄다. 부일협력행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통한 사실관계의 확인과, 증거에 입각한 엄정한 반민족행위자 판정을 원칙으로 삼아 개정에 임했다. 관계자들은 처벌법이 아니라 학문적.역사적 과거청산을 목표로 하는 진상규명법인만큼 친일반민족행위 혐의의 기준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며, 반민법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문화예술인.지식인.군인 등의 경우 현재적 관점에서 판단할 때 오히려 책임이 더 무거운 측면이 있어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제 올 9월이면 역사적인 대통령 소속의 친일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탄생한다. 교과서에서만 배워왔던 반민특위가 이제 부활하는 것이다. 친일청산이 망자와 그 후손들을 욕보이고 응징하자는 취지가 아닌 만큼 차분하게 하나 하나 드러나게 될 역사적 진실 앞에 모두가 겸허해졌으면 한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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