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0월 1999-10-01   911

뉴밀레니엄과 남성페미니스트

바야흐로 베를리너들이 베를린에서 러브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뉴밀레니엄 시대의 주역을 자처하는 68세대의 자녀들이 통일 독일의 새로운 수도 베를린에 남 먼저 들어가 벌이는 축제의 제목이 ‘러브’이다. 그런가 하면 20세기의 대표적인 사회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울리히 벡이 『사랑은 지독한 혼란』 이라는 소설 제목과 같은 저서를 냈다. 『제3의 길』로 유명한 안토니 기든스가 “ 성 사랑 에로티시즘”이라는 저서를 낸 것은 이미 다 아는 일이다. 사랑이 여성 멜로드라마의 점유물이 아닌 한 시대를 대표한 대표적 지성인 남성의 연구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보로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사랑과 에로티시즘을 다룬다고 해서 울리히 벡이나 안토니 기든스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사랑과 성이라는 말랑말랑한 주제를 딱딱하고 근엄하게 포장하는데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기의 드라마의 주된 시나리오는 사회주의가 제공하였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역사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출신계급을 뛰어넘은 사회주의자를 수없이 만난 바 있다. 우선 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 엥겔스를 필두로 이름없는 학생출신 농민운동가 노동운동가를 배출해냈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도 우리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워준 백인 지성인들을 얼마든지 꼽을 수 있다.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던 68세대의 백인 학생들도 드라마의 주역들이다. 그 뿐인가. 동물의 권리를 위해 싸워주는 인간들도 수없이 많다. 생태주의 이름 아래 몰려드는 수많은 인간들은 인권을 넘어 동물권 식물권도 옹호해준다. 그런데 유독 여성권을 위해주는 남성을 꼽기가 쉽지 않은 것은 웬일인가? 아직도 여성운동은 여성들의 몫이 되고 있는 것이 20세기를 건너기 어렵게 하는 마지막 걸림돌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남성 페미니스트와 더불어 20세기의 벽두를 연 바 있다. 그런데 20세기 말을 보내면서 존 스튜어트 밀을 능가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를 만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인지. 물론 자칭 남성 페미니스트는 많다. 지난번 대선 후보 공약 때 각 당의 후보들은 마치 경매장에서 좋은 물건을 서로 차지하려는 것처럼 서로 경쟁적으로 여성할당제 비율을 높여 불렀다. 한 후보가 30%를 얘기하면 다른 후보는 40%. 할당제를 주장했다가 얻어낸 것은 토큰제이다. 토근제는 여성이 양념으로 끼어야 한다는 데는 적어도 동의한다는 것이다. 남성간부 중심이었던 시민운동단체에도 남성 대표 2명에 여성대표 한 사람쯤은 끼워준다. 그런데 정치권이건 시민운동단체건 남성에 의해 토큰으로 초대되는 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성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잘못은 만 여성에게 쉽게 전가된다. 여성장관이 발탁될 때는 여성의 대표성과는 무관하지만 그 여성장관이 실책을 하게 되면 모든 여성을 싸잡아 비난하게 된다. 경기도 힐러리로 통칭되는 주혜란 씨, 밍크코트로 뭇여성들을 불쾌하게 했던 청문회의 여인들은 남성에 의해 초대된 여성이지만 그들의 잘못은 여성 전체의 몫으로 몰아간다. 그 결과 여성들은 같은 여성의 잘못에 민감해지고 차리리 동료 여성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고 그 결과 여성연대의 길은 멀어지게 된다.

기든스나 울리히 벡이 사랑과 에로티시즘을 연구의 중심으로 놓는다는 것은 심상한 일은 아니다.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사생활이라는 방파제가 이제는 적나라하게 상업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는 것, 국가 기업활동의 영역과 사적인 사랑과 연애는 다른 차원이라는 일말의 위안이 무너진 것이다. 세계를 둘러보면 그 사실은 명백해진다. 버마 타이 국경지대의 어린 소녀들은 국제 인신매매단의 현대판 노예가 되고 있다. 홍콩의 중산층 주부들은 하루에도 세 가지 네 가지 서비스노동을 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홀어머니들이 되어 가고 있다. 중국 본토로 수많은 기업 진출을 하면서 보다 값싼 현지처로 조강지처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으로, 아랍 산유국으로 가정부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필리핀 가정주부들, 그들의 빈 자리는 당연히 남아 있는 남편의 몫이다. 일자리를 찾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필리핀 남성들은 선물을 사들고 때로는 새 남편 새 애인과 환향하는 아내를 기쁘게 맞이해야 한다. 성역할 분업이 깨지고 남편과 아내의 신의 성실의 의무를 깨는 것은 기센 페미니스트들의 억지 때문이 아니다. 가정의 행복, 소박한 사랑의 맹세를 깨는 남녀 공동의 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영업사원으로서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성형 수술을 하고도 아내와 어머니에게 부끄러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관방을 돌며 전전긍긍하는 일본 남성의 고민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러브’ 퍼레이드에 참가한 150만 명의 유럽 젊은이들이 표방하는 새시대의 화두는 평화와 인권을 통한 인간사랑이다. 인간사랑의 회복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택하고 있는 수단은 상업주의 언론과의 전쟁 선포이다. 상업주의의 도구가 된 언론을 시민사회의 품으로 되돌리는 것을 이들의 주된 임무로 삼았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 시대를 마련하는 대안의 싹은 상업주의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무계산의 대안이 여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우연일까? 생계의 마지막을 책임지고 있는 여성과 어머니들이 먹거리 지키기,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유린되는 개인안보를 얘기하고 크리켓을 만들기 위해 베어내는 나무를 안는다. 인도의 나르마다 댐의 물이 차오는데도 마지막까지 고향집과 추억을 버리지 않고 버팀으로써 전세계 환경운동단체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도 여성들이었다.

1960년대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2의 성을 썼다. 뉴밀레니엄을 앞두고 『제1의 성』이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유럽에서는 몇 년 전에 『제3의 여성』이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제2의 성』을 통해 여성이 어떻게 열등해지도록 사회가 만들어 내는가를 썼다. 그런데 세기말을 앞두고 나온 『제1의 성』은 남성과 여성은 다르고 여성성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해내려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나온 『제3의 여성』도 일할 권리 사랑할 권리 어머니가 될 권리를 조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여성들이 이렇게 변화하고 있고 새시대의 주역이 되기 위해 이론적 실천적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을 남성들은 알고 있을까? 부디 뉴밀레니엄의 벽두에는 존 스튜어트 밀을 능가하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나올 것을 기대한다. 그 전 단계의 예비작업은 여성단체의 3인 공동대표중 2명쯤 남성이 되어야 하고 환경운동단체 권력감시단체 등의 시민운동단체의 대표 2명은 여성 1명은 남성으로 하는 시민운동 내의 성별분업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은 국가권력 반부패를 얘기하고 남성은 성폭력을 거론하는 것이 시작이 아닐까 한다. IMF, WTO 협상의 결과를 여성의 언어로 번역해 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이제는 인도의 시골 아낙네도 자신의 삶을 뒤흔들고 있는 IMF, WTO 협상에 개입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20세기의 역사적 오류는 대부분 내용없는 구호로서의 진보에서 비롯되었다. 소위 새 피로 거론되는 386세대에 조차도 왜 여성은 없는 걸까? 새천년 맞이는 내용있는 구체적 진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고 싶다. 구체적 진보는 너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있다.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있고서야 진짜 진보정치, 진보적 시민운동도 시작되는 것이다.

이정옥 효성카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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