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0월 1999-10-01   1150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개같은 날의 오후

제각각의 온갖 여자들이 있다.

바닥에 질펀하게 주저앉아 담배 피는 여자,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든 여자, 술집여자, ‘협조’ ‘단결’을 외치며 나서기 좋아하는 여자, 애초에 남자였던 외로운 여자,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으론 뭔가 사정이 있을 것같은 음울한 여자.

이 모두는 처음부터 마냥 극성스럽고 무질서하고 심지어 막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쩔 수 없이 이그러지고만 우리 사회 여성들의 모습 그대로다.

불볕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바쁘게 일하는 식당여자. 그녀는 장사일엔 관심없고 그저 시원한 얼음물에 발이나 담그고 앉아 있는 남편에게 불만을 쏘아댄다. 의처증을 가장한 혐오스런 폭력을 저지르고도 “잘못했다”는 사정 조의 회유만을 앞세우는 남편에 대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었다”고 자조하는 여자의 표정은 차라리 긴 시간을 참다 못한 결연한 저항처럼 보인다. 일요일인데도 나와 일하라는 ‘박 부장’의 전화 뒷전에 “개같은 짓”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술집여자들은 오히려 힘이 넘친다.

이처럼 남편과 가정, 직장과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쌓고 사는 여자들. 그들은 영화속 ‘장미아파트’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일상을 죽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의처증과 폭력으로 ‘개같은 자식’ 제1호가 된 남자를 ‘과실치사’하고 아파트 옥상으로 내몰리는 순간 그들은 단지 일상에만 머물지 않고, 첨예하게 자기 자신과 만나 여성을 말하고 사회를 성토하며 비뚤어지고 왜곡된 일상을 내려다보는 ‘깨우쳐진 존재’가 된다. 실제 ‘살인혐의’로 아파트 옥상을 점거하게 된 그들은 이 사태의 심각성보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적 고통이 더 험악하다고 느꼈던지, 사건에 그리 집착하는 눈치는 아니다. 그저 그들은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부딪쳤던 사회적 차별과 부당함을 피해 잠시 옥상으로 출타해 있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검은 제복의 전투경찰. 그들은 여자들의 저항을 일순간에 없앨 수 있는 공권력을 능히 갖고 있지만 그들과 계속 신경전을 편다. 긴급한 이 상황의 틈새를 비집고 아파트 담장을 기어오르는 두 명의 도둑. 이들은 이 모든 현실을 훔치려는 자들이다. 옥상 여자들은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현실을 통찰하듯 평화롭게 지켜본다. 이제 남자와 돈과 공권력과 그리고 일상의 맨 꼭대기 옥상에 모여 있는 그들. 여기에서 그들은 아래를 향해 야유하고 발길질하고, 심지어 오줌통을 부어댄다. 그리고 서로 싸우고 위로하고 이해하는 사이가 된다. 자신의 남편과 간음한 여자와도 그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이유는 ‘용서’나 ‘관용’ 따위가 아니라 똑같이 차별당하고 있는 ‘여성’이라는 동질감 때문이리라. ‘걸레같은’ 술집여자가 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게이’가 동등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도 모두 살인을 저지른 ‘공범’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다같이 다양한 형태로 얻어맞고 소외받는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있지만 자기가 없는 생활을 염려하고 챙기는 ‘어머니들’, ‘아내들’의 모습을 갖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다시 일상으로 내려온 그들. 공권력의 손을 잡고, 그동안의 남자들의 수고를 위로하지만, 이미 그들은 ‘이그러진 우리 사회의 여성’으로 살기 힘들 것처럼 보인다.

3년전인가? 이 영화를 보며 뭔가 신선하면서도 통쾌한 자극에 젖었다. 그저 시원한 게 좋았다. 바람 잘 통하는 도심 아파트의 옥상은 그 자체로도 시원하지만, ‘여성’을 넘어 ‘몹쓸 놈의 사회’를 향해 일격을 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신선했다.

끝을 가야, 스스로에게 첨예해져야, 우리는 일상의 실체를 만난다. 비뚤어지고, 쳐지고, 진실이 거짓이 되고, 법과 윤리가 거짓에게 이용당하는, 도둑이 주인되는 우리의 일상을, 우리들의 자화상을 꿰뚫어볼 수 있는 좋은 영화였다.

고유기 제주범도민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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