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3월 2009-03-01   1460

문강의 대중문화로 보는 세상_<꽃보다 남자>의 인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꽃보다 남자>의 인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드라마 <꽃보다 남자> 열풍이 거세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KBS는 물론이고, MBC나 SBS의 여러 오락 프로그램들에서도 <꽃보다 남자>를 패러디하고 있다. 또한 여러 종이신문과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도 연일 <꽃보다 남자>와 관련된 이슈들이 뉴스거리로 등장한다. ‘강마에’가 떠난 자리에 어느덧 그를 능가하는 ‘구준표’가 이 시대 새로운 ‘매력남’으로 등극했다. 유행은 언제나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고, 드라마 역시 그렇다. ‘구준표’와 ‘F4’ 역시 드라마의 종결과 더불어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왜 지금 <꽃보다 남자>가 ‘우리 사회의 화제거리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한 사회의 대중문화는 언제나 그 당시 사회의 작동방식과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거나 생산하면서, 동시에 대중의 욕망과 무의식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꽃보다 남자>는 한국 드라마의 오래 된 소재인 ‘신데렐라 이야기’의 반복이다. 세탁소집 딸로 상징되는 ‘서민’ ‘금잔디’가 우연히 ‘귀족’들의 학교인 ‘신화고’에 들어가게 되고, ‘신화고’ 최고의 엘리트 그룹인 ‘F4’라는 꽃미남 집단과 얽히며, ‘F4’의 리더인 ‘구준표’와 애증의 관계 속에서 그와 사랑하게 된다는 줄거리가 이를 말해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잔디밭’이 하늘 높은 ‘신화’와 엮이는 것이다. 3년 전에도 우리는 <궁>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서민 여자아이가 황태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이렇게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주제는 신과 인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들이 담긴 고대 그리스 신화나 중세의 민담, 근대소설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복의 고루함이 아니라, 이 반복이 어떤 새로운 요소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꽃보다 남자>가 이 전통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를 어떻게 2009년 식으로 변주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혈통주의’와 ‘엘리트주의’
 

드라마의 첫 장면은 한국 최고의 재벌 신화그룹에 대한 뉴스보도인데, 이 뉴스보도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신화고’라는 ‘대한민국 1%를 위한’ 학교에까지 이른다. 전자에서 식품, 주유소까지 문어발식으로 뻗어 있는 신화그룹이라는 재벌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설립한 이 학교는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역시 문어발식 교육을 펼친다. 최고의 재벌이 만든 최고의 학교, 그 학교에서도 최고인 ‘F4’.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1%의 1%’로 점점 작아지는 미분법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극소수의 집단이야말로 사회전체를 움직이는 권력체이다. F4의 리더인 ‘구준표’는 ‘신화고’의 리더이고, 그는 이후 신화그룹의 리더가 되어 한국의 경제계를 움직일 것이다. 이런 식의 ‘엘리트주의’는 ‘F4’라는 4명의 꽃미남들의 탄생배경이다. 이들 4명은 곧 ‘경제(구준표, 송우빈)’, ‘정치(윤지후)’, ‘문화(소이정)’를 대표한다. 이 꽃미남 고등학생들의 손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들은 모두 최고 권력을 쥔 아버지를 가진 아들들이다(가령, ‘구준표’의 누나는 신화그룹의 경영자로는 애초에 논외대상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전근대적 ‘혈통주의’와 ‘엘리트주의’야말로 이 드라마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배경’이 된다.

이 속에서 ‘금잔디’라는 서민은 ‘구준표’를 비롯한 ‘F4’와 친구가 됨으로써 어떤 계급적 화해의 가능성을 펼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 제스처일 뿐이다. 권력의 ‘혈통주의’와 ‘엘리트주의’에서 탄생한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지만, 아무리 포장해도 그것은 현실의 모순을 환상적으로 봉합할 뿐, 그것을 완전히 가릴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드라마는 ‘금잔디’의 가족을 통해 서민들이 얼마나 자본과 권력을 욕망하는지를 너무나도 솔직하게, 그래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그려낸다. 비록 ‘금잔디’와 ‘추가을’이라는 두 명의 서민 여고생은 정의로움과 순수, 자존심을 표상하는 것처럼 표현되지만, 사실 이들은 자신들이 변화시키는 ‘F4’를 통해 자본가와 권력가들도 사실 서민들과 다를 바 없는 따뜻한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에 불과하다. 계급과 권력, 혈통과 엘리트주의라는 강고한 선들은 현실에서는 그대로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 서민과 귀족은 사랑을 통해 서로를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재벌이든 서민이든 우리 모두는 사랑 앞에서 사실 다 따뜻한 심성을 가졌다고 외쳐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 이야기라는 외피 속에서 작동하는 <꽃보다 남자>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결여와 욕망의 아이러니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지금 <꽃보다 남자>는 ‘우리 사회의 화제가 되고 있는가?’ 왜 대중들은 이 드라마를 ‘막장’이라 욕하면서도 ‘F4’에 열광하는가? 이러한 현상에는 분명 우리에게 결여된 것들을 어쩔 수 없이 욕망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서민이지만 나도 부자가 되고 싶다, 못생겼지만 나도 ‘F4’처럼 꽃미남이 되고 싶다, 지금의 삶은 힘들지만 내게도 언젠가는 ‘해뜰 날이 올 것이다’와 같은. 이러한 욕망은 자연스럽고, 대중문화는 이러한 욕망을 일시적이고 환상적으로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결여 자체가 해소되지 않는 한 욕망 역시 끊이지 않는 것이고, 결여가 많을수록 욕망 역시 강렬해진다. 소위 막장 드라마들은 이렇게 강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력하게 무리수를 둔 작품들인 것이다. <꽃보다 남자>에서 표현되는 부잣집 아들들의 엄청난 재력과 이에 민망할 정도로 열광하는 서민 가족의 모습, 또 이를 연일 화제로 삼는 언론과 대중은 모두 엄청난 결여와 그에 따른 강렬한 욕망이라는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결여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꽃보다 남자>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있다. 갈수록 깊어지는 빈부격차,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 어떤 부모를 가졌느냐가 인생을 결정하는 전근대성, 돈과 외모가 성공의 열쇠가 되는 문화가 바로 그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좌절하는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오늘이야말로 <꽃보다 남자>와 같은 환상적 막장 드라마가 가장 인기 있는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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