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4월 2011-04-01   1451

기획-2011참여연재 5대 중점 과제: 시민사회 복지동맹으로 한국형 보편적 복지국가 실현

시민사회 복지동맹으로
한국형 보편적 복지국가 실현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집단적, 연대적, 공공적 전통이 취약한 한국 사회에서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사회 복지동맹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민사회 복지동맹은 조합이기주의적인 운동의 한계를 극복한 노동운동과 범사회적 시민사회단체의 보편적 연대와 견고한 지지의 결합으로 가능해진다.

이 글은 유럽 복지국가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요인들을 성찰하고, 그런 역사에 비추어 오늘날 한국 시민사회의 복지국가 운동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조건 위에 있으며, 어떤 과제를 어떤 전략으로 실현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

유럽 복지국가 발전의 세가지 조건

복지국가의 중요한 모델을 창조해낸 유럽 사회에서 복지국가의 발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크게 작용했다.

  첫째, 산업화의 초기 단계와 이후 대공황, 전쟁 등 중대한 사회적 위기 국면에서 빈곤과 실업, 양극화와 산업재해 등 사회문제들이 심각해졌다. 이런 문제 상황에 대해 노동계급은 불만과 저항을 표출했으며, 그에 대한 정치적·정책적 대응들을 통해서 복지국가는 몇 단계에 걸친 질적 도약을 경험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나라에서도 사회적 위기와 문제 자체가 복지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며, 조직된 민중 부문이 그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인지하고 불만과 요구를 분출했을 때 체제 변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둘째, 노조 혹은 정당 형태로 폭넓게 조직된 노동의 힘, 그리고 민중 부문 내부의 연대적 제도와 문화가 복지국가 체제의 성립과 발전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산별노조, 동일노동 동일임금, 노조가 운영하는 사회보장제도 등이 그 예다. 특히 보편주의적 복지국가 체제를 발전시킨 북구 나라들에선 처음부터 노조가 매우 높은 조직률을 갖고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강한 연대적 전통을 사회에 뿌리내렸다. 이런 조직적·문화적 전통은 사민주의 정당이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복지국가 체제가 상대적으로 쉽게 도입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역사적 조건이었다.

  셋째, 진보적 사회·정치세력들이 복지국가의 기획을 ‘국가적·국민적’ 개혁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내고, 동시에 국민국가와 민족주의를 사회민주주의적으로 전유할 수 있었던 곳에서 복지국가는 포괄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성격을 띨 수 있었다. 북구 나라들의 사민당과 시민사회 세력은 복지국가를 단지 특정 계급의 복지와 안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총체적인 국가개혁과 사회통합의 비전으로 만들고자 했는데, 바로 이러한 관점과 노력을 통해 폭넓은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여 보편주의적 복지국가의 비전을 현실정치에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봤을 때, 유럽에 있었던 것을 한국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유럽에는 있었으나 한국에는 없는 것은 무엇이며, 유럽에는 없었으나 지금 한국에는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판별해보자.

복지 실현 위한 집단·연대·공공적 전통 기반 미약

첫째, 한국에선 산업화 과정에서 강력한 노동조합과 노동계급 정당, 그리고 연대적인 제도와 문화적 전통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한국에서 산업화의 기초는 일본 점령기에 세워졌으며, 본격적인 산업화는 1960년대 이후 매우 짧은 시기에 이뤄졌다. 한국사회는 산업화 초기와 급속한 산업화 시기를 모두 극도로 억압적인 정치 환경 아래에서 보낸 것이다. 그래서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물질적 복지는 노조나 정당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의 위협과 도전에 의한 발전한 공적 복지체제를 통해 달성되지 않았다.

  그 대신 경제정책 위주의 국가정책과 성공적 산업화의 부산물로 얻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통해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생산주의적 복지체제가 공고화됐다(Holliday, 2000). 즉 조직된 노동의 힘이 성장하지 않은 채로, 경제성장의 성공에만 의존하는 사적 복지야말로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복지’라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선 유럽 복지국가의 중요한 기초였던 집단적·연대적·공공적 전통이 미약하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 위에서 1997년 한국사회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경험했고, 한국사회는 그 위기와, 위기에 따른 삶의 붕괴, 그리고 이후 10여 년 동안 심화되어 온 온갖 사회적 문제들을 복지국가 발전으로 연결시키는 데 실패했다. 위기가 학습과 계몽, 개혁의 계기로 되지 못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사회보장 제도가 꽤 확충되긴 했지만, 거기서 성립된 복지체제는 사회보험제를 통해 분절된 노동시장의 중심부를 보호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를 통해 최하위 저소득층을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범위한 인구층이 공적 복지의 틀에서 배제되어 있다. 이런 체제는 연대적 전통의 빈곤에서 초래한 바가 크며, 또한 오늘날 보편주의적 연대체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효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현실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복지국가의 메커니즘과 거시적 합리성, 복지국가의 삶을 거의 경험한 바 없다. 이는 복지국가를 지탱해 줄 견고한 시민사회 기반과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하며, 복지국가의 기획이 난항에 부딪칠 때조차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탄탄한 문화적 지반을 결핍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조건에서 시민사회의 복지국가 운동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복지국가 기획을 함께 추구하거나 지지해 줄 시민사회의 복지동맹 기반을 창출하고, 실제적인 개인적·조직적 네트워크로 공고화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복지국가’를 함께 만들어보고 싶다는 최소한의 공감대를 갖는 모든 사람과 집단이 만나서 공동의 인식, 공동의 열망, 공동의 주장을 구체화해야 한다. 이를 연대적 네트워크로 실물화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한국형 시민사회 복지동맹’의 형체를 만들어가야 한다.

시민사회 복지동맹: 노동정치+시민정치 이륜마차

한국에서 시민사회 복지동맹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져야 할 것인가? 한국에선 조직된 노동의 힘이 노동조합 조직률, 단협적용률, 상급조직의 하급조직에 대한 지도력 등 여러 측면에서 취약하고, 나아가 정부·정당을 압박할 수 있는 정치력과 국민들에 대한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선 한계가 더욱 더 큰 것이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산업구조와 계급구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서비스 사회로의 이행이 상당히 진행됐고 산업노동자층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으며, 광범위한 불완전 고용자층과 자영업자층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국에선 유럽과 같이 노동중심의 복지국가 전략만으로는 승산이 없다. 이것은 주어진 조건이다. 낮은 노조 조직률과 노동시장의 심각한 분절을 생각했을 때, 노조는 조합적 이익을 넘어 보편주의적 복지국가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지금보다 더 넓은 사회적 인정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에 능동적으로 연대함으로써, 노조 조직만으론 쉽지 않은, 정부·정당에 대한 정치적 압력 행사를 가능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된 민중운동, 민생운동 단체들이 없이는, 시민사회 복지동맹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단체들, 영세상인단체 등 다양한 민생관련 단체들은, 비록 유럽만큼 압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조건에 있진 않지만, 복지국가 기획의 사회적 토대로서 그 역할이 크다.

  한편 한국에선 노동의 힘이 유럽만큼 강하지 않은 대신, 유럽의 복지국가 역사에선 발견하기 힘든 한국사회 특유의 역사적 전통이 존재한다. 시민적 사회참여, 정치참여의 전통이 그것이다. 한국에선 이미 1960년대부터 계급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넓은 스펙트럼의 시민들이 민주화운동과 각종 사회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전통이 있다. 앞에서 한국사회가 연대적, 공공적 전통을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민적 사회참여, 정치참여의 흐름은 상당히 견고하게 발전해왔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이러한 활동적 시민사회가 정치와 정책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에 속한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크게 세 층위의 참여적 시민들이 존재한다. 첫째는 1990년대 이래 환경, 여성, 교육, 건강, 보건의료, 소비자, 평화, 청년, 권력감시 등 여러 의제 영역에서 성장해 온 시민운동 단체들이다. 둘째는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성장하고 확산되어 온 수많은 온·오프라인의 시민공동체들이다. 이들은 거주지역의 교육환경, 교통안전, 자연환경 등 생활상의 관심사, 혹은 언론공공성이나 개발정책 비판 등 정책적 관심사를 공유하는 시민모임들이다. 셋째는 2000년대의 세 차례에 걸친 촛불집회를 통해 그 정치적 폭발력을 입증한 시민정치의 에너지다. 평소에는 운동적 목표를 갖지 않는 사회적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있는 개인들이, 어떤 중요한 이슈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거대한 참여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이상과 같은 시민사회 세력들은 특정 계급의 집단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보다 넓은 틀에서 공공의 이익과 나라 전체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시민단체, 시민공동체, 또 시민정치의 참여자들은 제각기 다른 다양한 체험과 동기, 주장을 갖고, ‘복지국가’라는 커다란 집을 함께 설계하고, 건축하고, 장식해야 한다. 한국에서 시민사회의 복지동맹을 만들어갈 복지국가 운동은 지금까지 언급한 ‘노동정치’와 ‘시민정치’라는 두 바퀴로 굴러가는 이륜마차다. 서로 다른 조직기반, 서로 다른 운동경험과 운동양식을 갖고 있는 이 두 바퀴가 삐걱거리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의 고유한 처지와 전통을 존중하는 가운데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서로 각별한 배려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의 복지국가 비전 향한 보편적 연대·견고한 지지 필요

  끝으로 정당 차원의 복지동맹과 시민사회 복지동맹과의 관계를 보자. 복지국가 의제는 2007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창립 이후 시민사회의 복지전문가들과 운동주체들에 의해 선도적으로 담론화 되었다. 복지국가 논의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이 전문가 집단의 공헌이 매우 크다. 그런데 그 의제를 받은 것은 누구였는가? 정당들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의제가 큰 호응을 받은 이후 정당정치가 복지 의제를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추세는 2012년 양대 선거일정에 다가갈수록 더욱 강화될 개연성이 크다. 말하자면 지난 몇 년 간 한국에서 복지국가 의제는 전문가 집단에서 정당 세력으로 이동해왔다는 것인데, 전문가 집단이건 정당이건 간에, 이 다년간의 전개과정에서 일관되게 빠져있었던 것은 바로 복지국가 정치의 시민사회적 토대에 관한 질문과 행동이다.

  ‘복지국가 정치동맹’은 연합정치의 중요한 매개로 등장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유럽에서도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여러 정당들의 연합은 복지국가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문제는 그 연합정치의 중심이 사민주의 정당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민주당은 ‘진보’, ‘복지’, 그 무엇이든 표밭을 넓힐 수 있다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표밭을 제한한다고 느끼는 순간 다 버릴 준비도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표밭’에 보편적 연대와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광범위하고 견고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사회 기층으로부터 적극적이고 폭넓은, 조직적 혹은 집단적 행동이 나오지 않으면 정당들의 연합정치 논의과정에 복지국가의 비전을 압박할 수 없다. 민주당 중심의 연합정부가 설령 들어선다 해도, 복지국가로의 개혁 과정에서 시민사회가 목소리를 낼만한 정치적 지분이 없다. 시민사회 집단들이 각자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제각각 호소하는 식으로는 이 상황을 절대 돌파할 수 없다. 이제 시작되는 복지국가 운동의 참여주체들은 각자의 경험과 대안을 교류하고 조정하여 ‘공동의 복지국가 비전’을 만들어내고, 대안적인 나라비전을 추구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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