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4월 2011-04-01   1347

문강의 문화강좌-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 혹은 우리 시대의 응원가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
혹은 우리 시대의 응원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슈퍼스타 K2>의 놀라운 성공 이후 이제 공중파에서까지 각종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들이 들어서고 있다.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란 ‘죽음 혹은 생존’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에 놓고 이를 즐거움과 감동으로 감싼 오락 프로그램이다. 선봉에 서 있는 방송사는 MBC다. <위대한 탄생>은 가수의 꿈을 품은 이들에게 오디션 기회를 제공하고, 뽑힌 이들에게 유명 가수를 멘토로 붙여 ‘훈련’시킨 후 매주 절반씩 떨어뜨려 최종 1인을 ‘탄생’시키는 포맷이다. <신입사원>은 <위대한 탄생>의 ‘가수’ 자리에 ‘아나운서’만 대입시키면 되는, 동일한 뿌리를 가진 샴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이하 <나는 가수다>)는 아예 ‘서바이벌’이라는 단어를 타이틀로 내걸고 있는데, 앞의 두 프로그램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데 반해 각자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유명 가수들이 일반인 평가단의 평가에 의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이제는 ‘프로’라고 해서 안심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는 그런 점에서 ‘오디션’ 형식을 다시 거꾸로 세워 전문가들 간의 경쟁을 유발하는 ‘변종’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모두 일종의 ‘오디션’을 그 형식으로 삼고 있다. <코러스 라인>에서부터 <빌리 엘리어트>에 이르기까지, 오디션은 속성상 드라마틱하다. 목표를 가진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제한된 시간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후, 결과에 따라 갈리는 생사를 지켜봐야 한다. ‘신인가수 발굴’, ‘역사의 아나운서 선출’, ‘음악성 있는 대중가요의 부흥’ 등 각 프로그램이 말하고 있는 취지는 이 오디션이라는 드라마틱한 ‘형식’이 가진 매력에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야 만다.   

서바이벌의 재림

오디션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문화적으로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것이 오늘 한국인들이 처한 어떤 현실을 엔터테인먼트의 형태로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 자체가 하나의 ‘서바이벌 게임’인 상황에서 그것이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빌어 우리 앞에 찬란히 재림하는 것이 이상할 이유는 없다. 과거에 방송의 오락프로그램이 때로는 ‘교육’(<스펀지>, <비타민>), 때로는 ‘시민적 양식’(<느낌표!>) 등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적 경쟁의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면, 이제 오늘의 엔터테인먼트는 경쟁 그 자체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진리로 만든다. ‘바꿀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병영 슬로건은 이제 직장을 넘어, 각 가정의 거실을 채우고 있다. ‘가면’은 완전히 벗겨졌고, 그 속에서 경쟁을 추동해야만 작동하는 자본주의는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자신의 속살을 하얗게, 너무도 하얗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 드러난 속살은 너무도 ‘재미’있는 것이다. 마치 콜롯세움에 모여 검투사들의 혈투를 보며 열광하던 로마 시민들처럼, 텔레비전 앞의 대중은 <위대한 탄생>에서 누가 떨어지고 누가 붙었는지, <나는 가수다>에서 누가 탈락할지를 숨죽여 지켜보고, 그에 대한 ‘토론’으로 인터넷을 달군다. 이렇게 뜨거운 반응이 가능한 것은 이 프로그램들이 ‘희망과 절망’, ‘당근과 채찍’,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등과 같은 매우 단순한 이항대립의 요소들로 서사를 구성해 이를 30~40분 안에 극적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 단순함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대한 스케일이다. 수천 명의 일반인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고, 가수가 떠난 빈 자리 뒤에는 또 다른 유명 가수가 이미 대기하고 있다. 기존의 오락 프로그램이 방송시간 전체를 하나의 긴 이야기 흐름으로 끌고 갔다면,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는 ‘생과 사’라는 하나의 형식을 계속 반복하면서 거기에 무한히 새로운 얼굴들을 집어넣음으로써 가상의 새로움을 만들어 낸다. 마치 기계적인 안무를 반복하는 아이돌의 단순함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신인 아이돌에 의해 상쇄되듯. 그리고 이것은 역시 우리 삶의 모습 자체다. 대다수 한국인의 삶에는 <무한도전>의 기발함도, <1박 2일>의 여유로움도 없다. 있는 것은 <신입사원>의 긴장감, <위대한 탄생>의 경쟁, 그리고 <나는 가수다>의 탈락이다. 이 단순 반복이 주는 쉴 새 없는 경쟁과 긴장의 사이클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붙드는 엔터테인먼트

그런 점에서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들은 우리가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중에서)하길 바라는 체제의 응원가다. ‘미친 세상’에서 행복하려면 그 세상의 법칙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미치지’ 않고 ‘열심히’ 모든 경쟁을 도전과 꿈 삼아 치러낼 수 있다. 경쟁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긴장, 실력에 따라 철저히 갈리는 상벌이라는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의 모티프가 이 시대 한국인의 삶의 모티프가 될 때, 그래서 연대와 나눔과 저항이 인생 망치는 ‘미친 짓’ 취급을 당할 때, 마르쿠제가 말하던 ‘일차원적 사회’는 완성된다. 평가단의 투표에서 탈락한 김건모에게 동료 가수들의 눈물겨운 요청에 따라 재도전 기회를 부여했던 <나는 가수다>에 대한 대중의 성토를 보라. ‘가수를 놓고 서바이벌을 시키는 게 옳으냐’던 애초의 목소리들은 <나는 가수다>가 제공한 극적인 재미에 사라지고, 이제 대중의 분노는 ‘서바이벌’의 룰을 지키지 못한 PD와 해당 가수에게 향한다. 이렇게 경쟁과 상벌과 생존의 형식은 그것이 던져주는 짜릿함을 통해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로 변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엔터테인먼트가 하는 주요한 일이 바로 특정한 삶의 태도를 배치하고, 구성하고, 이식하는 일이다. ‘오락’을 의미하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의 어원이 ‘특정한 틀로 붙들어 두다’entretenir는 12세기 프랑스어에서 온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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