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6월 2004-06-01   954

“새로운 시작, 처음처럼”

본지 5월호부터 창립 전부터 현재까지 참여연대를 이끌어 온 사람들을 통해, 지난 10년 참여연대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참여연대 10주년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이번호는 참여연대 집행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에게 들어보기로 한다. 편집자주

돌이켜 볼 세월을, 그것도 회한으로 가슴을 치면서가 아니라 떳떳하거나 조금은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세월을 가진 사람들은 남들이 기억하지 못한 사소한 것들을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10년이라면 이제 겨우 그 시간의 흐름을 ‘세월’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지 말지 하는 기간이지만, 참여연대와 함께 한 10년은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이 많아 한 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줄줄이 끊이지 않고 나올 꾸러미가 여럿일 것이다. 여기 털어놓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흥미를 크게 일으킬 것이 못되는 것으로 내가 처음 시민운동이랍시고 본업인 의료나 건강문제가 아닌 일들을 부딪혀 가면서 개인적으로 인상이 강하게 남은 단편(斷片)이나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글로 남기게 된 변명을 하자면, 나보다 앞서 이 연재를 시작한 조희연 교수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하지만 참여연대 초창기에 참여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내가 사소하면서도 기억에 남아있는 일들과 느낌을 보여주는 것이 앞으로 참여연대 주역이 되고 주체가 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더 큰 원인일 것 같다.

10년 전과 비슷한 오늘

착각의 원인은 참여연대 창립 10년을 맞는 현재와 10년 전과는 닮은 점이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어쩌면 참여연대는 지난 10년간 새로운 시민운동의 전형을 만드는 데 한 몫을 했고, 그 특징은 소위 종합형 시민운동이라거나 대의시민운동(advocacy civil action)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듯 준 정당적 시민운동이라고 표현되어 왔다. 이제 17대 총선과 탄핵심판이 끝나 정치지형이 뚜렷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시민운동의 변화, 특히 참여연대와 같은 단체의 역할과 위상이 달라져야 할 것이라는 논의들이 이곳저곳에서 무성하다. 따라서, 이제 또다시 새로운 시민운동의 방향과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고 바로 그 점이 참여연대 창립 당시와 닮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의 미래는 회고담이나 일화를 반추해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분석과 탐구, 토론이 필요한 것을 기억과 인상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 그런 학문적이고 실천적인 고민은 전문가에게 넘겨버리고, 참여연대가 붙들고 늘어지며 돌격했던 중대한 과제들이 초기에 어떻게 접근했었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조금은 덜 겁먹고, 덜 주눅들어 접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꼭 내가 바라는 바대로 되지 않더라도 사실에 대한 큰 왜곡이 없고 혹 다른 사람에게 누가 안 된다면 그나마 실수를 줄이는 것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꿈 꾸는 사람들

참여연대를 만든 사람들은 시작부터 균일한 하나의 집단이 아니었다. 200명이 조금 넘는 회원으로 출발해 처음부터 공동대표제였고, 초대대표는 언론인 김중배 전 한겨레신문사장, 인권변호사 홍성우, 기독교운동가 오재식 당시 크리스챤아카데미 사회교육원장이 맡았다. 이러한 구성은 전통이 되어 오래된 시민운동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의 경험을 전수하는 역할은 오재식 원장을 뒤이어 박상증 목사가, 인권에 대한 관심과 사법개혁에 대한 희망은 홍성우 변호사를 이어서 공백이 있었지만 김창국 전 변협회장이, 그리고 법학자인 박은정 이화여대 학장이 이어 갔다. 그리고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의 몫은 언론인과 대학교수에게 맡겨져 김중배 대표에서 이상희 언론학 교수로 이어졌다.

대표를 빼놓고 보면 대학교수와 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회원의 절반이 넘어 조직의 간부와 전문위원.실행위원의 대부분을 맡았다. 실무를 맡은 청년활동가들과 청년모임 구성원들이 그 다음으로 다수를 차지했고, 인권운동 활동가나 보건의료 등 부문운동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지만 함께 했다. 의결기구인 운영위원회는 위원장을 초대 이삼열 교수에서 안경환 교수로, 그 뒤 내가 맡았다가 손혁재 교수로 이어졌다. 집행기구인 집행위원회는 안경환 교수가 위원장을, 부위원장은 창립의 핵심이었던 박원순 변호사와 조희연 교수가 맡았다가 안 교수가 운영위원장이 되면서 내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정책위원회와 시민위원회가 있었다.

참여연대 특징이라 하면, 창립 당시 처음으로 선보인 의정감시센터와 사법감시센터, 공익소송센터, 내부비리고발자 지원센터와 인권센터가 있었고, 이들 센터는 전문가인 교수나 변호사들이 실행위원이나 전문위원을 맡고, 상근 활동가와 시민이 함께 하는 참여연대식 센터활동의 전형을 만들어 갔다. 각 센터들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기 고유하고 독특한 업무와 과제를 갖고 있어 독립적으로 운영됐고, 처음부터 독자적인 재정관리에서 궁극적으로는 재정독립이 권장되었다. 지금은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것들이 회원이 불과 2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그때부터 추진된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대책없는 낙관주의자들의 행운이었을까?

내일을 위한 본격적 진행 시작

실제로 진행된 과정을 돌아보면 그렇게 적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일을 저지른 것은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름이 확정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새로운 시민운동을 하자는 사람을 만난 것은 1994년 봄에서 여름 사이다. 독일에 있었을 때 가까워진 박호성 교수와, 약간의 면식만 있던 조희연 교수와 박원순 변호사를 한남대교 남쪽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처음 설명을 듣고 참여제안을 받았다. 나는 소극적으로, 더 분명하게는 부정적으로 응답을 하고 헤어졌다. 우선 만난 곳이 호텔 커피숍으로 그때까지도 나는 그런 곳에 대한 출입에 일정한 거부감이 있었고 (아마 소주 마시는 삼겹살집이었으면 태도가 달랐을 것이다) 시민단체하면 그때 이미 이름을 날리는 경실련이 시민의 개념을 민중과 대립시켜 가면서 쓰지 않느냐는 혐의를 받고 있어 의심도 추가됐기 때문이다. 물론 소위 민주화라고 묶어서 표현하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나, 87년 이후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부문운동에서 나름대로 혁혁한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서도 냉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94년 즈음에는 소위 민중운동, 그중에서도 학생운동이 일정부분 침체에 빠져드는 시기여서 난파선으로부터 명분을 만들어 도망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며칠을 두고 생각한 후 여전히 고민 속에 연락을 했을 때는 박원순 변호사가 변호사 사무실을 접으면서라도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 때문에 참여하게 됐다. 이렇게 엄청난 대의에 함께 하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이 장소에 대한 호불호와 몇 사람의 열의와 헌신 때문이었다는 것은 나만의 경험이었을까?

참여연대 창립에 즈음하여 임원을 맡을 분들과 논의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부드러운 만남이었다. 굴레방다리 근처였던가 싶은데 이삼열 교수께서 마련한 자리에 대표와 중요 임원들과 정책위원장을 맡은 김대환 교수 등이 모여 반주를 곁들인 식사자리였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회의나(회의랄 것까지는 아니어도) 논의는 그런 자리보다는 치열한 토론이 벌어져도 좋은 사무실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또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 늘 농성장소였던 것에 비추어보면, 시민운동은 그렇게 각박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종교운동이나 민중운동을 함께 하면서 봐오던 교수나 변호사 이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이 적었던 나로서는 유연한 자세나 의견들을 다른 각도에서 제기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 됐고, 사법감시, 의정감시라는 새로운 과제를 배우게 하는 기회였다.

“참여연대의 미래를 만든 사람들”

정식으로 발족하고 나서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면서 참여연대에서 중추역할을 하는 활동가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친 젊은이들은 상근자로 또 열심회원으로 참여하여 사실상 참여연대의 미래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대훈, 김기식, 김민영, 이승희, 문혜진, 박원석, 이수효, 김선웅, 김은영 등이 용산시절 쥐벼룩과 싸우면서 사무실을 지키고 시민운동의 장을 넓혀온 이름들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셨던 유명종 선생님과의 만남도 잊혀지지 않는다. 건축업을 하시면서 문필가로도 활동하신 그 분은 사법피해자의 경험이 참여연대 창립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이한 경력의 초창기 임원으로 참여연대 전.현직 임원들의 모임인 대들보모임을 제안하셨고, 크고 작은 참여연대 행사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 분은 특유의 뚝심으로 간사들과 힘겨루기도 하시고 임원들과도 부드럽지만 강력한 의견제시로 참여연대가 쉽게 하나의 고정된 방향으로 쏠리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셨다.

나는 의사들의 모임인 인도주의실천의사회에서의 경험과 노동자건강을 과제로 하여, 보건의료 전문가와 노동상담 활동가, 그리고 노동자와 함께 하는 노동과 건강연구회에서 상당한 기간 활동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의사라는 특수한 직종만이 모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활동은 참여연대에서 임원으로 활동할 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양한 직종과 집단과 함께 한 노동과 건강연구회의 활동은 여러모로 참고와 비교가 되었다. 노동과 건강연구회는 전문가인 회원과 활동가인 상근자가 두 개의 바퀴가 되어 직업병과 산재 등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현장활동과 여론 형성이라는 두가지 방식으로 활동하여 직업병을 사회문제로 만드는 등 상당한 성과를 냈다. 지금은 노동자 건강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됨으로서, 현장활동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더욱 전문적인 조사와 연구, 정책수립 활동을 하는 노동건강연대로 전환돼 활동을 하고 있다. 참여연대와 노동과 건강연구회는 상근자와 전문가, 회원의 결합방식과 활동방식의 개발의 측면에서 비교가 된다. 상근자-전문가의 결합이 활동의 중심이 되어 버리면 점차 회원들의 참여가 형식적이거나 이벤트화 돼버려 생생한 활동력이 보존되지 못하게 된다.

참여연대, 새로운 길 열다

참여연대에서 제일 많이 한 일은 회의의 사회를 보는 것이었다. 매주 목요일 아침에 하는 상임집행위원회는 1주일간의 활동을 보고 받고 향후 일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별도 일정을 정해 때로는 1박 2일동안 논의하기도 했다. 물론 이 상임집행위원회는 창립 초기 다양하게 전개한 새로운 활동을 점검하고 틀을 잡는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참여연대가 성과를 올리고 시민의 호응을 받은 것은 센터들의 활동이지 조직체계나 회의구조나 진행방법이 아니었다. 특히 사회복지특별위원회가 만들어져 소송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생활 최저선이라는 용어를 사회에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의정감시나 사법감시처럼 표가 나지 않는 권력감시와는 다른 차원의 운동으로 자리잡게 하는 성과를 올렸다. 경제민주화위원회는 재벌기업의 임직원에 대한 손해배상소송과 주주총회 참석 등의 방식 등으로 경제개혁을 위한 새로운 운동방식을 만들어 냈다. 이처럼 꿈을 꾸는 사람들이 현실의 두꺼운 벽을 허물고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용산을 벗어나 안국동에 번듯한 사무실로 옮기고 느티나무 카페가 중요한 집회나 성명을 발표하는 명소가 되기까지 참여연대는 많이 성장했다. 그러나 이제 참여연대는 스스로 창출해낸 또 다른 권력을 헌납해야 한다. 웃자라거나 빈곳이 많은 곳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그러려면 회원의 바람과 참여가 달라지는 지금 다시 상근자-전문가-회원 세 축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처음처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보다 더 큰 미래를 약속해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끝으로 사족을 붙인다. 지난 2월 환경운동연합 대의원대회에서는 창립 때부터 10년간 근속한 활동가들을 포상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무려 17명이나 되는 활동가가 10년을 꽉 채우면서 일하고 있었고 그들이 무대 위에 한 줄로 죽 서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을 주었다.

우리도 참여연대 10년을 두고 한결같이 지켜온 사람들을 무대에 올리자. 그 분들의 성찰을 우리의 기둥으로 삼자. 그리고 다시 올 10년의 주인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새로운 시작은 또 다시 열의와 헌신에 끌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신명나서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낼 것이다.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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