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9월 1999-09-01   1173

자유로운 영혼,‘바람의 딸’ 한비야

“한비야, 이름이 참 예뻐요.”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변씨 아닌 게 다행이에요. 그랬으면 변비야가 되잖아요.”깔깔깔.

“혹시 어머니가 변씨 아니세요?”

“아니에요. 어머니 성까지 함께 쓰면 저는 한홍비야가 돼요. 더 예쁘죠?”깔깔깔. 또 웃음이 터졌다.

결코 거슬리지 않는 자신감이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현장, 그것이 한비야가 있는 풍경이다.

어떤 사람을 말로 설명하려 애쓰다 보면 가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말로 설명하다보면 밋밋해져서 그의 입체감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표현의 한계를 느낀다. 최근에 내게 그런 한계를, 그것도 아주 절실히 느끼게 한 사람이 바로 한비야이다.

우선 그의 목소리를 말로 표현할 재주가 없다. 굳이 표현한다면 벽에 부딪쳐 되튀어 오르는 탁구공이라고나 할까. 높은 음에다 낭랑하며 힘이 있고 빠른 게 그의 말소리가 가진 특징이다. 또한 변화무쌍한 그의 표정은 아예 설명하기를 포기하게 한다. 그는 말할 때 아주 열심히 한다. 그런 다음 그 말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든 상관없이 고개를 약간 갸웃하면서 생끗 웃는다. 마치 다섯 살쯤 된 아이가 사진기 앞에서 짓는 표정으로 자기 말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는 그의 모습을 보면 미간에 내 천(川)자가 그어지고 입이 쫑긋해진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전날 밤 머리를 부딪쳐서 하루 종일 멍했다며 앞으로 계속 이러면 어쩌냐는 이야기를 하는 현장에 내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어머, 그랬구나. 그런데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알기로 그 정도로 죽은 사람은 없거든.”그의 목소리와 표정을 넣어 다시 옮겨보면 이렇다.

“어머 그랬구나”-다소 느리고 낮은 목소리에 걱정스런 표정“그런데 걱정할 것 없어”-빠르고 힘찬 어조, 밝은 표정“내가 알기로 그 정도로 죽은 사람은 없거든”-단호하고 경쾌한 목소리, 하얀 이가 보이는 웃음 생끗.

걱정하던 사람이 마침내 웃었다.

“한비야 씨가 그렇다면 그렇겠죠. 아무래도 보고 겪은 일이 많을 테니까.”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돌아다닌 오지여행가 한비야, 그에게는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꽉 차 있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흘러 넘쳐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으로 흡수되는 강력한 마력이었다.

한비야가 뜨는 진짜 이유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책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었다. 발로 걸어서 다니는 오지여행이라는 것도 대단하려니와 여자의 몸이라는 것이 더해져서 그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바람의 딸』 시리즈는 4권까지 나왔고 한비야는 오지여행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 방송프로그램, 초청강연, 언론의 인터뷰에서 그는 항상 만나고 싶은 인물에 뽑혔고 그의 군더더기 없는 말솜씨와 해박한 지식에 다들 반했다. 대중의 관심은 항상 반짝하는 법이건만 그의 인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산되어갔다.

“한비야 씨, 요새 유행하는 말로 정말 떴어요.”

“나도 그런 것 같아요. 요즘 강의를 가면요, 뉴스에나 나오는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제가 연사예요. 어제는 어느 군부대에 강의를 갔는데요, 별이 다섯 개나 떴어요. 무궁화는 무수히 떴구요.”“자신이 그렇게 뜨게 된 이유가 뭐라고 보세요?”

“21세기의 화두는 전문성이잖아요. 사회가 이제는 전문가를 믿는 추세인 것 같아요. 저는 순전히 노는 것 잘 놀아서 전문가 된 거잖아요. 10년 전 같으면 누가 내 얘기를 그토록 진지하게 들어주겠어요? 그것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별난 여성쯤으로 잡지에 한두 번 오르내리는 게 고작이었겠죠.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발전적으로 나간다고 봐요. 전문직이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김밥집이든, 구두수선공이든 대를 이어 그 일을 하잖아요. 전문가를 인정하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이고, 우리도 그 길로 간다는 느낌이예요.”그러나 그런 외적인 요인만으로 한비야가 그토록 오래 떠 있을 수 있을까? “저는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없대요. 안 믿어지죠? 우리나라 큰 무당이 봐줬는데요, 저는 새래요. 새 중에서도 맹금류, 맹금류하면 독수리가 생각나지 않으세요?”“감옥체험 어떠셨어요?”

“생각보다 굉장히 좋았어요. 세계가 좁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자유가 없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 0.75평 안에서도 자유가 없더라구요. 서면 서지 말라, 기대면 기대지 말라, 교도관들이 늘 감시해요. 생각은 자유로울 수 있지요. 인간에게 자유를 뺏으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자신감이란 무엇인가, 결국 자유구나 했어요.”누군가가 한비야를 만나고나서 이렇게 말했단다. 한비야에게는 자유의 냄새가 난다고.

한비야에게 자유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한 모금의 물, 한 술의 밥과 같이 느낄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을 믿어라.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세상에는 꿈을 꾸는 사람과 꿈을 이루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고 봐요. 제가 서른 다섯에 여행을 나설 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많았어요. 7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여전히 해야지, 해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지요. 꿈꾸는 사람이 될 것인가,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인가는 ‘지금 이 순간’이 결정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서 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꿈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꿈을 꾸기만 하는 사람은 엄두를 못내기 때문이죠. 그리고 엄두를 못내는 것은 하다가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하기 때문이구요. 자기를 믿고 엄두를 낼 때 자유로워집니다.”한비야에게 자유는 도전정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자유를 밑천삼아 꿈을 향해 순간순간 도전하는 한비야의 일거수 일투족, 그것을 보노라면 시원함과 해방감과 함께 자신 속에 잠들어 있던 바람이고픈 욕망이 문득 깨어남을 느낀다. 박제처럼 메마르고 굳어버린 우리네 삶에 한비야는 고향숲 내음을 안고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다. 바람의 딸 한비야, 그가 우리를 뜨게 만드는 한 그는 뜰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모두 바람의 자유를 사모하는 인간이므로.

바람을 움직이는 힘, 호기심

어떤 사람이 내게 강사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최근 회사 분위기가 침체되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단박에 한비야를 댔다. “그랬다가 다들 배낭 메고 떠나겠다고 나서는 거 아냐” 하길래 “걱정마, 그 얘기 듣고나면 멨던 배낭도 내려놓게 될테니”라고 말해주었다. 결코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멨던 배낭을 슬그머니 내려놓은 게 바로 나였으니까.

그는 우선 체질적으로 타고난 여행가이다.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는다. 음식을 가리지도 않고 뭐든 잘 먹고 많이 먹고, 먹는 것을 즐긴다. 없을 때는 안 먹고 지낼 수도 있다. 특히 무엇인가에 집중할 때 그는 전혀 식욕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풍요를 느낀다. 하루에 줄넘기 천 번에 십리길을 꼭 걷고 일주일에 한 번은 등산을 한다. 47킬로의 몸무게는 단단한 근육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기질적으로 타고난 여행가이다. 사과를 껍질째 씹어 먹으며 맛있다고 감탄하는 그에게 농약걱정은 없다.

농약을 이길 만큼 몸이 튼튼해지면 되는 것이다. 불쾌한 일, 속상한 일, 화나는 일, 억울한 일을 겪을 때 그는 받아들인다. 내 몫의 희로애락이구나. 그는 산속에서 만난 할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 “인생에 단맛만 맛인가. 쓴맛도 맛이여.”

인복과 먹을 복을 타고 났다고 믿는 한비야는 쓴맛이 인생의 참맛이라는 것 또한 믿는다.

여행을 하면서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으려고 오랜동안 복용한 약의 부작용으로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고열에 시달리면서 몸이 말라들어 해골처럼 되었다.

“나의 그 모습도 기록으로 남겨야할 것 같아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어요. 화장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과 그 사진을 비교해 봐도 그 사진이 더 예뻐요. 사진에는 내 눈이 살아 있거든요. 사람은 저 하고픈 것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그때가 제일 예쁘답니다.” 이 대목에서부터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었다.

“나는 낮고 낮은 곳부터 높고 높은 곳까지 다 경험하고 싶어요.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서요.”빙하조각을 밟아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 끝에 그래도 호기심이 앞서더라는 그를 보며 나는 배낭의 어깨끈 하나를 내렸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이 나이에’라는 강박증을 벗었다고 한다. 남들보다 6년 늦게 들어간 대학,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입사한 회사에서 그의 동료들은 10년 연하였다. 조급증이 나서 말도 더 빨라지고 몸놀림도 더 잽싸지며 뭐든지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리던 그가 여행을 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각각의 때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느긋해졌다는 것이다.

“나이를 극복한 자유는 정말 대단한 자유예요. 나의 인생에서 보면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잖아요. 나이 핑계대는 것은 진정 할 맘이 없기 때문이에요. 로스트로포비치를 인터뷰 한 기사를 봤어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연습하는 그에게 연로한데다가 이미 세계가 공인하는 첼로의 일인자인데 웬 연습이냐는 물음에 “내 소리가 하루하루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을 읽으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은 거 있죠. 나는 내 묘비에 이렇게 쓰고 싶어요. ‘남김없이 쓰고 가다’. 나의 한계는 어딜까, 내가 맞게 될 도전을 나는 또 어떻게 넘길까,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나는 온통 궁금증 투성이라니까.”한 발을 내딛을 때나 사람 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문을 하나씩 연다는 떨림을 느낄 만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그, 가장 큰 오지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자연에 적응해서 사는 사람들의 천태만상이라고, 그걸 보면서 ‘맞아, 사람은 저렇게 사는 거다’하는 순간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고, 어떠한 도전에 어떻게 응전할지 흥미진진하게 인간과 스스로를 탐험해 가는 그 앞에서 나는 조용히 배낭을 내려 놓았다. 여행이 발로만 다니는 게 아님을, 영혼의 깊이 없이는 떠날 수 없는 것임을 알았으므로.

여행이 가르쳐준 시민운동의 이치

그는 자신의 육로여행의 말미를 국토종단으로 장식했다.

“이번에 국토 종단하면서 죽으면 장기기증에다가 화장하기로 했어요. 다니면서 보니까 정말 묘지가 많더라구요. 국토 1%가 묘지에다 좋은 자리는 다 묘지예요. 우리나라 공장부지가 1%가 안 된대요. 내 친구들 몇몇을 꼬셔가지고 다 화장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약 백 평쯤 확보했어요. 시민운동이 별 건가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시민운동이지.”외국어 안 쓰기, 땅이름 찾아주기, 그가 가입한 운동만 해도 수십개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情)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인간애이고 ‘우리’라는 공동체의식도 강한 편인데 시민운동 참여도가 그리 높지 않은 이유는 ‘이름이 너무 거창해서 주눅이 든 탓’일 거라고 그는 말했다.

“내가 걸어보니 천리길이 정말 한 걸음부터예요. 인류평화도 거창한 것이 아니예요. 나로부터 시작해요. 한걸음 한걸음 나로부터 시작하는 이것이 시민운동이지요. 작은 힘이 모여서 큰 힘이 된다는 것을, 한 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고 나무 한 그루가 모여서 숲이 되고, 한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그걸 알게 돼요. 그런 힘을 한 번만 느끼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걸 바로 여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어요. 작은 봉우리를 넘은 사람이 큰 봉우리를 넘고 사소한 일을 잘 하는 사람이 큰일을 잘 하는 게 자연의 이치예요.”사람이 자연의 일부이니 사람 사는 일도 결국은 자연의 이치에 따를 때 가장 원만하다는 것이 그가 여행을 통해 얻은 시민운동론인 셈이다. 한걸음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시민운동단체의 역할이라고 한다고 앞으로 운동권에 ‘여행’바람이 한차례 불 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제 땅을 밟아보지 않은 자는 제 땅을 사랑할 수 없다’는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말이 있고 보면.

바람은 달콤한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12월이면 다시 우리나라를 떠난다. 병들어 누워계신 칠순의 노모가 밟히지만, 여행사를 차리자, 교수자리를 주겠다, 여러 가지 제안이 있고 무엇보다 그를 사랑하는 대중들이 있지만 잡은 자리를 다시 뜨는 것이다.

“지금이 제겐 아주 달콤해요.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사람들이 내 책을 읽고 있고 내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달콤하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요만큼 유명해지고 요정도의 책을 팔자고 산 게 아니거든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쓸모가 있을까’ 여행 다니면서 내내 이것이 제 화두였어요. 한 1년 더 있어볼까 하는 유혹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모든 걸 다 뿌리치고 가려는 내가 기특한 거 있죠?”그는 올 12월 중국으로 간다. 중국어 현장연수를 마치고 내년에는 난민촌으로 갈 것이다. 또 아프리카로 갈 것 같다.

“내가 본 난민아이들 중 얼마가 살아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그들을 일단 살려놓고 보자는 마음뿐이에요. 당장 가서 담요 나눠주는 일도 할 수 있지만 국제 홍보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요. 난민촌의 실상을 제대로 전하고 인근국가에 압력을 넣어서 난민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 부유한 나라에서 재정을 얻어내는 일이 우선 떠올라요. 세계는 하나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 이기주의가 지배하잖아요. 난민은 결국 여자와 아이들이에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에요. 당장 돌봐주지 않으면 죽어요. 아인슈타인도 한때 난민이었다잖아요. 누군가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우리 인류는 석학을 잃었을 것입니다.”

한비야의 선택

우리나라에도 고아와 결식아동이 많은데 왜 다른 나라냐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관심의 차이일 뿐이라고. 여행을 다니면서 난민이 눈에 들어왔고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가는 걸 보면 그걸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걸 선택한 것 뿐이라고.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산에 가서 몇날을 있다가 온다고 한다. 거기서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 ‘비야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그리고는 그것을 집으로 부친다. 몸이 돌아오고 얼마 지나면 그 편지가 도착한다. 그걸 뜯어볼 때 객관적인 입장에서 결정할 수 있었고 난민촌행을 결심할 때도 그랬다.

그가 여행가를 꿈꾼 것은 열 살 무렵이었다. 김찬삼 여행기를 보고 이렇게 여행하며 살 수도 있는 거구나 하면서 여행가를 선택했다. 열아홉에 대학을 안 가기로 선택한 이후의 6년을 그는 인생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로, 자신이 굉장히 단단해진 시기라고 생각한다. 결혼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딸하고 노는 친구를 보면 못 견디게 부럽고, 낯선 곳에서 마주칠 외로움을 모르는 바 아니고 노후의 적적할 것 같은 삶도 생각 안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선택했다. 바람의 딸을. 그래서 20대초반에 어머니와 협정을 맺었다. 선이고 결혼이고 그런 말 안하기로. 어머니는 약속을 지켰고 비주류로 사는 자신의 삶을 가만히 지켜봐 주었던 가족과 엄두를 내도록 격려해준 친구들이 그는 항상 고맙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갈까. 따뜻한 마음으로 살자. 나의 물질적 생활은 가장 단순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그리하여 관뚜껑 닫을 때 나는 잘살았다고 할 수 있게.”이것이 한비야가 선택한 삶이다.

“나는 인터뷰를 하고나서 제일 걱정되는 게 있어. 거창하게 보일까봐.”높은 산에 피어 있는 야생화 한 송이, 힘들여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희망이 되는 까닭은 제 몫의 생명을 온전히 다하고 있는 그 소박함 때문일 게다.

오한숙희 여성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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