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1월 2001-01-01   869

하정남이 김수환에게

이효재 선생님께

선생님께 뜻밖의 편지를 받고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선생님 모시고 두세 차례 지낸 나날이 그립고, 선생님과 함께 나눈 시간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엊그제까지 울긋불긋한 단풍잎이 달려 있었는데 벌써 쌀쌀한 겨울 날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년 같으면 11월중에 첫눈이 내리는데, 올해는 아직 오지 않네요.

여기서 제가 지역 여성들과 여성운동은 꾸려 가지만 어려움이 많습니다. 지방자치제가 되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지역주민들은 지역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기득권을 가진 소수층만이 주인노릇을 하는군요. 그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짐이 무겁기만 합니다. 농어촌 인권지킴이가 되기를 자처하며 출발한 영광 ‘여성의전화’가 주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로 뽑혔지만 아직도 옛날 고을 원님 같은 사고를 가진 지자체장과 일을 의논하는 것 등 정보가 늦은 지역에서 조직을 꾸려 가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농업 등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농한기에 가끔씩 공부모임에는 올 수 있지만 활동에 참여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지역에서 여성운동을 벌이면서 두 가지 문제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모든 문제해결을 정치적으로만 하려는 의식입니다. 사실 저는 여기 즉 전라남도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정권이 바뀌어 일을 한만큼 성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정권교체와 민주화운동의 본산지라는 저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가면서부터 실망감이 찾아왔습니다. 고루한 의식과 정치적 욕망이 변화에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 실감하였습니다. 진정한 사회변화를 이루려는 자각적인 민중의 노력과 지자체장들의 의식변화는 꾀하려 하지 않고 정권에 의지해 뭔가를 기대하는 것같은 문제점도 광주를 비롯한 전남 지역에서 느낍니다. 두 번째 문제는 사회운동단체들의 유기적 관계의 중요성입니다. 처음 모임공부를 시작할 때 대상은 주로 여성농민이었고, 저의 목표도 농촌 여성문제의 현실과 대안찾기였습니다. 그런데 농촌 여성의 문제는 여성으로서의 문제와 농업자체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있었습니다. 저는 일의 성격상 여성인권 문제와 농업인으로서의 여성문제를 섞어 놓는 것이 소기의 목적을 도달하는데 어렵다고 생각하여, 여성인권 문제는 ‘여성의전화’로 그리고 여성농업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면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중앙과는 달리 지역이라는 특성이 그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민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으므로 단체간의 상호보완적 관계유지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광 ‘여성의전화’ 창립 후 같이 일을 시작하려고 한 여성농민들의 적극성이 엷어지고 서로 다른 조직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아직 저는 여성 농업인들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일을 잊어 본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생태문제와 여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과도 연결되어 있고, 도농간의 여성연대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힘들수록 더욱 절절히 다가오는 것은 앞서가신 여러 선배님들의 노력과 쌓으신 업적이 참으로 눈부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원불교내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생활을 하면서 그 밖의 많은 활동가들과 접촉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하는 처지였으니, 선생님과의 만남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가끔씩 선생님에 대한 기사는 지면으로 보았지만 실제로 선생님을 모시고 강의를 들으며 안목을 높일 수 있었고, 또한 제가 하는 일에 귀기울여주신 관심은 용기를 갖게 하였습니다. 원불교내에서 교육받으면서 많은 스승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선생님과의 만남은 제게 다른 세계의 경험을 하게 되는 창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선생님께 매료되었고, 소중한 기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통해 정말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참으로 이 사회를 걱정하시고 두루두루 관심을 기울이는 선생님의 모습을 제 마음 속에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평화와 상생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선생님의 깊고 넓은 마음에 흠뻑 젖어 지내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어 후배들에게 많은 힘 되어 주세요.

12월 5일 영광에서 하 정 남 합장

김수환 추기경님께

2000년을 맞이하는 설레임에서 신년을 시작하였는데 벌써 올해도 저물어 가는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추기경님을 종교와 종파를 넘어 모두가 함께 우러러보는 큰 종교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금년 들어 천주교와 일부 기독교에서 과거사에 대한 참회를 하는 등 한국의 종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통일과 화해의 시대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각 종교들이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협력을 다짐하는 분위기는 21세기 상생의 종교문화를 예상하게 합니다. 오늘날 화해분위기를 이룰 수 있는 추기경님께서 암담한 한국 정치 상황 속에서도 사회민주화의 실현에 큰 그늘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은 누구보다도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고통을 민중들과 더불어 기꺼이 나누어지신 분이셨습니다.

추기경님! 한가지 안타까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알고계시듯이 한국은 가부장제의 관습과 벽이 두텁습니다. 1970~80년대에 벌어진 열렬한 민주화운동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에 대한 범죄는 이 땅의 수많은 여성들을 고통받게 합니다. 그 원인을 여성계는 가족과 사회의 가부장적 체제와 그 관행이 원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나 폭력문화도 그 뿌리는 가부장적 가족문화이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지 못하는 것도 가족문화에서 재생산되는 가부장적 관행 때문이라고 봅니다. 더욱이 최근에 가부장적 관행을 벗지 못한 사회운동계 일부 지도층이 일으킨 여성비하 행위는 그나마 사회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사회단체들의 도덕성을 의심받게 하였습니다. 함께 살아가야할 남녀관계 즉 함께 사는 가족 속에서 민주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서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 모릅니다. 이러한 가족과 사회문화는 종교사상과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즉 종교내에서의 여성 위상은 바로 가족과 사회속에서의 여성 위상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 21세기는 여성의 시대, 즉 여성과 여성적 가치가 존중되고 중시되는 시대라고 합니다. 금년에 들어와서 천주교나 기독교가 새로운 신학을 선언하면서 여성차별폐지에 대한 언급도 하였지만, 구체적인 내용 제시나 가시적인 행동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가 여성을 가부장제의 사슬에 묶어 놓는 한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이 크게 나아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고 그러한 절대적 진리의 규정대로 조직과 제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위한 조직과 제도의 변화 즉 여성사제 서품문제나 종교 내에서의 여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일은 바로 우리 사회의 여성의 위상과 지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것입니다. 금년에 환경운동과 여성인권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천주교 여성들이 천주교 여성연대를 만들어 앞으로 교회내의 의사결정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참여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장하지만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 얼마나 성과를 보겠습니까? 추기경님께서 만약에 이에 대해 어떠한 말씀을 해주신다면 그것은 비단 천주교 내부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추기경님은 이미 천주교 내의 최고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종교계의 큰 지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교성직자로서 그리고 여성인권을 위해 특히 종교내의 여성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고민을 토로하고 싶어 이 지면을 빌어 추기경님께 글을 올립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베풀어주신 추기경님의 덕과 자비로움을 흠모하고, 큰 지도자를 모시고 동시대를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추기경님! 성체 평안을 기원드립니다.

2000년 12월 8일

하상의(정남) 교무 합장

하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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