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0월 2010-10-01   1220

칼럼-우리 안의 불가사리

우리 안의 불가사리

이태호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벌써 13년 전 일이네요. 97년 8월, 저는 참여연대가 기획한 ‘지구촌 이웃되기 배낭여행’을 뒷바라지 하는 간사로 10박 11일간 중국을 종단하는 여행에 참여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마침 여름 휴가철이어서 내친 김에 20일 가량을 중국에서 보냈습니다.

베이징에서 일행을 서울로 떠나보내고 향한 곳은 연길이었습니다. 1997년은 북한의 식량난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습니다. 연변에서 활동하던 북한주민 긴급구호 활동가들, 이들과 협력하고 있던 연길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두만강 주변 도시들을 며칠 동안 둘러보았습니다.

도문 같은 두만강 변 소도시들에서는 북한이탈주민들과 ‘꽃제비’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꽃제비란 식량난과 수해 등으로 부모를 잃고 장바닥을 떠도는 어린 아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두만강 중상류에 해당하는 숭선에서는 샛강 수준의 두만강 저 너머로 헐벗고 지친 주민들이 강변에 나와 맥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 말에 따르면 ‘지난겨울과 봄에는 강을 건너다 힘이 부쳐 익사한 사체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선을 넘어 가까스로 국경을 넘어온 산 사람들은 그들대로, 졸지에 조국반역자로 몰린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낯설어하면서, 이미 이 강변마을들과 연길, 심양과 하얼빈, 심지어 몽골의 울란바토르까지 퍼져나가 이제 막 본격화되기 시작한 중국식 시장경제의 막장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인신매매, 사기, 장시간 노예노동처럼 전혀 새로운 형태의 반인권적 상황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수개월째 연길이나 도문, 심양 등지에서 긴급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던 남한 활동가들도 여럿 만났습니다. 몇몇 활동가들은 북한 정권을 하루빨리 무너뜨려야 한다고 핏발선 눈빛으로 울분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연히 만난 북한이탈 주민들과 더불어 몽골의 울란바토르, 베트남의 하노이, 타이의 치앙마이로 이어지는, 대장정과도 같은 긴 여로에 무작정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결기와 용기는 진심으로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잠시 동안의 배낭여행객으로 그곳을 찾은 저는, 그저 제 앞에 펼쳐진 상황을 정리하고 소화해내는데도 울렁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몹시 적막했습니다.

해가 지는 두만강 변에 나아가 나지막하게 아리랑을 불러 봤습니다. 한 세기 전 가난에 못 이겨, 혹은 망국의 아픔을 뒤로 하고 그 강을 건너던 이들도 불렀을 그 노래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그 슬프고 애잔한 강에서는 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피난과 난민의 역사가 아리랑 고개처럼 가혹하게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지구촌 좋은 이웃되기 배낭여행’ 도우미로 따라나선 긴 여정의 막다른 곳에서 저는, 서울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극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왜 나는 여기에 와서야 내 가까운 이웃들의 속살과 맨 얼굴, 그리고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여겼던 극한의 참상을 목도하게 된 것일까? 왜 임진강에서가 아니고 북한강에서도 아니고, 비행기와 밤기차를 타고
만리장성을 넘어, 이 강변으로 에둘러 돌아와서야 비로소 이웃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었는가? 그렇게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면 나 자신과 우리들은 과연 얼마나 크고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단 것인가?

본디 국경에는 이정표 외에 철조망 같은 것은 좀체 없다는 사실을 조중 국경에서 확인한 것도 제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철책 없는 조중 국경과 대비되면서 남북 간을 가르고 있는 휴전선의 견고하고도 잔인한 벽의 존재감이 더욱 실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이어 서로에 대한 공포와 적대, 그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의 장벽에 도전하고픈 투지가 제 내면에 오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분단된 한쪽에서는 음식 쓰레기가 넘쳐나고 남는 쌀 처리가 골칫거리가 되는 상황, 다른 한쪽에서는 대다수가 생사의 아리랑 고개를 넘고 있는 상황,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무심하게 넘기면서 소말리아의 소년병과 에티오피아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걱정하는 우리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부조리의 벽에 도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참여연대로 돌아와 평화군축운동에 열심을 내게 된 이유의 하나입니다. 

며칠 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신의 차남인 20대 김정은 씨에게 ‘대장’ 직함을 부여하고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촉함으로써 3대째에 이르는 후계구도를 기정사실화 했습니다. 저는 인민의 이름을 앞세워 인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부단히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믿습니다. 사회주의 체제, 자본주의 체제를 막론하고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이나 부가 대물림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명백한 역사적 반동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거꾸로 서게 만드는,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행위입니다. 사실 봉건적 세습체제를 지향하는 이 통과의례를 논외로 하더라도, 북한의 냉전적 체제가 변혁되어야 할 이유는 수십 수백 가지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봉건적 해프닝 뒤에도 남과 북이 협력해야 할 일의 영역은 의연히 수십 수백 가지가 될 터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당대표자회에서 그 모습의 일단을 드러낸 보인 이 괴물은 사실상 북에만 존재한 괴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혹은 짧게 잡더라도 족히 지난 두 세대 간 이어진 적대와 냉전의 연대 동안 한반도 분단체제가 키워온 안보국가라는 이름의 불가사리인지도 모릅니다. 이 괴물의 머리 중 하나가 품격 있게 G20의 사교파티장을 기웃거린다 해서, 이 괴물의 사연 많은 긴 꼬리1)가 여전히 폭력과 전쟁, 반이성과 억압, 공포와 적대, 차별과 무관심, 그리고 트라우마로 가득한 진흙탕을 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지는 못합니다. 이 불가사리2)의 머리와 꼬리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서로 연결된 하나의 신진대사 체계로부터 자양분, 총검, 철책선, 그리고 칼날보다 더 차가운 적대와 배타적 우월주의라는 영양분을 공급받고 성장해왔습니다.

추석 직전 북한 신의주의 수해복구 명목으로 적십자사의 대북지원 쌀 5000톤이 북으로 건너갔습니다. 지난 3년간 매년 제공하던 40여 만 톤의 쌀 차관제공이 중단되어 오던 터였습니다. 남한에 남아도는 쌀을 처리하기 위해 동물사료로 사용하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던 우리정부가 더 많은 쌀을 북에 지원하기를 기대하고 호소합니다. 북의 선군정치를 비난하는 남한은 북한 GDP 총액만큼의 국방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밥을 나누고 총을 내림으로써 우리 안의 괴물이 서식할 분노와 공포, 적대의 서식지가 줄어들기를 희망합니다.

1) 이 괴물의 비유는 최인훈의 「화두」의 작가 서문에서 따왔습니다. 소설 화두는 냉전과 분단 아래서의 민초들의 삶에 집요하게 천착해온 최인훈 선생의 역작입니다.

2) 불가사리는 고려 설화에 나오는 괴물로, 숨어지내던 승려가 밥알을 빚어 만들었는데, 쇠를 집어삼키면서 거대한 괴물로 변해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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