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0월 2010-10-01   1379

문강의 문화강좌-웃음이 죽은 시대의 웃음

'Laughing clowns' by fair game

웃음이 죽은 시대의 웃음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기원전 4세기경 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칼리폴리스’라 부르는 정의로운 이상국가의 운영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다. 이상국가의 핵심은 정의, 선, 덕, 진리 등과 같은 가치들인데, 이를 가장 잘 실현시키기 위해서 통치하는 계급(‘수호자들’)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국가』 3권에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웃음’의 위험성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이런 맥락 속에 있다. “한편, 웃음을 너무나 좋아해서도 안 될 것이네. 격한 웃음에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일반적으로 격한 변화를 낳는 중개자 역할을 하게 마련이거든.” ‘변화’라는 말을 통해 플라톤은 거룩한 신을 우습게보게 되는 상황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곧 웃음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는 마치 ‘웃음’이 이상국가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천한’ 것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웃음’은 국가가 특별히 자신의 수호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멀리하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플라톤은 ‘웃음’을 경계하면서 ‘웃음’에는 가공할 힘이 있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지엄함을 모욕하는 웃음의 힘  
 

플라톤의 주장에서 드러나듯, 웃음은 언제나 권력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권력이 남성의 전유물인 사회에서 웃음이 여성의 속성으로 분류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여성의 웃음은 사회의 기존질서를 비웃거나 뒤흔드는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보는 사람들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메두사의 특징이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공포스러운 웃음이었던 것이나,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로체스터의 과거비밀을 드러내는 원인이 된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한밤의 히스테리컬한 웃음으로 표현되는 것, 또 유교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에서 ‘여자의 웃음이 담장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문화적 관습이 있었던 것은 모두 같은 범주 안에 있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그린 엄격한 중세 수도원은 도서관에서 몰래 상스러운 웃음을 지었던 이들이 모조리 살해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웃음은 남성권력-정치권력-종교권력의 지엄함 저편에서 그 근간을 모욕하는 위험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인류역사에서 웃음과 재미를 제공하는 이들이 언제나 가장 천한 신분을 이루었던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천한 것’이야말로, 가장 천하기 때문에, 세상의 위선을 드러내는 위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조선의 광대들이 장터에서 양반을 조롱하며 사람들을 웃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떨어질 데 없는 천인들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늙은 왕의 어리석음을 끝까지 지적하는 지혜를 가진 인물이 귀족이 아닌 어릿광대(fool)인 것 역시 마찬가지다. ‘천한’ 이들이 파악한 ‘웃기는’ 세상의 진실과 함께 기존의 질서는 비록 순간적일지언정 한 번씩 뒤집혀버리는 것이다. 파문과 화형과 전쟁으로 뒤범벅되어 있던 중세유럽에서 벌어졌던 카니발은 웃음의 난무 속에서 일정 기간 동안 세상의 질서가 합법적으로 뒤집어졌던 행사이기도 했다. 고귀함과 진지함은 ‘천박한 웃음’을 언제나 동반하는 것이고, 그 웃음 속의 지혜와 카타르시스가 없이는 기실 유지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천박해진 웃음

웃음을 주는 이들이 더 이상 천민취급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특징지어지는 대중사회의 등장 이후이다. ‘대중’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대중을 웃길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이들이 많은 인기와 함께 큰돈을 벌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유재석, 강호동이 고소득 연예인 수위를 다투고, 박명수가 의사아내와 결혼하고, 서울대 출신 서경석이 개그맨이 되어 성공하는 등의 일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다시 시작한다. 대중이 주인이 되고 돈 많은 이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사회 속에서, 대중을 웃기며 돈을 번 이들이 주는 ‘웃음’은 더 이상 ‘위험’할 수가 없는 역설이 생긴다. 광대가 천하고 웃음이 타부였던 세상에서의 웃음이 권력을 위협할 힘을 가졌다면, 광대가 부자가 되고 웃음이 최고의 매력조건이 된 세상에서의 웃음, 즉 그 자신이 일종의 권력이 되어버린 웃음이 위협할 만한 것은 별로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어도 정치권력, 자본권력, 종교권력은 여전히 썩은 냄새를 풍기곤 하지만, 오늘날 유명인이 되어버린 광대들은 옛날처럼 그 권력을 조롱하며 웃음을 유발하지 못한다. ‘유명인’이 되어야 강자가 되는 연예자본의 법칙은 ‘적’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모두를 골고루 만족시켜야 하는 웃음의 코드는 사회의 첨예한 문제를 풍자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뚱뚱한 이들, 못생긴 이들, 노인과 주부, 노숙자나 범죄자들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던지는 웃음들은 그래서 옛날과는 다른 의미에서 갈수록 ‘천박’해진다. 약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위험’하지 않은 웃음은 세상의 질서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웃음이고, 그래서 결국 ‘지혜’를 주지도 못한다. <개그콘서트>나 <웃찾사>, 그리고 여러 토크쇼 등에서 등장하는 우리 시대의 웃음이 ‘억지’와 ‘실소’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웃음의 전면화가 웃음의 힘을 스스로 죽여 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남은 웃음

권력을 조롱하고 삶의 지혜를 던지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개인에게 요구할 수도 없다. 이것은 대중사회가 자본주의를 끌어안을 때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성공’하기 위해 남을 웃긴다는 관념이 광대의 제일목표가 되는 것은 이런 조건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진정한 비극은 다른 곳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이런 ‘성공철학’ 속에서 살면서도 실제로 문제가 터지면 다시 광대는 ‘천한’ 대우를 받는다. 원정도박 의혹의 신정환과 병역기피 혐의를 받고 있는 MC몽의 몰락은 그 예다. 신정환과 MC몽 사건이 터진 사이에 갖가지 불법을 자행한 공직자 후보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았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공직자를 만들기 위해 웃음을 경계하려고 했지만, 한국사회는 같이 불의를 저질러도 공직자는 임명되고 광대는 몰락한다. 위험하고 지혜로운 웃음이 죽어버린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웃음’은 바로 이러한 상황 자체일지도 모른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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