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8월 1999-08-01   766

약속을 마라, 소록도

전라남도 고흥의 녹동항에서 바라다 뵈는 작은 사슴머리를 닮았다는 소록도. 1916년 이래로 나환자들이 모여들어 사람들은 소록도를 천형의 땅이라 말한다.

병역면제 의혹이 일던 대선 주자의 아들이 사죄하는 마음으로 찾았다던 소록도. 그는 소록도에서 소록(小鹿)을 끝내 발견하지 못하였으리라. 소록도를 아무리 여러 차례 오고간 사람이라도 맑은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영물 소록이 군복무에 상응하는 상당한 기간(2년 정도)을 자원봉사하겠다던 약속을 뒤로 한 채 선거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훌쩍 그곳을 떠나버린 그 앞에 나타났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도 1년에 꼭 한번은 휴가를 내서라도 소록도 자원봉사대를 찾고자 하는 것은 내가 저버린 어느 나병 할머니와의 약속 때문이다. 생전 본적도 없는 사회사람(그곳에서는 외지인을 이렇게 부른다)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무어 그리 중요했더란 말인가?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만을 믿고 1년 동안을 기억해온 나의 이름 석자. 보고 싶어한다는 말과 함께 나의 이름을 전해 들었을 때 사실 나는 그 할머니의 이름은 물론 그런 약속을 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이 그러했고, 가벼이 살아온 세월이 그랬다.

소록도는 약속의 땅이다.

가까운 혈육들마저 떠나버린, 그래서 사무치는 그리움을 아는 그곳의 환우들은 다시 찾아오마는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은 금기로 되어 있다. 나는 소록도의 첫번째 금기를 어겼던 것이다. 문드러진 살, 녹아내린 손가락, 냄새나는 피부는 환우들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리움과 약속을 알며, 겸손과 사랑을 인고의 세월을 통해 체험하고 있으리라.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구상 어딘가에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있다면 바로 소록도 어디쯤이라고 믿고 싶다.

참길회(대구 환경연합)가 진행하는 소록도 자원봉사는 1년에 두번 여름과 겨울 3박4일 일정이다. 분위기는 농활처럼 엄격하고, 몸은 힘들며 자원봉사인데 회비도 내야 한다. 그러나 소록도에 가면 많은 것이 있다. 눈만 크게 부릅뜨고 있으면 10분 만에 10개나 떨어지는 별똥별, 머나먼 타지땅에 눌러사는 끝내주는 외국인 수녀할머니, 찌그러진 밥그릇 하나의 소중함, 그리움과 약속, 영혼이 맑은 자에게만 나타난다는 소록,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계단. 얼마전 정부는 소록도에 있던 나환자교도소를 폐쇄했다. IMF라 소록도 지원예산도 줄이고 간호사들도 줄인단다. 천형(天刑)보다 인형(人刑)이 더 무섭다. 아니 공해보다 더럽다.

나는 올여름 휴가 때도 소록도에 가려고한다. 소록도를 되살릴 음모 하나쯤 꾸미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올해는 내게도 소록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양장일 환경운동연합 생태조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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