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2월 2002-11-29   949

브라질 노동당 룰라의 집권 의의와 브라질의 운명

예측의 혼란, 현실의 혼돈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는 …(기침) …누가 물 좀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핑계가 좋군요(웃음). …이번 기회를 통해 루이스 이나시오 다 실바 후보가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브라질 국민들도 다 실바라고 하면 그가 누군지 전혀 모를 것입니다. 그의 애칭은 ‘룰라’입니다. 그러나 미 국무성에서는 (비공식적인) 애칭을 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좌중 웃음)”

부시 미 행정부의 대 중남미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핵심인물인 미 국무성의 미주담당 차관보, 오토 라이히(Otto Reich)는 얼마 전 헤리티지 재단의 연설에서 위와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 중남미 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는 룰라의 당선을 축하하면서도 다분히 그리고 의도적으로 불편한 심경을 표시하였다. 도대체 룰라(Lula)가 누구이길래 가장 중요한 미국의 대 중남미 정책 결정자가 이런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

룰라가 얻은 반사이익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등과 흔히 비견되는 루이스 이나시오 디 실바(Luis Inacio da Silva), 일명 룰라는 정규교육을 거의 받은 적이 없고, 커피에 밀가루를 넣어 끓여 마시면서 연명했을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빵이란 것을 처음 먹어본 것이 일곱 살 때라고 한다. 그 후 룰라는 브라질의 금속노조지도자로서 정치에 입문했고, 1980년 노동당을 창당하며 제도권의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후 거대하지만 지극히 불평등한 국가인 브라질에서 노동자와 가난한 계층의 대변자 역할을 자청해 왔다. 그렇다면 소수의 지배 엘리트가 정치-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과두제 국가인 브라질에서 룰라가 당선된 배경은 무엇인가? 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룰라는 우선 지난 8년 동안 브라질을 통치했던 페르난도 카르도주 대통령의 경제실정으로부터 반사이익을 얻었다. 미국 달러와 1대1의 환율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막고 외자를 끌어들인다는 카르도주의 헤알 플랜은 단기적으로 성공하는 듯했다.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이 바로 줄었고 자본유입이 두 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미국 달러의 강세가 나타나면서 여기에 고정된 헤알의 가치가 과대 평가되어 브라질의 수출 경쟁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더욱이 시장개방의 조류와 맞물리면서 수입 급증에 따른 무역적자 확대가 나타났고 이 때문에 외자를 더 끌어들이려 이자율을 올리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둘째, 브라질의 정치가 소수의 엘리트가 독점하는 과두제로부터 탈피하여 보다 민주화되었다는 점이다. 카르도주 정부는 경제 운영에 실패했지만 브라질에 제도적 민주주의를 비교적 공고하게 다졌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기도 하다. 또한 브라질에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시장경제의 틀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유권자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룰라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있어 브라질 국민은 과거와 같은 부담을 안고 있지 않다.

위 두 배경이 전임자의 통치의 유산이라고 한다면 세번째 배경으로는 극좌에서 중도로 룰라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변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동안 룰라는 대통령이 될 경우 외채의 지불을 중단할 것이며 민영화된 기업을 다시 국영화하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중 이 모든 주장을 뒤엎었으며, 또한 대통령 후보로서 지난 8월 300억 달러의 IMF 차관도입에 동의하면서 현정부의 재정-금융 정책을 지속할 것을 약속했다. 그가 이번 선거운동 기간동안 기업가 집단을 비롯해 중도성향의 지지세력을 대거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국내외 자본가에게 있어 이념적 불안요인을 불식시키게 하였다. 좋든 싫든 그는 ‘사회민주주의자’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룰라를 당선시킨 이상의 요인들은 브라질 대통령으로서 룰라의 앞날을 그 이상으로 위협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미래에는 상당한 시련이 예상되고 있다는 뜻이다.

룰라, 적과의 동침

첫째, 브라질에 경제위기가 오고 있는가? 국제경제의 불황과 아르헨티나 사태로 말미암아 브라질 경제도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남미국가로의 투자를 망설이고 있고, 이자율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브라질 경제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공공부채인데 현재의 채무구조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즉 오늘날 대부분의 공공부채는 외국은행이나 국제금융기관보다는 브라질의 국내은행이나 연금공단 등에 지고 있는 국내채무(내채)이다. 이는 국내적 조정이 가능하지만 상환불능 사태가 올 경우 모든 피해를 국내에서 흡수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내채라도 달러나 이자율의 변화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현상황에서 이자의 증가속도가 빠르다. 2002년 11월 현재 내·외채를 포함한 브라질의 총 부채는 2300억 달러로 추산된다.

브라질 정부의 입장에서는 보다 손쉬운 채무조정을 위해 이자율을 내리는 것이 시급하지만, 경제에 대한 국민의 불안심리가 제거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빚을 갚기 위해 GDP 대비 35%에 육박하는 조세 부담률을 더 높일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IMF는 차기 연도에 예정된 240억 달러를 브라질에 지원하는 조건으로 3.25%의 흑자재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 초기의 룰라는 인플레 억제, 환율 안정, 재정흑자 등 현단계의 안정화 정책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 이외의 별다른 처방을 취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룰라가 당면한 두번째 딜레마는 생존의 차원인 첫번째 단계를 뛰어넘어 국내적 생산기반을 다시 일으켜 빈곤을 해결하고 경제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르도수 현 대통령이 금융·무역·기술·투자 등 핵심 4개 분야를 무분별하게 개방한 결과 중남미의 선진 산업국(Industrial Powerhouse)이라는 브라질의 이미지는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많은 국내기업의 경영권이 다국적기업으로 넘어가면서 국가 전체적인 생산 결정은 브라질 국내의 필요가 아니라 국제적 수익성을 따르는 외국 기업인들이 좌우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기업들에 의한 국제경쟁력 강화나 기술혁신 등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국내적 생산기반을 확충하여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가능하든 아니든 룰라는 자신의 지지기반, 즉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5000만 명의 절대빈곤층을 위해 이를 무조건 추진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다.

셋째, 국내경제의 회복을 위해서 국제문제,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야 하는 것도 룰라의 과제이다. 미국은 2005년으로 예정된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의 창설에 브라질이 협조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며 국무성 고위관료의 언사에서 볼 수 있듯이 룰라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그다지 크지 않다.

예를 들면 현재 제시돼 있는 미주자유무역지대의 투자·특허 관련 규정의 경우 산업정책과 수입대체전략 등 노동자당의 주요 경제 구상을 크게 약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정책이 이라크 문제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룰라가 당장 미국의 표적은 되지 않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할지 모른다. 룰라로서는 다만 그 시기를 가능한 한 늦춰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북동부 빈민출신의 새 브라질 대통령은 국내의 기득권 세력과 미국이라는 자신의 적과 동침하면서, 동시에 지지자들을 달래기 위한 처방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당면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룰라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지 모르는 위험요소는 그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과 무조건적인 지지론이라는 상반된 평가일 것이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브라질 헌정사상 최초인 좌파 정권의 탄생으로 이란, 이라크, 북한으로 이뤄진 ‘악의 축’(axis of evil)보다 더 위험한 연대가 결성될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에 응수하여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앞으로 브라질은 베네수엘라, 쿠바, 에콰도르와 함께 ‘선의 축’(axis of good)을 이뤄 라틴아메리카인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2002년 브라질의 대통령에 당선된 룰라를 읽는 시각은 다양하며 또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의 혼란(confusion)이 룰라의 브라질에게 있어 현실의 혼돈(chaos)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곽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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