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1월 2011-01-01   2249

서평-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꾸는 용기, 그것을 분별하는 지혜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꾸는 용기,
그것을 분별하는 지혜

테레사
자유기고가

나라 없는 사람 |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 8

“땜빵(표준어로는 땜질이겠지?)”으로 하는 독후감 쓰기가 어쩌다 보니 해를 넘겼다. 처음 최 모 좬참여사회좭 팀장이 새로 연재할 작가를 섭외하느라 펑크가 날 위기에 처한 10월호만 단 1회 메워달라는 읍소형 요청에 그간의 정리(?)를 생각하여 그러마고 덥석 약속한 게 화근이었다. 헌데 좬참여사회좭 개편이 늦어지면서 덩달아 나도 늘어지게 되었다. 이건 아니다 싶다. 나는 이 코너가 <서평>이라는데도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보기 좋게 묵살 당했다. 무슨 서평‘씩’이나 쓸 만큼의 깜냥이 안된다는 솔직한 자평이기도 하고 나로서는, 진정 마음속에서부터 ‘내맘대로 독후감’ 정도가 가장 적정한 명칭일 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서평>이라는 제목으로 코너가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맘대로 고른 책으로 내맘대로 해석하고 내맘대로 노닥거리는 장소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1만 3천 명의 좬참여사회좭 독자들에게 풍선만큼 큰 실례임을 알지만,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새해엔 주로 덕담들을 주고받는 것이 미풍양속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골머리를 싸매어봐도 건넬 덕담이 떠오르질 않는다. 사실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돌아가는 주변 상황을 보니 외려 감정조절이 잘 안되고 툭하면 목을 넘어 입술근처까지 욕지기가 차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고백하자면, 특정 신문의 헤드라인만 봐도,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인다. 눈에는 북극 빙하보다도 더 서늘한 찬바람만, 입에는 도저히 숙녀가 담을 수 없을 험한 단어들이 고인다. 나만 그런가? 뭐 못생긴 참여연대 여간사들은 북으로 가라고 손수 찾아오셔서 갈 바를 일러주신 ‘어르신’들까지 있는 마당에, 단어나 문장으로 덤비는 조중동쯤이야, 실은 안보면 그만이라고 하실 분도 있을 터. 헌데 화만 내고 팔짝팔짝 뛰기만 하는 쩨쩨하고 소심한 나 같은 사람을 보기 좋게 한방 먹이는 고수가 있었으니. 바로 커트 보네거트다. 그 분이라면 이런 나를 두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일러 줄 것이 틀림없다.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제5도살장, 243쪽)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으로는 좬제5도살장좭을 제일로 꼽고 싶다. 결코 “웃어서는 안 되는 웃기는 책,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슬픈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이 책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남자 빌리 필그림의 기이한 전쟁체험 정도가 되겠다. 사실 제목은 좀 살벌하다. 도살장?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제목으로만 친다면 결코 나 같은 요조숙녀가 들춰볼 생각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발견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작가가 풀어놓는 배경 이야기야말로 더 소설적이라는 점도 꼭 짚고 싶다. 소설 첫머리에 “이 모든 것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좬나라 없는 사람좭, 10쪽)라는 고백은 혹시 이것은 작가의 고도로 계산된 트릭이 아닐까하는 의심 많은 독자의 주의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대학 재학 중에 징집되어 유럽의 전쟁터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고 유서 깊은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이 연합군의 무차별적 폭격에 의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는 것을, 13만 명 시민이 몰살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 후 23년 동안 이 이야기로부터 도망치며 살았다. 물론 자신이 본 것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안했을 리 없지만, 그가 이 비극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까지 장장 23년이 필요했던 것이다. 좀더 정직하게 말하면 세상은 아무도 유럽을 독일나치의 만행으로부터 해방시켜준 선한 십자군인 연합군(영국군)이 무고한 드레스덴의 시민 13만 명을 무차별 살해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보네거트 자신조차 이 참상의 경험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허나 그와 함께 드레스덴 참상을 목격한 전우의 부인이 “그땐 당신들 둘 다 어린애였군요.”(27쪽)라고 일격을 가하고 나서야 “핵심을 깨달은” 그는 “이제야 우리는 역사상 최악의 인종인 나치에게 저질렀던 우리 자신의 추악한 행동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28쪽)다고 고백한다. 그가 80살이 넘은 나이에도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부시 정부를 맹비난하며 또 반전작가로 평생 살았던 까닭은, 참상의 한복판에 있었고 선과 악이 뒤섞인 “태초의 밤”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친 김에 또 다른 그의 걸작을 꼽자면 나는 주저없이 좬마더나이트좭를 지목하고 싶다. “우리는 가면을 쓴 존재라는 것, 그래서 그 가면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에 나는 매혹되었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 독일로 가 희곡작가로 꽤 성공을 거둔 남자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독일과 연합국의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한 것에 대해 쓴 회고록이다. 그가 한 일이라곤 나치를 선전하는 라디오프로그램 대본을 읽을 동안 “말버릇, 말 사이의 중단, 강조, 기침, 중요한 문장에서의 말실수”로 정보를 흘리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할 일이 없어진 그의 삶도 별 볼일 없이 흘러가지만 뜻하지 않는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다. 역시 전쟁에 대한 혐오와 어리석은 짓이란 깨달음이 절절히 묻어난다. 허나 그것은 그의 전매특허인 신랄한 풍자와 유머를 통해서다. 결코 흥분하거나 감상과 연민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웃음과 유머는 에세이집 좬나라없는 사람좭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훨씬 더 직접적이다.

  “커트 보네거트, 당신은 누구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라 없는 사람”이라고. “한심한 미국이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나라로 변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좬나라 없는 사람좭, 74쪽) 알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자식들이 살고 있는 미국을 기꺼이 버린 사람이다. “인간은 권력에 도취된 침팬지”이며 “미국 지도자들이 권력에 취한 침팬지”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챈 사람이다. 그는 “네이팜탄은 하버드에서 발명되었다. ‘진리’란 그런 것인가?”라며 영혼없는 지식인들을 가차없이 비난하는 사람이다. 또 그가 버린 나라의 바탕이 된 종교의 예수를 “그의 가르침이 훌륭하고 대부분의 말이 절대적으로 아름답다면 그가 신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곧이어 “우리 대통령(부시)이 기독교도였던가? 아돌프 히틀러도 기독교도였다.”(89쪽)고 또 그는 “미치광이 환자들만이 우두머리가 되고자 나선다”(101쪽)고 한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휴머니스트이다. 소아과 의사인 아들의 말대로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서로 도우면서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추상성(바로 우리 사회)에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사람”(81쪽)이 휴머니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 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치는 사람, 그가 바로 커트 보네거트이다. 그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그의 죽음으로 인해 이 우주의 정신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는 거지.”(좬제5도살장좭, 34쪽)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