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1월 2011-01-01   3269

아주 특별한 만남-안담 회원

기존의 앎을 경계한다
대학 새내기 되는 로드스쿨러


이경휴
수필가, 『참여사회』 객원기자

“철학과에 진학하기로 했을 때 취업을 우려한 주변의 반응은 한마디로 아연실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이미 최고 수준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이 그 수준만큼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소통의 부재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제 꿈은 무너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회복하는 일,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공동체적 행복을 꾸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제게 철학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안담의 대학 입학 자기소개서 중 일부)

2011년 새해가 밝았다. 많은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각오로 새해를 시작할 것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 실린 칼럼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공감을 했다. ‘제발 나 자신과 싸우지 마라’ 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글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이 닦달하고 살아가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 내용이었다.

  그에 따르면 새해란 새로운 결심을 하기 위한 하나의 매듭에 불과하다. 미래란 오지 않은 시간이기에 불안한 건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불안함을 잊기 위해 내부의 적을 자신으로 삼고 그 적과 싸우기 위해 새해의 결심을 다진다고. 곰곰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말이다. 언젠가부터 ‘나 자신’과 싸우는 게 하나의 문화 트렌드가 된 세상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늘 불안하고 두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서, ‘2011년은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는 해’로 정하라고 끝을 맺었다.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 있을까. 물론 복잡다단하고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사회에선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 할 사람들이 많으리라. 하지만 관계에서 벗어나 올곧게 나만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싶다. 신년 벽두에 그 역할을 충분히 잘하고 있는 어린(?) 숙녀를 만났다. 비록 애순(새로 나온 어린 싹, 어린순)에 불과하지만 우리 모두가 롤모델 삼아 새해를 계획하기에 훌륭한 회원이다. 92년 생, 안담 회원. 아직 ‘스무’ 자가 붙지 않은 나이다. 스스로 ‘19.9 세대’라며 싱그러운 차림으로 ‘카페통인’에 들어섰다. 바깥은 천지가 꽁꽁 얼어붙는데 레깅스조차 신지 않은 쇼츠 차림이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은 허리춤에서 출렁거리고 건강한 다리는 분홍빛 꽃무늬 운동화가 받쳐주고 있었다. 춥지 않아요? 순간 튀어나온 말에 ‘강원도 사람인데 이 추위쯤이야.’ 하며 크게 웃는다. 한겨울에 함박꽃 한 송이가 막 피어나고 있었다.

종횡무진, 읽고 쓰면서 학교와 산골의 폐쇄성 극복

평창군 봉평에서 고등학교를 올해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수시 합격했다. 초등학교부터 그곳에서 다녔다면서 ‘완전 강원도 촌년’이라며 자신을 희화해한다. 지난 해 1월, 아카데미 느티나무 강좌를 수강하게 되어 참여연대와 더욱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의 글쓰기 교실’이었다.

  “주 수강층이 3-40대라서 깜짝 놀랐어요. 제 바로 위가 대학원생이었고, 강의 내용도 어려웠지만 저는 제 수준보다 좀 높은 강의를 들으며 배우기를 좋아해요. 첫날 과제가 직권상정에 대한 분석 기사를 써오는 거였어요. 열심히 자료를 찾으며 공부했는데 재미있었죠.”

  예사롭지 않는 첫 발언에 긴장하며 쏟아질 이야깃거리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연신 긴 머리를 끌어올리며 쉴 새 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생생하게 보는 여학생의 재기발랄한 화법이었다. 질문을 하나 던지면 답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체를 아우르며 흘러간다. 원래 강원도 태생이냐고 묻자,

  “태어나긴 서울에서 낳지만 초등학교 들기 전까지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어요. 중학교 때 쓴 ‘지리산 연가’라는 시의 한 부분처럼 ‘갈 곳은 많으나 돌아갈 집이 없는 네 식구’였죠. 학교 들기 전까지 봉고차 한 대에 식구들이 모두 타고 지리산 자락에서 얼마 살고, 또 다른 곳에서 좀 살고… 이렇게 살았어요.”

  아니, 분명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더구나 입시제도의 최고 정점에 서있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의 환경이 그러하다니,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떤 부모였기에 그 생활이 가능했을까, 또 궁금할 수밖에.

  “청소년 대안교육 공간인 ‘하자센터’의 창의적 글쓰기 시간에 아버지의 생애사를 쓴 적이 있어요. 한마디로 부모님은 현실감이 전혀 없는 분들이죠. 아버지는 남들이 살듯이 그렇게 평범하게 살지 않는다는 생각이 늘 있었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적극 지지 했죠. 그러다 나와 동생의 학교 문제 때문에 봉평에 정착했어요. 아버지가 구상하는 일이란 10-15년을 앞서가는 아이템입니다. 지금도 그 뜻을 버리지 못하고 있죠. 예를 들면 ‘태극스키’ 라는 우리 식에 맞는 스키법을 개발하고 보급하려고 애를 쓰고, ‘생계도랑   ’ 이라는 아이템도 가지고 있죠. 그건 옛사람의 지혜로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계획안이에요. 지금은 그나마 영어공부방이 생계수단이 되어 동생이랑 편하게 학교를 다녔죠. 우리는 차상위계층 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았죠.”

  보헤미안적 가족사를 들으니 학교생활 또한 만만찮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극복했을까?

  “학교와 시골의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학교생활이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강요에 의해 머리를 깎을 수 있는 곳은 학교, 군대, 교도소 밖에 없잖아요? 그런 곳에서 개인적으론 좋은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학교라는 체제 속에서는 내 스스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어요. ‘학생 신분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을 찾자’가 학교생활이었어요.”

  내공이라는 단어와는 도저히 줄긋기가 되지 않는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이지만,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는 듯했다. 그래, 시인 브레히트는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고 했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그는 또다시 말을 이어갔다.

스팩아닌 스토리를 쌓다 

“나는 스스로 로드 스쿨러Road Schooler가 되어 내 스토리를 만들었어요. 대학에 합격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스토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학교에서 선발하는 기준인 스팩에는 미흡할지는 몰라도 스토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읽는 책들을 따라 많이 읽었죠, 책을 한 권씩 빼와서 읽는 게 아니라 책꽂이를 통째로 가져와서 읽었죠. 그리고는 치열하게 글을 썼고, 이게 제 스토리입니다.”

  청소년을 위한 대안교육 공간인 ‘하자센터’에서 마음껏 글쓰기를 했다. 글쓰기에 몰입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비로소 학교에 대한 비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학생기자로서의 한계를 깨닫게 했던 <오마이 뉴스>에 기사도 작성했고,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토론하는 캠프인 ‘피스로드’에도 참가했다. 그 캠프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은 햇살에 반짝 신록이 되었다.

  “제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바라보았던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걸 느꼈어요. 할머니들의 모든 행동을 피해자로 보고 한이 담긴 메시지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 같아요. 그것은 위안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유지하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었다. 각성이란 말은 이런 때 적합한 표현이지 싶다. 미처 찬물을 털기도 전에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앎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저는 기존의 앎을 부수고 얻게 되는 앎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피스로드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이것을 ‘unlearn’이라 했어요. 다시 말해 기존의 앎에 대해 항상 경계하는 태도를 가르쳐준 캠프였습니다.”

  이미 빛나는 달성의 경지에 이른 일상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캠프의 글쓰기를 거쳤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끔찍하게 힘들었지만 보람을 느낀 글쓰기가 ‘김종배의 시사적 글쓰기’였다고 고백했다. 마지막 수업시간 선생님은 ‘글쓰기에 소질이 많으니 계속 글을 써라, 지켜보겠다’는 그 말씀에 고진감래의 격언을 터득케 해준 수업이었다며 생글생글했다. 풋풋한 새순이 영하의 땅을 뚫고 막 솟아오르고 있었다.

소통과 연대를 생각하는 대학생활 할 터

대학 이야기로 돌아갔다.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인 부품을 제공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한 대학, 자격증 장사 브로커에 불과하다는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학교생활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여전히 활기찬 대답이 넘쳐 나왔다. 

  “어릴 적에 저는 제 마음대로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좋아했어요. 당시 유행하던 만화주제곡들을 제쳐두고 내가 만든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놀았죠. 나중에 Melody란 어원은 꿀을 뜻하는 Mel과 시를 뜻하는 Ode가 합쳐진 말이라는 걸 알았어요. 대학에서는 소통과 연대라는 멜로디를 연주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소수자를 조명하는 글쓰기와 인문학을 배우고 토론할 수 있는 대안적 학습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싶어요.”

  다부진 각오를 들으니 앞서 말했던 대학에 대한 혹평이 무안했다. 눈치를 챈 듯,

  “흡족하지 못한다면 로드 스쿨러가 되어 종횡무진 길 위에서 배움을 찾아야죠. 대학에서도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하는 힘을 기를 거예요.”

  참여연대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 생각이냐고 질문하자, 여태껏 보아왔던 표정과 달리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솔직히 참여연대는 글쓰기 수업을 통해 가까워졌어요. 시민단체의 회원이 되는 걸 생각 안 한 건 아니지만 학생 신분으로 후원하는 것도 어렵더라고요. 좋은 강좌를 듣고 그걸 계기로 회원도 되었으니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 지 찾아봐야죠.”

  인터뷰 시작부터 앞에 놓여있었던 커피잔에 처음으로 입을 갖다 댔다. 거침없는 자유발언이 이어지는 사이 찻잔은 온기를 잃은 지 오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중함을 잃지 않는 모습은 이미 이파리 무성한 나무로 뻗어나고 있었다.

  “제가 지방의 한계성을 극복한 사례가 되었는지 요즘 방송이나 신문 인터뷰가 많이 들어와요. 일일이 다 할 수는 없죠. 제가 잘 생각해서 결정합니다. 교육방송의 ‘공부의 왕도’라는 프로그램에서 출연 요청이 나왔는데 거절했어요. 하지만 좬참여사회좭 인터뷰는 흔쾌히 응했어요.”

  순간 옹골찬 인터뷰이를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 사회는 미꾸라지를 용이 되기를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미꾸라지는 미꾸라지로 만족하고 살고 있는데 리더, 영웅 만들기에 쏠림 현상이 심하니 미꾸라지들이 불행해져요. 제가 소수의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방송의 뻔한 설정에 동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좬참여사회좭 인터뷰는 나를 진솔하게 드러내기 가장 편한 인터뷰라 생각했어요.”

  인터뷰 끝자락에 어깨가 갑자기 묵직해졌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나타나 있다는 소중현대小中顯大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한 얼굴이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일어서는 모습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한겨울 속에 활짝 핀 꽃은 웃음 또한 함박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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