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7월 2013-07-07   1923

[참여연대史] 종이에 새긴 희망, 열정 그리고 고뇌 – 참여사회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11

종이에 새긴 희망, 열정 그리고 고뇌

참여사회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 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참여사회』가 200호를 맞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참여사회 7월호

 

『참여사회』는 ‘시민사회 정론지’를 목표로 1995년 5·6월에 창간하여 지금까지 발간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한 호 휴간을 한 적도 있고, 초경량 월간지가 되기도 했고, 회원 소식지 <아름다운 사람들>과 통폐합되기도 했다. 한편 기자를 여럿 두어 높은 취재력과 섭외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유수의 기업에서 광고를 받아 싣는 풍요로운 시절도 있었다. 참여연대, 또는 한국 사회의 역사의 흐름과 함께 부침을 겪은 셈이다. 

 

 

차병직 변호사

 

 

미국 초기 역사에서라면 어느 장면에서든 거의 빠지지 않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영국 식민지에서 최초의 잡지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1741년에 만든 잡지의 제목은 <제너럴 매거진 앤드 히스토리컬 크로니클>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프랭클린에 권위를 부여하고 싶어 만든 사실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제너럴 매거진>보다 3일 먼저 <아메리칸 매거진>이 발행됐다. 물론 최초의 잡지는 어떤 형태였는지 잘 모른다. 고대 중국의 책 중에 잡지와 유사한 종류가 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잡지의 효시로 꼽는 것은 1663년 독일의      <에어바우리헤 모나츠 운터레둥엔>, 굳이 번역하면 <계발을 위한 월간 토론>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 영국에서만 하더라도 대니얼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를 쓰기 전인 1704년에 <리뷰>, 그로부터 5년 뒤에 리처드 스틸이 <태틀러>라는 잡지를 주 3회씩 발간했다.

 

잡지는 어떤 글이든 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누구라도 대상으로 하여 만들 수 있다. 원하는 분야를 골라 전문화하기도 쉽다. 독자 입장에서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되고, 어떤 자세로 즐기더라도 지루한 시간과 맞바꿀 수 있으며, 어디든 들고 다니며 그저 그만한 수준의 교양을 유지하기에는 제격이다. 개인의 취미나 습관에 큰 영향을 행사하고, 공공의 문제를 일깨워 주기도 하며, 사회의 악을 고발하고 또 그만큼의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아메리칸 매거진>이 나온 지 몇십 년 만에 미국에는 100종이 넘는 잡지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됐다. 

광화문의 대형 서점 잡지 코너에 가면 그 종류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취미에 따른 장르의 구분으로 스쿠버를 포함한 수중 여행 편이 따로 있고, 기호를 다룬 맛의 세계는 요리에서 음료까지 다양하다. 그것도 세부 항목에 보통 서너 종류의 잡지가 경합한다. 커피도 그렇고 낚시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잡지는 차종에 따라 승용차, 트럭, 레이스카, 오토바이 등 10종이 넘는다. 창업, 소비자, CEO용 잡지가 다르다. 전기, 전자, 금형, 반도체, 로봇 등 기술 분야마다 구색이 갖춰져 있는데, 심지어 포장에 관한 전문지도 마련돼 있다. 한때 『참여사회』도 그 대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했다.

 

 

‘시민사회 정론지’를 목표로

 

근대국가가 성립할 때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혁명의 이념과 취지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인권선언문과 헌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이었으며, 그 밖에도 여러 홍보물이 필요했다. 참여연대도 마찬가지였다. 창립선언문의 외침만으로는 용산역 앞길을 지나는 시민 서너 명의 관심도 끌기 어려운 듯싶었다. 기자들은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긴 이름을 애써 외우려 들지 않았고, 어쩌다 한 줄 기사가 올라가도 데스크는 아예 무관심이었다. 명칭이 대수가 아니라, 대체 왜 참여연대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알려야 했다. 참여민주주의가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그 주체가 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식시켜야 했다.

 

창설 단계에서부터 저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창립 선언을 하고 열흘쯤 뒤에 새 식구를 한 사람 맞아들였다. 컴퓨터에 능숙한 이샛별이었다. 그에게는 PC통신을 이용한 회원 소식지와 전체 홍보를 총괄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무엇보다 참여연대를 알리고 시민운동의 당위성을 일깨워야 한다는 양면의 과제에 대한 조급함이 이샛별의 어깨를 슬며시 눌렀다. 회원들에게 보내는 소식지 수준을 조금 높여 11월에는 잡지 준비호를 제작했다.

 

참여사회 7월호

회원들에게 보내는 회원 소식지 수준을 조금 높여 발간한 <참여연대> 준비 1호. 1994년 11월 21일 발행했다.

 

제1호는 그냥 <참여연대>였으며, 편집 책임은 순천향대학의 장호순이 맡았다. 표지 디자인은 인쇄소를 통해 적당히 부탁했는데, 사진을 오려 붙여 만든 붕괴하는 성수대교의 이미지가 아주 엉성했다. 반대가 심했으나 운영위원장 안경환이, “이왕 만들었으면 그냥 쓰는 거지, 뭐” 하며 밀어붙였다. 두 번째 준비호는 분량을 10쪽 정도 늘였고, 김호기가 편집인으로 나섰으나, 기사는 여전히 10꼭지를 넘지 못하는 자료집의 변형이었다. 그 두 번의 연습을 바탕으로 1995년 봄 『참여사회』가 창간됐다.

 

다른 특별한 아이디어가 없는 한 『참여사회』라는 제호는 가장 무난했다. 잡지에 매달릴 인력과 비용을 고려해 격월간지로 출발했다. 창간호까지는 이샛별이 맡았으나, 그 다음호부터는 다시 새 인력이 보강됐다. 아예 『참여사회』 기자로 장윤선이 채용됐는데, 그때부터 실질적인 참여연대 저널리즘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월간지로는 <말>과 <사회평론 길> 외에 이렇다 할 진보 매체가 없던 때라, 장 기자는 책상 앞에 앉는 순간부터 나름대로의 각오를 다졌다. 참여연대 기관지의 성격을 벗어날 순 없었지만, 거기에만 얽매여 있지 않고 독립 매체로서의 기개를 항상 살려 나갔다. 

 

참여사회 7월호

참여사회 7월호

1995년 5월호 발송 작업 중인 참여연대 간사와 자원활동가들. 현재는 발송 용역 업체에 맡기고 있는 『참여사회』를 봉투에 넣고 우편 발송하는 일을 당시에는 수작업으로 했다.

 

열정을 쏟아 부었으므로 반응은 꽤 좋았다. 하지만 유료 독자를 확보하기에는 어려웠다. 잡지 맨 뒤에는 정기구독 신청 카드를 붙였지만, 4개월이 지날 때까지 정기구독자는 달랑 3명이었다. 세 번째 정기구독 신청을 한 사람과의 통화 내용은 아직 얘깃거리다. “정기구독 신청을 하려 합니다.” “성함은요?” “강준만입니다.” “아, 전북대 강준만 교수신가요?” “네. 그런데 1년치 구독 신청을 하면 할인이 됩니까?” “아니오. 할인은 안 됩니다.”

 

 

특종과 화제의 영화

 

세월이 흐르면서 특종도 더러 있었다. 총선연대 운동의 엄청난 파도가 지나가고, 2002년 4월 대선 전초전이 한창이었을 때다. 장윤선은 자원활동가 이창림에게 카메라를 들게 하고 광주 무등파크호텔로 달려갔다. 한나라당 후보로 경선 중이던 이인제 캠프의 부정선거운동을 감시하러 나선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정황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삼성전자 광주 공장에 새로 취임한 사장의 미래전략 발표회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회사로부터 성접대를 비롯한 향응을 제공 받는 현장을 적발했다. 두 사람은 용감하게 호텔 방문을 열어 젖혔는데, 거기에는 서울에서 내려간 기자가 속옷 차림으로 여성과 함께 앉아 있었다.

 

참여사회 7월호

장윤선 기자와 이창림 자원활동가는 2002년 3월 16일 민주당 광주 경선 취재를 위해 이인제 후보 측이 묵은 숙소 무등파크 호텔에 갔다가, 15일 S전자 광주 공장에서 생활가전담당 사장으로 취임한 H사장의 미래전략발표회 취재 기자들이 접대를 받는 현장을 목격했다. 장윤선은 이를 취재하여 기자들이 기업체로부터 식사, 술자리, 잠자리를 대접 받는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를 썼다.

 

뿐만 아니라 1999년 4월호에는 표지모델로 H.O.T.가 등장했다. 전성기의 H.O.T.는 서태지나 지금의 싸이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운 스타였다. 그렇게 대단했던 다섯 아이들을 안국동으로 불러들인 것은 장윤선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잠깐의 무료함이 제공한 호기심이었다. 인기 연예인의 사회적 발언을 발굴해 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기왕이면 최고 스타가 참여연대에 어울리지 않겠는가. 무작정 MBC에 전화를 한 다음 안내 음성의 지시에 충실히 따라 가요 담당자가 수화기를 들게 했다.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참여연대가 무엇을 하는 단체인가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자기소개였는데, 거의 10분이 소요됐다. 알고 보니 전화를 받은 사람은 보조 작가였다. 작가를 바꾸고, 작가는 다시 PD를 바꾸었다. 사람이 바뀔 때마다 10분씩 “참여연대란……”을 반복했다. 그 다음에야 H.O.T.와 관련 있는 프로의 담당 PD와 목소리를 나누게 됐는데, 그때는 10분 소개가 필요없었다. 그 PD는 참여연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이 저절로 진척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계는 여전히 복잡했다. 로드매니저를 거쳐 기획사 실장이란 사람과 마지막 통화를 끝냈다.

 

노랑머리의 강타와 보랏빛 머리의 문희준이 안국빌딩 2층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에치오팁니다.” 간사들이 환호하며 기립 박수를 보냈다. 오한숙희가  『참여사회』에 게재할 인터뷰를 하는 사이, 엄마 아빠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참여연대 일부 회원과 임원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가끔 이태호가 탁구를 치던 2층 강당에서 H.O.T.와 기념촬영을 하며 꼬마들은 수군거렸다. “야, 참여연대 대단해!”

 

한때는 유럽의 감수성을 지닌 작가 김중만이 표지 사진을 무료로 촬영해 주기도 했다. 모델로 선정된 불교 승려 수경과 가톨릭 신부 문규현은 진흙이 말라붙은 신발로 청담동의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찾았다. 사진을 찍고 내려와 강남 커피를 마셨는데, 한 잔에 9천 원이었다. 중과 신부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도둑놈들!”

 

『참여사회』의 호사스러움과 유별남은 창간호부터 깃들어 있었다. 국배판의 큼직한 판형에 종이는 고급 아트지였다. 포토콜라쥬 기법을 구사한 표지는 뉴욕에서 활동 중이던 이인수가 제작해 매달 DHL로 공수했는데, 그 비용만 무려 50만 원이었다. 그때 장윤선의 월급은 70만 원 약간 넘는 정도였다. 전체 제작 비용으로는 1천만 원 정도 들었고, 당시 참여연대 재정 규모에 비하면 믿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물론 전액  『참여사회』 지면을 이용한 광고비로 충당했다. 최고 잘나갈 때는 12개 면을 광고로 채웠다. 1995년 9·10월호에 게재된 어느 전자회사 전면 광고를 보면, 지금은 정치인이 된 젊은 시절의 안철수가 모델로 나선 진기한 장면도 확인할 수 있다. 

 

참여사회 7월호

1995년 9월호에 실린 광고. 한때는 『참여사회』 제작 비용 전액을 광고 수익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전문가”로서 모 전자기업의 컴퓨터 광고 모델이었던 안철수는 지금은 정치인이 되었다.

 

 

위기와 난국을 넘어

 

처음 발간된 『참여사회』를 보고 그 호화로움에 곱지 않은 시선으로 신랄한 비판을 퍼부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초기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권순옥의 생각은 달랐다. 시민단체의 잡지라고 꾀죄죄한 모양을 수수함으로 자위하며 움츠러들 이유가 없다는 태도였다. 기관지를 바탕으로 하되 대안 언론으로 많은 시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최대한 잘 만들어야 한다고 나섰고, 그 의도가 거의 적중했다. 참여연대의 성장과 함께  『참여사회』도 여론 형성 시장에서 제 역할을 당당히 해냈다. 안국동 시절  『참여사회』가 나오는 날이면 종로경찰서 출입 기자들이 잡지를 받아 보려고 줄을 섰다. 참여연대가 주도하는 시민사회의 이슈에서 기사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던 것이다. 

 

하지만  『참여사회』의 기세도 음울한 경제 사정 아래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IMF 구제금융 시대의 도래로 모든 경기는 위축됐고, 선의의 광고주들도 손을 끊었다.  『참여사회』 앞에는 2,800만 원의 빚만 남았고, 더 꾸려갈 재력도 인력도 없었다. 존폐를 논의하던 끝에 1998년 2월 9일 휴간을 결정했다. 그날 밤 몇몇은 술잔을 붙들고 울었다. 하지만 휴간은 그해 3·4월호 단 한 호에 그쳤다. 사무처장 박원순이 장윤선에게 물었다. “한 달에 얼마가 필요해요?” “300만 원이면 됩니다.” 판형을 대폭 축소하고 면수를 줄였으며 용지도 싼 것으로 바꿔 초경량화했다. 대신 복간호부터는 월간으로 발행했다. 5월호가 된 복간호 권두 칼럼은 박원순의 <걸레론>이었다. “카프카는 ‘벌레’가 되는 느낌은 묘사했을망정 (나처럼) ‘걸레’가 되는 느낌을 말하지는 못했다”며,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회원들은 메시지를 보내 격려했다. “작으니까 더 좋네요, 시민단체 잡지 같고.”

 

갈등은 돈에서만 비롯하는 것은 아니었다. 2001년 신년호를 준비하면서 장윤선은 경실련 사무총장 이석연과 인터뷰를 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이석연은 경실련 내부를 성토하다시피 열변을 토했다. 논란을 잠재한 인터뷰 기사와 함께 원고가 마감되고 인쇄소로 넘어갔다. 그 사이 이석연은 뭔가 불안했던 모양으로, 경실련의 다른 사람을 통해 참여연대로 연락을 했다. 그 이전까지 어떤 원고든 사전에 편집부 밖의 사람이 검토하거나 간섭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해 긴급 편집회의가 열렸다. 사무국 간부들이 논의한 끝에 경실련이 불편하게 여긴다면 기사를 빼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장윤선은 동업자 논리를 근거로 편집권을 침해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막 돌아가려던 윤전기는 멈췄고, 기사는 삭제됐다. 정론을 지향하는 한국 언론인의 표상이자 당시 참여연대 대표로  『참여사회』 발행인이었던 김중배도 참을 수 없다며 분노했다. 그날 밤 박원순과 조희연은 편집기획위원 백병규, 안영배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았다. 

 

 

명멸하는 가운데 짐을 지고

 

2003년 말경부터는 최인숙이 편집을 맡았지만, 어려운 여건에 잡지의 성격과 방향에 관한 이견은 여전했다. 종합적 시민 잡지로서 마음껏 개성을 살려 보겠다던 꿈은 9년 동안 실현하지 못했다는 것이 최인숙의 표정이다. 현재 사무처장과 편집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이태호는 『참여사회』가 참여연대의 기관지로서 충실하면 현재 환경에서 만족스럽지 않느냐는 의견이다. 2012년 2월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20주년을 향하고 있는 송윤정은 벌써 “원고를 마감해도 후련하지가 않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출판계나 언론계의 실정과 참여연대의 단체적 특수성을 고려하면 달리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아무리 투자를 하고 잘 만든다고 누가 종이로 된 잡지를 지금 이상으로 사서 읽겠는가. 무수한 잡지가 같은 꿈을 지니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명멸했다. 미국 최초의 잡지 <아메리칸 매거진>은 3개월, <제너럴 매거진>은 6개월을 버텼다. 근년에는 세계에 영향을 행사하던 <뉴스위크>마저 종이 잡지는 폐간했다. 거기에 비하면 20년째를 맞으면서 면면히 이어온  『참여사회』의 전통과 성과는 시민사회의 역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그 연륜 이상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존재가  『참여사회』다. 20년 이후의  『참여사회』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참여연대가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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