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6월 1999-06-01   1092

민주노총 포스터 유감

민주노총 포스터 유감

어느날 사무실에 민주노총 노동절 기념 포스터가 배달되었다. 정신없이 일하고있던 중에 무심히 흰 벽면 가득 붙여진 커다란 포스터를 보았다. 대뜸 “저게 뭐야?”하는 내게 한 여자 후배가 “그렇죠? 좀 문제 있죠?”한다. 사무실을 나와 돈벌이를 하러 가면서도 그 포스터가 계속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나는 글을 썼다. 우리 사무실 남녀 모두에게 ‘문제 있고’ 그것도 정도가 ‘심하다’는 평가를 받은 그 포스터에 대해. 그날 새벽에 작성한 글을 민주노총 CUG ‘시민의 소리’에 올렸고, 이때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다.

문제가 된 그 포스터의 앞면에는 고용안정이라 쓰여진 붉은 조끼(쟁의복)를 입고 싸우러 나가는 남성(가장)의 커다란 모습이 칼라로 인쇄되어 있고, 뒷 배경에 추레한 치마를 입은 한 아주머니가 아기를 안은 채 안쓰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배웅하는 모습이 흑백으로 아주 작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포스터에는 ‘당신만이 희망입니다’라는 로고가 쓰여 있었다.

이 포스터를 보면서 나는 올해 치러진 ‘3·8 여성대회’를 떠올렸다. “IMF는 여성과 남성의 차별을 없앴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해고되고 있으니까…그러니 힘을 합쳐 다 함께 싸워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민주노총의 대표가 연대사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포스터는 왜 문제인가? 나는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이 포스터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결혼했다는 이유로, 맞벌이라는 이유로, 남편과 한 직장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이를 피하기 위해 법률상 이혼까지 불사하더라도 직장에서 가정으로 쫓겨와 또 다른 일자리를 찾고, 조금이라도 반찬값을 벌기 위해 임시직으로 파트타이머로 뛰어다녀야 하는, 거기다 생계비를 아끼기 위해 불어난 가사노동을 무보수로 감내해야 하는 여성들의 고통이 삭제되어 있다. 거기다 이 포스터는 고용안정을 위해 바깥에서 열심히 싸우는 우리 가장들에게 이제 짜증내지 말고 묵묵히 인내하며 당신만이 희망이라는 깨우침과 격려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종 ‘남편 기 살리기’이다. IMF 이후 본격화된 ‘여성 우선해고’를 적극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던 우리 노동운동이 반성은커녕 오히려 성별 역할분리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늘 같이 싸워야 하고 그래야 크게 이긴다고 해놓고 정작 싸울 때는 그 관심도 내용도 형식도 책임도 오로지 남성, 대기업, 정규직 중심인 우리 운동이 남성 노조 조직률 14.9%, 여성 노조 조직률 5.6%라는 결과를 만들지 않았는가.

많은 이들이 포스터를 보고 속속 글을 올렸다. 그리고 그 항의는 ‘포스터 배포중지 및 재제작’요구와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재제작을 위해 돈을 내겠다고 주소를 적기 까지했다. 급기야 민주노총은 답변서를 보냈다. 민주노총은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으며 다만 ‘투쟁의지가 있는 평균적인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있을 법한 장면을 전달한 것이며, 따라서 포스터에 대한 나의 글은 ‘오해와 비약, 모독’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항의자들의 불만은 더 크게 일었고 각 단체 및 총학생회 명의의 성명서가 잇따르자 드디어 민주노총은 노동절 바로 전날 사과하는 글을 올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같이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또 지하철노조를 선두로 중대한 투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제기가 혹 연대를 놓치거나 민주노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게 되지 않을까. 사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일을 한 지 8년째, 노동조합 사무실을 방문해 여성들로부터 차 대접을 비롯한 각종 수발을 받아야 했던 그 불편함, 여성노동자들이 절대적인 곳에서조차 내가 만나야 했던 절대 다수의 남성 노조간부, 노조라는 최후의 방어막 없이 길거리로 쫓겨나는 여성노동자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용기를 냈다.

가장 핍박받고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운동이라면, 이제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노동자’와 맞먹는 수의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돌려야 한다. 또 그들이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이들의 평등 노동권이 유보돼서는 안된다. ‘평등’은 당장 해결돼야 하는 것이지 몇가지가 우선 해결되면 따라서 해결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임 있는 반성을 통해 우리는 ‘당신만이 희망’인 사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희망’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외를 기반으로 한 ‘평균’을 버려야 참된 ‘평등’이 가능하다는 값진 교훈을 얻어야 한다. 얼룩진 포스터를 통해서.

서정영주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조사연구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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