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6월 1999-06-01   622

그들의 명예로운 명예

그들의 명예로운 명예

‘명예라는 말은 의무를 뜻한다.’ 이것은 영국의 격언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명예는 자기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씌워주는 월계관이란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도 이해가 된다. ‘명성은 우선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명예는 잃지만 않으면 된다. 명성을 잃는 것은 이름을 잊는 소극적인 것이지만, 명예를 잃는 것은 치욕적이며 적극적인 것이다.’명예는 소중한 것이다. 어느 인간의 가치에 대해 타인들이 부여하는 외부적 명예까지도. 명예는 귀한 것이라고 믿는다. 자기 자신의 명예감정을 포함한 주관적 명예까지도. 명예란 지켜야 할 목적이다. 인간의 본래적 가치에 해당하는 객관적 명예까지도. 그리하여 명예는 형법전의 목록에까지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 명예를 위한 불타는 듯한 투쟁이 있어 눈여겨 본다. 검사들이 언론을 상대로 분연히 일어났다. 법조인들을 대표하다시피 칼을 빼든 주인공은 금년 초 대전지검과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근무하던 22인의 검사들. 안타깝게도 그 목표가 된 언론기관은 대전 이종기 변호사의 사건수임비리와 관련하여 1개월 이상 집중보도를 한 문화방송이다. 문화방송은 ‘악의에 찬 왜곡편파보도로, 국가의 기강을 좌우하는 형사사법의 양대 축인 판사와 검사를 멸시하고 조롱하여 국가 자체의 존립근거를 그 근저에서부터 뒤흔들고 말았다’는 주장이다. 검사들은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으로 11억 원을 청구하고 있다.

성남지청의 한 검사도 문화방송과 기자를 상대로 5억 원을 청구한다. 그가 수사하여 기소한 피의자는 동일한 사건으로 이미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다. 피의자는 그 사실을 기자에게 알렸고, ‘한심한 검찰’이란 제하의 뉴스로 보도됐다.‘이미 확정판결로 끝난 사건을 착오로 이중 기소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검사가 신이 아닌 이상 일일이 전과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실무상 극히 이례적이고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 보도 역시 악의에 찬 명예훼손이란 것이다.

어머니를 위하여 격렬하게 항의하다 검사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딸이 구속된 것도 엊그제의 일이다. 글도 제대로 모르는 노모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딸은 수사과정이 권위적이었고 그 결과도 석연찮다고 판단했다. 검사를 찾아가 항의를 했고, 냉담한 반응에 분을 삭이지 못하고 컴퓨터통신을 이용해 검사를 비난하는 글을 줄기차게 올렸다. 그리고 구치소에 갇혀 어느 정도까지 화를 냈어야 검사의 명예를 보호할 수 있었는지 진지한 상념에 잠기는 처지가 되었다.

검사 개개인은 검찰청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법률상 독립된 관청이다. 물론 검사는 국가기관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이기도 하다. 검찰조직에도 명예는 있고 하나의 인간 검사에게도 명예는 있다. 그러나 시민이 항의의 화살을 겨냥하는 것은 검찰권의 행사이지 검사란 직책을 가진 개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항변은 경우에 따라 과장될 수도 있고 도가 지나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검사나 판사를 비난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작용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을 엄격히 제한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일반적 감시라는 통제를 거부하는 넌센스다. 법률과 권한을 마음껏 이용한 검사들은 ‘명예란 의무를 뜻한다’에서 ‘의무’를 권리로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

이야기가 시작된 김에 법률가들의 명예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법률가들에게 보호되어야 할 어떠한 명예가 있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법률가들을 존중하기는커녕 조롱의 대상으로만 삼아왔는가. 그 지나친 표현들은 문학적 수사에 불과한가, 아니면 진실을 담고 있는 뼈아픈 역설인가.

적어도 로마시대에 법률가는 명예로운 존재였다. 그 이유는 어쩌면 원칙적으로 무보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돈 대신 명예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괴물 앞에서 변호사는 돈을 택하게 되었다. 그 반대급부로 명예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은 잊은 채, 부가 있어야 명예도 따른다는 모순을 추종했다. ‘훌륭한 법률가는 나쁜 이웃이고’‘긴 소송은 변호사의 이익’이란 현실은, 곧 ‘소송은 당사자를 여위게 하고 변호사를 살찌게 한다.’ 변호사의 일을 돕는 보조자들은 ‘적게 먹고 많이 뛰지’만, 그것만이 법률가의 전략은 아니다. 조금만 세심하다면 ‘좋은 변호사는 소송의뢰인을 완전히 궁핍하게는 만들지 않는다’는 잠언을 고려한다. 세상은 돈 없는 변호사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 일종의 변호사였던 토르발트 헬메르도 경제적 능력만 있었더라면 그의 아내 노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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