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0월 2002-10-24   364

시장주의라는 몽상과 탈시장주의라는 현실-

IMF 위기가 닥치고 나서 우리 사회에 익숙해진 말이 있다. ‘시장’이라는 말이다. 신문 경제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들, “시장의 반응”, “시장의 평가”, 이런 말들을 생각해 보자. 정부 경제정책이 발표되면 어김없이 이런 ‘시장’의 의사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런가 하면 97년 경제위기가 터졌을 때, IMF나 저명하신 경제학자들은 너나 없이 위기의 원인이 “시장경제의 부족”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한테만 그런 게 아니다. 아르헨티나는 외환위기에 시달린 게 벌써 몇 번째인데, 그때마다 충고는 한결같았다. “더 많은 시장경제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위기는 끊일 줄 모른다. 도대체 시장이란 놈은 얼마나 큰 배를 갖고 있기에 그토록 포악한 탐식 끝에도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혀를 낼름거리는가?

최근에 출간된 헝가리 출신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의 글모음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는 바로 이 괴물의 족보를 밝히고 이를 퇴치하는, 혹은 두 날개를 자르고 발톱을 뽑아 양처럼 길들이는 방법을 밝히는 책이다. 도대체, 어떻게?

다시 ‘사회’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시장’

시장이라는 괴물을 비판한 사람으로는 이미 칼 맑스라는 걸출한 전사(戰士)가 있다. 굳이 여기에 또 다른 ‘칼(Karl)’을 충원하는 이유는 폴라니가 맑스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시장의 뿌리를 캐들어가고 그것의 강점과 약점을 훤히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폴라니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인류의 경제사를 추적함으로써 19세기 이후 인류에게 익숙하게 된 ‘시장경제’라는 것이 얼마나 ‘예외적’이고 ‘불안정’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바로 국내에도 소개된 경제사의 고전 <거대한 변환>(민음사, 1997)이다.

이번에 출간된 글모음은 저자의 다른 논문들과 함께 이 <거대한 변환>의 일부를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자 해설을 통해 <거대한 변환>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풀이하고 있다. 이 한 권만 읽어도 폴라니가 평생에 걸쳐 이야기하려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대충 알 만하다.

굳이 속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폴라니의 괴물 퇴치법 혹은 괴물 순치법의 핵심은 그놈이 얼마나 별볼일 없는 놈인지를 밝히는 데 있다. 시장은 인류사가 일정하게 발달하고 난 뒤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큰 탈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놈이 불을 내뿜으며 사람들에게 달려든 것은 오직 최근 영국에서 시작된 일일 뿐이다. 그 전까지 시장은 사회의 얼개 속에 단단하게 결박되어 기도 펴지 못했다.

즉, 상업적 이익을 얻기 위한 교환 행위는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여러 인간 행위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지 그것 모두를 지배하는 절대절명의, 무소불위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근대의 여명기, 영국에서 괴물의 족쇄를 풀어주는 어리석은 일이 벌어졌다. 인간의 노동력, 식량 생산의 기반인 토지, 교환의 수단인 화폐가 그것 자체 장사의 대상이 되는, 즉 시장의 상품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부터 다른 모든 인간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경제’, 바로 시장의 논리가 되었다.

아무리 자연의 천형 속에 허덕거렸어도 일부러 굶는 이를 만들어내는 일은 없었는데, 이제는 굶주림을 무기로 사람들을 협박하여 공장에 가둬두고 자본가들의 장삿속을 위한 노동에 종사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황당한 제국의 논리(동양의 경우는 조공)로 치장하고 있더라도 국가 사이의 교역이 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몰두한 적은 없었는데, 이제는 금 화폐(나중에는 달러)의 획득을 위해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들을 짓밟는 것이 ‘문명’의 이름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폴라니가 이러한 괴물의 방생(放生)을 한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우리 안에 살길 즐겨하던 놈이므로 사회의 나머지 부분의 반격을 통해 충분히 다시 포획해 길들일 수 있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이미 시장의 독재가 판치던 19세기부터 ‘시장’의 전횡에 대항하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시작돼 왔고, 폴라니가 <거대한 변환>의 원고를 다듬던 30∼40년대에는 대공황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시장에 대한 사회의 반격이 마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적군(赤軍)의 승리와 같은 반전(反轉)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폴라니의 이러한 자신감은 무엇보다도, 시장의 독재를 유지·확장하려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너무나 터무니없는 몽상이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인류 역사 그 어느 때도 현실이 몽상에 발목잡힌 적은 없었다. 한때 인간 사회의 노예였던 괴물을 숭배하고 드는 미신은 단지 한철 반짝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그 한철이 지나가고 있다. ‘거대한 변환’이 시작되고 있다. 50여년 전, 폴라니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소극으로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폴라니의 말대로라면 벌써 명줄이 끊어졌어야 할 ‘시장지상주의’라는 괴물이 이제 다시 온 세계를 자신의 그림자로 어둡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폴라니 자신, 40년대에 시장 사회와 탈시장 사회 사이의 선택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은 여전히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온상으로 남아 있는 데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파멸적인 체제에 포함되어 있는 유토피아적인 정책 노선을 독자적으로 추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중략)

미합중국은 이미 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자유주의적 경제에 들어맞는 전세계적인 세계상을 고집한다. 그런데 영국의 반동적인 인사들은, 영국의 대외경제 체제도 옛날로 되돌려 미국의 체제와 일치시키는 것이 아직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핵심적인 문제다.(<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123∼125쪽)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어쩌면 폴라니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괴물의 마지막 둥지, 미합중국으로부터 비롯된 이 괴물의 야심찬 반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소극(笑劇)으로”라는 맑스의 문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역사의 그 어느 장(章)에서도 한갓 쇠퇴하는 세력의 공세의 ‘반복’이라는 것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린 적은 없었다.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를 한 번은 시도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패배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역시도 예감했던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그럼 폴라니가 전망했던, 혹은 강력하게 추천했던 대안은 무엇일까?

일개 국가 차원을 넘어서는 국제적 협력에 기반한 계획경제. 하지만 이는 1920년대 말 소련에 등장했던 것과 같은 국가관료기구에 의해 움직이는 관치(官治)경제는 아니다.

“대안은 민주주의, 그것도 영구적인 민주주의로 조직된 사회주의다.”(같은 책, 95쪽)

궁금한가? 하지만, 소개는 여기에서 그치기로 하자. 더 궁금한 분들은 꼭 이 작은 책을 일독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덧붙여 제안한다.

역사의 물결 속에서 길을 잃기보다는 그 전진에 함께 하고 싶다면, 꼭 읽자. 두 명의 ‘칼’을!

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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